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성도 여러분의 뜨거운 기도와 응원 덕분에 중국 선교 일정을 은혜 가운데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일정은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까지 짧았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 그대로 짧고 굵은 선교 여정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마치 작은 사도행전의 한 장면을 직접 목격하고 온 듯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저와 동행했던 채희호·송은주 집사님 부부도 꼭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현지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이 그만큼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두 분 집사님은 그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이 한낱 작은 점처럼 느껴졌다고, 우리의 신앙이 참 부끄럽게 느껴졌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 순수한 중심과 뜨거운 열정 앞에서, 저 역시 제 자신을 밑바닥부터 다시 돌아보게 되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중국에도 합법적으로 등록된 교회가 존재합니다.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는 예배 때마다 공안이 한 명씩 버젓이 들어와 앉아 그 예배를 '지킨다'고 합니다. 지킨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감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자는 중국 당국이 그어 준 서슬 퍼런 선 안에서만 입을 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과연 교회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당국이 그어 준 선 안에서만 나오는 메시지, 그것이 과연 살아서 역사하는 복음이겠습니까. 그래서 진짜 교회는 다 지하로 숨어들었던 것입니다.
중국에 머무는 동안, 지하 교회 성도인 한 자매가 저희를 몇 시간 동안 정성껏 섬겨 주었습니다. 대화를 나누어 보니 참으로 신실하고 맑은 영혼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가볍게 농담을 하나 건넸습니다. "우리 교회도 지하 교회입니다."
저는 분명히 웃자고 던진 조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한국에도 지하 교회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너무 반갑습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한참을 궁리하다가, 결국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곳과 달리, '자발적' 지하 교회입니다."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이번에 저를 중국으로 초대해 주신 분이 계셨습니다. 식사 시간이었는지 차를 마실 때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만, 그분이 저에게 이런 불쑥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목사님, 중국에는 짝퉁도 많고 가짜도 정말 많은데, 딱 한 가지 진짜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저에게 문제를 내는 것입니다. 중국에는 짝퉁이 그렇게 많다고들 합니다. 가짜가 온 사방에 판을 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가짜들 틈바구니에서, 오직 진짜만 존재하는 것이 딱 하나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 제가 맞혔을까요, 못 맞혔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연히 맞혔겠지요. 제가 누굽니까. 강박국인데요.
저는 그 질문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정답을 내놓았습니다. "목사지요." 그러자 그분이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목사님. 중국에는 온갖 가짜가 넘쳐나지만, 목사만큼은 진짜입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참 부러우면서도, 동시에 제 자신을 향해 서늘한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진짜 목사인가. 저 땅에는 진짜밖에 없다는데, 과연 나는 진짜 목사인가.
여러분이 생각하실 때 진짜 목사는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그려 놓은 진짜 목사의 그림이 다 하나씩은 있지 않겠습니까. 진짜 목사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겠습니까.
저는 진짜 목사가 성도들이 우러러볼 만한, 흠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흠이 하나도 없어야 진짜 목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기에게 치명적인 흠이 있음을 솔직히 알고, 그 흠을 교묘히 숨기지 않으며, 그 상한 흠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오는 목사가 진짜 목사 아니겠습니까.
흠이 없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제게 이런 흠이 있습니다" 하고 그 부끄러운 흠을 안고 엎드리는 사람. 저는 바로 그 사람이 진짜 목사라고 믿습니다.
가짜 목사는 끊임없이 성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목사는 성도를 기필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려 하지 않겠습니까. 이 성도가 목사인 나에게 얼마나 잘하는지를 눈치 보며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도가 과연 예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지, 예수님을 온전히 닮아 가고 있는지를 가슴 졸이며 확인하지 않겠습니까.
목사들이 강단에서 흔히 '내 양, 내 양' 합니다. 여러분, 목사도 양입니다. 목사는 목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목자는 오직 주님 한 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습관처럼 내 양, 내 양 부르짖습니다. 그거 정말 비성경적인 이야기입니다.
가짜 목사는 주님의 양을 교묘히 이용해서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려 합니다. 그러나 진짜 목사는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어서 주님의 양을 먹이고 살리는 일에 전부를 던집니다. 분별해야 합니다.
가짜 목사는 사람을 사귀어도 힘 있고, 능력 있고, 폼나고, 뭔가 나에게 확실한 유익이 될 만한 사람에게 온 마음을 쏟으며 가까이하려 합니다. 그러나 진짜 목사의 시선은 늘 아프고 연약한 자의 밑바닥을 향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지금 누가 가장 깊이 앓고 있는지, 누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음하고 있는지에 먼저 눈길이 가고 마음이 꺾입니다.
가짜 목사는 죽어라 자기의 목회적 업적과 이름을 남기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러나 진짜 목사는 자신이 깨끗이 사라져도 오직 십자가 복음만 온전히 남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나는 티끌처럼 없어져도, 이 강단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남으면 된다. 그게 진짜 목사 아니겠습니까.
