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3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하박국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아마 대부분은 이 찬양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즐거워하리