자, 여러분. 이게 과연 목사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겠습니까? 이 서늘한 질문이 여러분에게는 그저 남의 이야기처럼 상관없는 말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하박국서를 3주째 깊이 묵상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박국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던지시는 '진짜 성도 찾기 프로젝트'라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성도가 누구인가를 발가벗겨 보여 주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짜 성도가 누구이며, 진짜 에클레시아 교회가 과연 누구인지 그 분명한 답을 찾아서 하박국의 마지막 여정으로 함께 떠나 봅시다.
제가 저번 주에 유대계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엘리 위젤이 쓴 『밤(Night)』이라는 책에 나오는 아주 유명한 일화를 말씀드렸는데, 기억나십니까? 감사합니다. 요즘 뇌를 집에 얌전히 두고 오시는 분들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기억하신다고 하니 참 다행입니다.
그런데 엘리 위젤이 쓴 작품 중에는 『밤』보다도 훨씬 더 뼈아프고 유명한 책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희곡으로 쓴 『샴고로드의 재판』입니다. 이 발음이 '샴'입니다. 경상도 발음으로는 샴이 참 안 됩니다. 삼이 아니라 샴, 샴입니다. 『샴고로드의 재판』이라는 참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 희곡의 역사적 배경을 보면 1649년 유대인들이 처참하게 학살을 당합니다. 우크라이나에 있는 샴고로드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비극입니다. 당시 그 마을에 살던 유대인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도륙을 당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이라고는 여관 주인인 베리시와 그의 어린 딸 한나, 딱 두 명뿐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딸 한나마저도 끔찍한 폭행과 고문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피눈물 나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떠돌이 유랑 악단이 그 황폐한 마을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날이 마침 유대 민족의 구원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부림절이었습니다. 세 명의 유랑극단 배우가 마을로 찾아와서 여관 주인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오늘 이 마을에서 유대인의 위대한 구원을 기리는 연극을 한 판 벌이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여관 주인 베리시의 가슴속에서 시커먼 분노가 터져 나왔습니다. 베리시가 피를 토하듯 외칩니다. "구원에 대한 연극이라고요? 도대체 무슨 구원 말입니까? 처참하게 짓밟힌 우리에게 구원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 입에 발린 헛소리는 당장 집어치우십시오. 굳이 연극을 하겠다면, 저 하늘의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 하나님을 재판합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서슬 퍼런 제안이 마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가톨릭 신부를 비롯해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법정을 차리고,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을 피고석에 강제로 세웁니다. 그 재판의 죄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 백성을 향한 학대와 방관의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베리시가 하나님을 향해 시퍼런 칼날 같은 고발장을 들이댑니다. "하나님은 우리 유대인들이, 우리 죄 없는 백성들이, 우리 민족이 처참하게 학대받고 도살당하는 것을 뻔히 알고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침묵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비극을 모르셨다면 그분은 무능하여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고, 다 알고도 내버려 두셨다면 하나님은 지독하게 무관심하거나 아주 잔인한 폭군입니다."
그러므로 이 법정의 최종 결론은 유죄입니다. 하나님은 유죄입니다. 사람이 아니니 죄인이 아니라 '죄신'이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죄 많은 신입니다. 인간들이 모여 창조주 하나님께 그렇게 단호하게 유죄 판결을 때려 버렸습니다.

자, 여러분. 재판이라는 것은 검사가 있으면 당연히 변호사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살벌한 법정에서 아무도 하나님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변호를 맡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가 낯선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 책에서 이름이 '샘'입니다.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나더니, "내가 하나님을 변호하겠습니다" 하고 스스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샘의 변론을 가만히 들어 보니, 기가 막힐 정도로 놀랍습니다. 논리적이고 신학적으로도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변호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유죄라고 피를 토하는 베리시를 향해 서늘하게 쏘아붙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잘못이 없다. 잘못하실 리가 없다. 그분은 절대적으로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우리가 무지해서 모를 뿐이고, 우리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지, 하나님은 결코 틀릴 수가 없다. 하나님이 마치 잘못하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인간들이 자기 자유의지를 악용해서 이런 참극이 일어난 것이지, 하나님께는 티끌만큼의 문제도 없다. 그들이 참혹한 고난을 당한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은밀한 죄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탓이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죄대로 심판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는 언제나 옳다."
여러분, 지금 이 샘이라는 자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결백을 증명하겠다는 미명 아래, 학살당해 피 흘린 그 모든 사람들을 추악한 죄인으로 몰아세우는 논리를 들이댄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지킨다는 핑계로, 억울하게 죽어 간 희생자들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습니다. 너희 잘못이다. 유대인들이 도륙당한 것은 다 죽을 짓을 했기 때문이다. 차가운 신학적 논리로 피해자들의 피눈물을 다 덮어 버린 것입니다.
자, 그런데 여러분. 이 희곡의 마지막에 실로 소름 끼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그토록 열심히, 그토록 완벽하게 변호했던 이 사람, 이 샘의 진짜 정체가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이 샘이 과연 누구였을 것 같습니까?
샘의 정체는 사탄이었습니다. 마귀였습니다. 놀랍게도 사탄이 하나님의 변호인을 자처했던 것입니다.
이 충격적인 반전이 바로 『샴고로드의 재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이며, 희곡 전체를 단숨에 꿰뚫어 버리는 서슬 퍼런 칼날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이 책 전체를 통째로 놓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신앙의 폐부를 찌르는 칼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사탄, 성경이 고발하는 사탄은 언제나 흉측하고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신앙의 초짜들이나 하는 착각입니다. 사도 바울도 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고린도후서 11:1414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탄은 사탄의 험악한 탈을 쓰고 오지 않습니다. 사탄은 나타날 때 가장 하나님 편인 것처럼, 가장 경건한 척 위장하고 나타납니다.
교회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한 자들이 교회를 흔들고 무너뜨립니다. 믿음이 어중간한 사람들은 교회를 무너뜨릴 힘도 없습니다. 가장 열심이 특심하고, 가장 예수 잘 믿는 것 같고, 자기 스스로도 너무나 옳다고 확신하며, 자기는 오직 하나님 편이라고 자부하는 그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교회를 깨뜨립니다.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사탄은 결코 부정적인 모습으로만 찾아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너무도 하나님을 쏙 빼닮은 얼굴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해 내고, 완벽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얼마나 하나님을 그럴듯하게 변호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변호를 통해서 정작 피눈물 흘리며 고통받는 사람은 이런 잔인한 판결을 받습니다. "네가 그따위로 사니까 이런 꼴을 당하지." 이렇게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어 짓밟아 놓고, 하나님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결론을 내려 버립니다. 사탄이 이렇게도 역사합니다.

사탄의 이런 끔찍한 얼굴을 교회 안에서 본 적이 없으십니까?
암으로 고통받는 성도의 병상을 찾아가서 이렇게 쏘아붙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집사님, 혹시 하나님 앞에 털어놓지 않은 은밀한 죄가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런 죄가 있다면 샅샅이 찾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선포하면 선하신 하나님이 반드시 고쳐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주변에서 참 많이 보셨을 겁니다. 여러분, 이 말이 교리적으로 틀린 말입니까? 그 말 자체만 떼어 놓고 보면 결코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칼날 같은 말을 고스란히 듣고 있는 암 환자의 입장이 한번 되어 보십시오. 가슴이 어떨 것 같습니까?
암에 걸려 죽음의 공포와 통증으로 신음하는 환자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정죄와 죄책감까지 얹어 주는 꼴입니다.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잔인한 이중고를 겪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녀 문제로 피눈물 흘리는 부모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녀 때문에 억장이 무너져서 남들에게 차마 말도 못 꺼내고, 혼자 속을 숯검정처럼 태우며 통곡하는 부모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처절한 부모들의 눈물 앞에 '얼치기 하나님의 변호사'들이 불쑥 나타납니다.
이 얼치기 변호사들이 훈수 두듯 뭐라고 지껄입니까? "그동안 집에서 가정예배를 제대로 안 드리셨지요. 가정예배를 왜 안 드립니까? 가정예배를 똑바로 드려야 아이들이 빗나가지 않는 법입니다. 어릴 때 신앙교육을 바르게 시키셨어야지요. 그러니까 아이가 교회도 안 나오는 것 아닙니까. 집사님, 권사님, 부모의 영적 상태가 자녀에게 그대로 흘러가는 법입니다."
틀린 말 아닙니다. 원론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당사자의 모든 고난을 두고 '이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부모가 잘못 살아서 그렇다' 하고 멱살을 잡는 순간, 우리는 사탄을 닮은 하나님의 얼치기 변호사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피를 흘리고 있는 부모를 강제로 피고석에 앉혀 놓고, 그 찢어진 상처를 더 깊숙이 후벼 파는 잔인한 가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진 부모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번드르르한 변호나 차가운 원인 분석이 아닙니다. 가슴이 찢어진 부모에게 진짜 필요한 사람은 그저 곁에서 붙잡고 함께 목놓아 울어 줄 단 한 사람입니다. 오직 그 사람만이 필요합니다.
섣불리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것이 아닙니다. 찢어지는 아픔을 겪는 그 사람 곁을 지키며,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주는 것 말고, 그리스도인이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허덕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이렇게 쏘아붙이는 것도 봤습니다. "십일조 도둑질한 것 아닙니까? 십일조 똑바로 안 내시지요. 혹시 세금 떼고 남은 것에서 대충 떼어 내시는 것 아닙니까?"
참 기가 막힙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실제로 널려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신 것 아닙니까?" 이러면서 눈을 부라리고 변호사 노릇을 자처합니다.
이런 엉터리 하나님의 대변인들, 아무도 시켜 주지 않았는데 자기가 스스로 대변인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무자비한 짓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 의로 똘똘 뭉친 이 얼치기 변호사들 말입니다.
교회에서 목사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털어놓으면, 또 이렇게 훈계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주의 종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큰일 납니다. 목사님 문제는 하나님이 알아서 심판하실 테니, 우리는 절대 판단하지 말고 맹목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를 비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자주 하던 말도 있지 않습니까. "사람 보지 말고 하나님만 보고 신앙생활 합시다." 솔직히 저도 과거에 백 번은 넘게 했던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보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여러분, 상처받은 자리에서 그런 차가운 말을 듣고 '아, 내 믿음이 정말 깊어졌다' 하실 분이 여기에 과연 계십니까?
다들 영혼에 피멍만 들었을 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숨 막히는 종교의 멍에에 더 단단히 결박당합니다. 지독하게 종교적인 괴물이 되어서, 이제는 자기가 그 차가운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난도질하고 밧줄로 꽁꽁 묶어 버립니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교회를 혼란과 분열로 몰아넣는지 모릅니다. 진짜 순전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을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 놓는지 모릅니다.
저는 교회 안에서나 목회 상담을 하다가 이런 깊은 상처를 안고 오시는 분들을 참 많이 만납니다. 사방에서 얼치기 변호사들에게 난타당하고 와서, 그 억울하고 아픈 사연들을 제 앞에 눈물로 다 쏟아 놓으십니다. 그러면 저는 그런 분들에게 성급하게 직답을 던져 드리지 못합니다. 이미 영혼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정답을 소화해 낼 힘조차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뜻 답을 주지 못합니다.
도리어 제 속에서는 그 알량한 얼치기 변호사들을 향해 이런 말이 불쑥 솟구칩니다. "너나 잘하세요." 속으로만 삭입니다. 해 줄 말이 없어 차라리 침묵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깨닫는 법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우자가 삶의 무게로 힘들어하면, 곧바로 혀를 차며 이렇게 훈수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진작부터 기도하라고 했잖아." 집에서 이런 말 참 많이들 하시지요. "내가 엎드리라고 할 때 안 엎드리더니 꼴 좋다. 당신이 말씀대로 똑바로 안 사니까 이런 환난을 당하지."
이 잔인한 얼치기 변호사들이 거룩해야 할 가정 안에도 득실거립니다. 여러분, 배우자가 지금 바라는 것은 내 찢어진 마음을 그저 알아 달라는 것 아닙니까. 너무 아파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힘들어하는 것입니다. 내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믿는 사람에게 '내 마음 좀 제발 안아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데, 우리는 시키지도 않은 하나님의 얼치기 변호사 노릇을 하며 칼을 꽂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는 대단하게 하나님을 잘 믿는 의인인 척하면서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욥기를 읽어 보면 욥의 친구들이 줄줄이 등장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저지른 가장 결정적인 잘못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교리적으로 틀린 말을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들이 지은 가장 무거운 죄는, 피눈물 흘리며 호소하는 욥의 처절한 울음소리에는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 '얼치기 변호사' 노릇을 자처했다는 점입니다. 그게 바로 죄입니다.
평생을 함께한 친한 친구가 뼈를 깎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 맺힌 절규는 철저히 외면한 채 이렇게 차갑게 쏘아붙입니다. "너 딱 보니까 네가 숨겨 둔 은밀한 죄가 있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이유 없이 이런 재앙을 내리시겠어?" 그렇게 훈계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하나님께 불벼락 같은 책망을 듣지 않습니까.
이 욥의 친구들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면 대단히 단정하고, 빈틈없이 신학적입니다. 반면에 욥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들은 지극히 비신학적으로 들립니다. 어떨 때는 너무도 거칠고 위태롭게 보입니다. 욥은 심지어 하나님을 이 끔찍한 고통과 재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하듯 따져 묻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시지 않았습니까?" 이러면서 하나님 앞에 거칠게 항의를 쏟아냅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하나님, 대답 좀 해 보십시오." 이렇게 울부짖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 모습만 보면, 친구들이 진짜 하나님 편이고 욥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불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 제가 여기서 노파심에 분명히 한마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여러분이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그 거친 말투와 욥의 모든 주장을 무조건 옳다고 박수 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 또 '아, 하나님께 저렇게 대들어도 되는구나' 하고 착각하는 분들이 계실까 봐 제가 확실하게 브레이크를 잡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네가 그렇게 따지는 것이 옳다" 하고 칭찬하신 적이 없습니다. 욥기 후반부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히려 욥을 엄히 꾸짖으십니다. 사나이 대장부답게 허리띠를 동여매고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보라 하시면서 욥의 콧대를 꺾어 놓으십니다. 욥의 거친 태도를 다 용인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욥기를 관통하는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마음껏 대들어도 된다, 우리는 자녀니까 제멋대로 굴어도 상관없다, 그런 안일한 뜻이 아닙니다. 욥의 거친 항의 자체가 의로웠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욥은 그 피 말리는 고통과 항의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과 손길과 간절한 기대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불평을 터뜨려도 하나님 면전에서 터뜨렸고, 항의를 쏟아내도 "하나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며 끝끝내 하나님만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신 것은 바로 그 중심이지, 결코 욥의 거친 태도 자체가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을 밀어내기 위하여 "하나님, 당신은 엉터리 신입니다" 하고 따진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똑똑히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자가, 그 하나님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고 처절하게 매달린 것입니다. 밀어낸 것이 아니라 매달린 것입니다.
부모가 속 썩이는 자식에게 "너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집 나가라" 소리치면, 그게 진짜 집을 나가라는 뜻입니까? 제발 나가지 말고 내 곁에 꼭 붙어 있으라는 역설적인 외침 아닙니까. 성경에도 이런 반어법이 무수히 많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잔인한 분이니 이제 내 인생에서 꺼져 주십시오." 욥은 이렇게 돌아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몸부림치며, 가랑이 붙잡고 늘어지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찢어진 중심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어쭙잖은 종교성에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럴듯한 포장지가 아니라 진짜 속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진짜 마음 말입니다. 여러분 영혼 밑바닥에 도사린 진짜 중심을 달아보시고, 바로 그것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판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그토록 그럴듯하게 변론했던 욥의 세 친구들을 향해 무섭게 진노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추상같은 판결을 내리십니다.
욥기 42:7-87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8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이 너희를 위하여 눈물로 중보 기도해야 하고, 욥이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를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준엄한 말씀입니다. 욥이 너희를 먼저 용서해야 비로소 내가 너희를 용서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이 얼치기 변호사 짓을 하던 교만한 친구들 앞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피투성이가 된 욥의 손을 번쩍 들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통받는 이웃 앞에서, 살이 찢기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 하며 훈수 두는 얼치기 변호사 노릇이 결코 아닙니다. 고통받는 자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일입니다. 참 단순하지 않습니까. 교리적인 변호사 노릇이 아니라, 그 아파하는 사람의 피눈물 곁에서 가슴을 치며 같이 울어 주는 것입니다.
엘리 위젤이 『샴고로드의 재판』이라는 이 처절한 작품을 통하여 마지막에 그토록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변호해 줄 인간 변호사를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외침입니다.
우리의 번드르르한 변호는 창조주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알량한 변호 따위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명되거나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결백을 입증할 메마른 변호가 아니라, 고통의 심연에 빠진 사람 곁에 온몸으로 함께 있어 주는 일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여러분, 내 곁에서 누군가 피를 흘리며 울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의 높은 뜻을 다 아는 것처럼 훈계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지금 내 눈앞에서 삶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변호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의 찢긴 상처에 죄의 낙인을 찍고 정죄한다면, 그것은 결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장에 시퍼런 대못을 박는 가증한 폭력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자들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라 고발합니다. 교회 안에 이 차가운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솔직히 제 안에도 이 흉측한 바리새인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도 다 숨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내가 그토록 하나님을 변호한다는 핑계로 정죄하고 난도질했던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 것이 아닙니다. 정작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할 대상은, 사람을 난도질하고도 그 곁에서 눈물 한 방울 흘려주지 못한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 흉측한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으며 살아가는 것을 두고, 성경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오늘 찾으시는 성도는 고통과 실패의 낭떠러지 앞에 선 자를 향해 "성도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걸 원하십니다" 하며 어쭙잖은 신학 지식으로 정답이나 읊어 대는 사람이 아닙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온전히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바닥에서 목놓아 울어 주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에게는 감히 하나님을 변호할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변호하겠답시고 늘어놓는 그 모든 말속에는, 사실 교묘한 아부가 가득 차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나님 편을 그럴듯하게 들어주면, 하나님이 내 인생에 복을 주시고 잘 대우해 주실 것 같은 계산된 아부입니다. 역겨운 아부 말입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비겁한 아부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간절히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목숨 걸고 사랑하시는 그 영혼의 찢어지는 아픔에 함께 뒹굴며 동참하고, 그 영혼의 회복과 기쁨 앞에 함께 덩실덩실 춤추며 웃어 줄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성숙은 성경 지식을 많이 쌓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능력을 받아 대단한 은사를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된 성숙이라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신학적 진리를 꿰뚫고 있는가로 증명되지 않습니다.
진짜 신앙의 성숙은, 다른 사람이 좋은 일과 기쁜 일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시기하지 않고 온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영적인 실력이고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의 참담한 아픔을 보았을 때, '저 사람 예수 저따위로 믿다가 결국 저 꼴 날 줄 알았다' 하고 정죄하고 싶은 그 더러운 본능을 처절하게 억누르는 것입니다.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처지를 신학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고, 그저 곁에서 조용히 눈물 한 방울 함께 흘려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제 가슴이 찢어집니다. 너무 힘듭니다. 저 영혼 불쌍해서 어떡합니까." 이렇게 가슴을 치며 기도해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 그 눈물과 탄식으로 진짜 믿음이 증명되는 법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눈물을 보고, 여러분의 웃음을 보면서 여러분의 신앙 상태를 체크합니다. 여러분은 잘 눈치채지 못하시겠지만, 저는 여러분과 마주 앉아 대화할 때 여러분이 과연 무엇을 보고 통쾌하게 웃고, 무엇을 보며 가슴 아프게 우는지를 유심히 들여다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봉사하고, 담임목사인 저에게 싹싹하게 잘하면 제가 '아, 저 성도 참 믿음 좋다' 하고 인정해 줄 것 같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이 무엇을 보고 울고, 무엇을 보며 웃는지를 살피면서 여러분의 진짜 신앙을 확인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그 영혼의 숨길 수 없는 진짜 신앙의 잣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울고 무엇을 보고 웃는지를 가만히 지켜보면, 그 사람의 숨겨진 중심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진짜 신앙이 보이고, 그 영혼이 품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교리적 지식이나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 행위로는 사람의 속을 온전히 분별해 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눈물과 웃음은 너무도 정직합니다. 결코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 정직한 반응으로 그 사람의 진짜 믿음의 현주소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솔직히 저를 사랑해 주시는 성도님들이 참 많지 않습니까. 저를 정말 깊이 사랑하는 분들을 가만히 보면서, 그 관계가 어떻게 맺어졌는지를 한번 찬찬히 관찰해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다들 저 사랑하시지요? 뭐, 안 하신다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저를 사랑하고 저 역시 여러분을 다 사랑하지만, 그 사랑 안에서도 유독 깊은 중심을 나누는 관계가 따로 존재합니다. 다 같은 사랑인 것 같아도, 그 깊이와 무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를 깊이 사랑하게 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다들 제 설교를 듣고 '와, 우리 목사님 말씀이 참 깊고 좋다' 하면서 은혜를 받고 좋아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진짜 깊은 사랑으로 묶이는가를 보니,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있었습니다. 자신이 피눈물 나게 아플 때 제가 곁에서 진짜로 함께 울어 주었을 때입니다. 자신이 너무 기쁠 때 '우리 목사님이 내 일처럼 진짜 기뻐하는구나', '우리 목사님이 내 찢어지는 고통에 진짜로 함께 아파해 주는구나' 하는 그 진심을 맛보았을 때였습니다.
여러분의 아픔 앞에서 제가 흘린 진실한 눈물을 본 사람들은 저를 진짜로 사랑하게 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아픔에 겉치레가 아니라 진짜 눈물을 흘려 준 사람, 제 작은 기쁨에도 자기 일처럼 덩실덩실 기뻐해 준 그 사람을 저도 모르게 가슴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저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을 살면서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위하여 진짜로 웃어 주고, 나를 위하여 진짜로 피눈물 흘려 준 사람, 내 아픔을 함께 울어 준 사람들은 저를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다릅니다. 눈가에 늘 촉촉한 이슬이 맺혀 있습니다. 내가 아플 때 건성으로 위로하지 않고 진짜로 가슴을 쥐어뜯으며 웁니다. 전화 한 통이 걸려 와도 목소리의 떨림부터가 다릅니다.
지금 여러분이 가슴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 사람이 지금 누구입니까? 내가 잘되었을 때 시기하지 않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사람 아닙니까. 내가 무너지고 괴로워 신음할 때, 차가운 훈수가 아니라 자기 일처럼 부둥켜안고 울어 준 바로 그 사람 아닙니까. 나에게 잘난 척하며 정답을 가르치려 든 사람이 아니라,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묵묵히 닦아 준 사람, 내 곁의 찬 바닥을 함께 지켜 준 바로 그 사람 아닙니까.
여러분, 성도의 참된 신앙고백과 진짜 믿음은 내 입술로 화려하게 하나님을 읊조리고 찬양하는 것보다,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가슴을 치며 울고 있고 무엇 때문에 웃고 있는가에서 훨씬 더 정확하게 까발려집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 시작하며 찬양할 때도 해남 집사님, 정미 집사님이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왜 우는지를 아니까 그 모습을 보며 곁에서 같이 우는 것입니다. 그 가슴속 눈물이 어떤 눈물인지 그 중심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자격 없는 죄인이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덮어 주시는 그 하나님. 오직 그 하나님 한 분 때문에 터져 나오는 감격의 눈물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15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높은 절정입니다.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자의 온전한 모습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데, 여러분 표정을 가만히 보면 꼭 꾸중 듣는 사람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꾸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정반대로 살아가려는, 여러분 안의 완악한 옛사람을 향해 호통치는 것입니다.
이번에 중국에 가서 한 사업가를 만났습니다. 이분의 기막힌 인생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꼭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젊은 시절 체육 교사를 몇 달 하다가, 교직이 자기 옷이 아닌 것 같아서 과감히 그만두고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업이 파죽지세로 일어났습니다. 몇 년 만에 100억을 만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1,000억이 넘는 돈을 굴리는 거대한 신흥 갑부가 되었습니다.
풍채를 딱 보니 천생 상남자입니다. 그냥 눈빛만 보아도 '아, 진짜 사내네' 싶은 사람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 송은주 집사님이 그분을 보더니 저에게 이럽니다. "목사님, 우리 장진경 집사님 판박이 아닙니까?" 그래서 중국에 머무는 내내 저희끼리는 그분을 그냥 장진경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뀌면서 문제가 터졌습니다. 정치권에 얽힌 복잡한 인간관계 때문에 하루아침에 검찰 중수부에 불려 갔습니다.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두 번이나 끌려가 피 말리는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벼랑 끝에서 치열한 법리 투쟁을 벌인 끝에, 마침내 무죄 선고를 받아 냈습니다.
그러나 그 무죄를 입증해 내는 처절한 과정 속에서, 평생 일군 모든 것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피땀 흘려 번 전 재산도 날아갔습니다. 남자의 자존심인 명예도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심지어 그 풍파에 가정이 완전히 박살 났고, 곁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썰물처럼 다 떠나 버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은 그분이 5년 전, 낯선 중국 땅으로 혈혈단신 건너갔습니다. 말 그대로 맨바닥에 헤딩이었습니다. 그렇게 밑바닥에서 피눈물 흘리며 사업을 다시 일궜습니다. 온갖 고생 끝에 그분이 저를 보며 벅찬 얼굴로 이럽니다. "목사님, 올해 드디어 처음으로 흑자가 났습니다."
하지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분의 얼굴에는 지나온 세월의 억울함과 응어리진 분노가 시커멓게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친 상남자가 제 손을 쳐다보더니 이런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목사님, 저는 여태껏 살면서 설교를 단 한 번도 끝까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떤 설교든 듣다가 답답해서 다 껐지 끝까지 들은 적이 없는데, 얼마 전에 목사님 설교를 소개받고 듣다가 나도 모르게 끝까지 다 듣게 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끝까지 들은 설교는 목사님 설교가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는 것입니다. "오늘 목사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만히 들어 보니, 어쩌면 그렇게 제 가슴 밑바닥에 있는 것과 똑같은 말씀만 하시는지요. 목사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이 단 하나도 틀린 것이 없고, 제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 없이 고스란히 박혀서 너무너무 놀랐습니다."
제가 그렇게도 좋았는지, 그분은 짧은 일정 내내 어떻게든 저와 눈을 맞추고 곁에 있으려 했습니다. 저는 선교 일정이 빡빡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도, 이분은 늘 제 주변을 맴돌며 자리를 지켰습니다. 심지어 저녁에는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혹시 내일 아침 호텔에서 몇 시에 식사하십니까?" 그 아침 식사 시간이라도 맞춰 나와서 저와 단 몇 마디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침 7시 반에 식사할 예정이라고 하니, 정확히 그 시간에 식당 입구에 나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참으로 깊고 귀한 영혼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제가 그분에게 가만히 이런 이야기를 건넸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꼭 두 가지를 말하려 합니다."
첫째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이로 보니 내가 당신보다 큰형님뻘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의 든든한 그늘이 되어 주고 싶습니다. 사업하다가 지치고 고단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와서 기대십시오. 언제든지 찾아와도 좋습니다. 내가 당신의 그늘이 되어 줄 테니, 지칠 때마다 편히 기대어 쉬십시오." 알고 보니 우리 채 집사님보다 한 살이 더 많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형이 되어 줄 테니, 나를 넓은 그늘 삼아 쉬어가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업을 위하여 지금부터 기도할 생각입니다. 만약 당신의 사업이 다시 성공하고 일어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니 흘려보내는 삶을 사십시오."

그러면서 그 상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인생은 딱 두 가지 길밖에 없습니다. 녹슬어 비참하게 없어지든지, 닳아서 없어지든지.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을 존재인데, 인생은 딱 두 부류로 갈립니다. 제 욕심만 부리다가 녹슬어 썩어 없어지는 사람과, 주님 앞에 하얗게 닳아서 없어지는 사람입니다. 나는 주님 제단 앞에서 닳아서 없어지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그 서슬 퍼런 말을 듣자마자, 그 강철 같던 상남자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면서 대답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제 손을 붙잡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그분은 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굵은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 말입니다. 저 역시 그 상남자의 뜨거운 눈물 앞에서 가슴이 먹먹하여 울컥울컥했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였습니다. 1,000억을 잃고 가정이 박살 나는 그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그 독한 사람이, 제 손을 쥐고 그렇게 목놓아 울었습니다.

여러분, 그날 그분의 텅 빈 통장에 갑자기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은 것도 아닙니다. 재산이 다시 돌아온 것도 아니고, 무너진 가정이 당장 회복된 것도 아닙니다. 그를 옥죄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피눈물도 흘리지 못했던 그 사람이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세상 아무도 믿지 못했던 사람이 떨리는 믿음의 손을 붙잡았습니다. 철저히 혼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는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기 시작했고, 그 은혜를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참된 회복이란 잃어버린 것을 악착같이 되찾는 데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나를 단 한 번도 잃어버리지 않으셨던 그 신실하신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게 진짜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그날 그 거친 상남자가 붙잡았던 손은 강봉규 목사의 손이 아니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제 보잘것없는 손이 도대체 무슨 수로 그 영혼의 눈물을 터뜨리겠습니까. 제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분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태초부터 자기를 놓지 않으셨던 하나님의 강한 손이 지금 내 손을 쥐고 있다는 것을, 이성으로는 몰라도 영혼 깊은 곳에서 알아차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굵은 눈물이 쏟아져 나온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는 자들과 함께 운다는 것은 그 사람의 모든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른 눈물이 멈출 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 준다는 말입니다. 저는 그걸 '의리'라 그럽니다. 의리 말입니다.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가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찢어지는 슬픔 앞에 끝까지 나도 동참하며 곁에서 함께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입니다. 즐거워하는 자와 끝까지 함께 즐거워하겠다는 것은, 그 즐거워하는 사람의 기쁨을 온전히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 말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바라보며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니까 내가 설명해 줄게" 하고 교만하게 훈수 두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곁에서 눈물을 함께 닦아 주고 함께 흘려주는 사람입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향해 "네가 이래서 상처를 받은 거야, 이건 이렇게 해 봐, 부모 학교라도 가 봐" 하면서 차갑게 원인 분석이나 해 대는 자가 아닙니다. 상처 입은 사람 곁에 조용하게 있어 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선지자 하박국이 도착한 마지막 여행지입니다. 하박국서는 우리를 바로 이 자리로 데리고 옵니다.
하박국도 처음에는 세상의 강포와 부조리에 분노했습니다.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끝없이 질문을 던졌고, 하나님을 몹시 못마땅해했습니다. 하박국이 탄식하며 가장 많이 내뱉었던 말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왜입니까?" 왜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박국에게 찾아오셔서 주신 진짜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모든 이유를 시시콜콜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딱 한 가지 명백한 사실만을 심장에 새겨 주셨습니다. 이러저러한 일 때문에 네가 고난을 겪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신 것이 아니라, "말해도 너는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시면서 오직 한 가지 사실만 귀띔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아,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을 너는 다 알 수 없단다. 내가 일하는 방식을 네가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네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순간에도 너는 이것 하나만은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너를 놓지 않는다는 사실 말이다."
지금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부조리와 문제, 도무지 저 사람이 왜 저러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수많은 사건들. 우리는 날마다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이해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성도는 이것 딱 하나만 알고 있으면 됩니다.
"내가 너를 붙잡고 있는 이 손이 너를 절대로 놓지 않는다. 단 한순간도 너를 놓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바로 이 음성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러분, 하박국이 이 하나님의 음성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슴으로 알아차리자 눈앞의 참혹한 환경은 이전과 똑같은데, 그 영혼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마침내 하박국은 그 거룩한 음성에 화답하는 찬송을 목놓아 부르기 시작합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바로 이런 노래입니다.
비록 통장 잔고가 바닥이 나고, 피땀 흘려 투자한 돈을 모조리 날리고,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뜯기고, 살던 집이 법원 경매로 넘어가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혔을지라도, 나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으로 인하여 춤추며 기뻐하리로다. 나의 구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찬송하리로다.
하박국이 인생의 벼랑 끝에서 바로 이 노래를 터뜨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박국은 지금 가난과 결핍을 그럴듯하게 미화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뼈아픈 파산을 낭만적으로 노래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나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마냥 좋습니다." 지금 이런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신 하나님의 손에 내가 온전히 붙들려 있으니, 내 인생은 결코 무너지지 않음을 보았습니다." 지금 이 고백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현실의 참담한 상실을 눈감아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상실보다도 크신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한 것입니다.
모든 상실보다 크신 하나님께서 나를 단 한순간도 떠나지 않으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바라보시며, 강한 손으로 붙드시고, 친히 일하시며 섭리하고 계시다는 그 진실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똑똑히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을 가슴 치며 찬송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하박국의 노래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다"며 현실을 도피하는 노래가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내 손에 쥔 것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이 내 곁에 살아 계시니 나는 노래합니다." 바로 이 위대한 믿음의 찬송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바르게 믿는 것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은 결코 어렵고 복잡한 신학에 있지 않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온전히 즐거워하십시오. 피눈물 흘리며 우는 자들과 함께 바닥에서 목놓아 우십시오.
"하나님, 도대체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묻고 계십니까. 바로 이것 하나만 온몸으로 살아 내면 됩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길이며, 하박국의 그 위대한 노래를 내 삶으로 살아 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박국의 노래를 삶으로 부른다는 것은 딴것이 아닙니다. 우는 자의 곁에서 함께 울어 주고, 기뻐하는 자의 곁에서 시기 없이 같이 즐거워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완성입니다.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내 삶에서 이것 하나만 정직하게 체크하면 됩니다.
지난 3주 동안 하박국과 함께 걸어온 이 치열했던 믿음의 여정이, 여러분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거룩한 흔적과 깊은 은혜를 남겼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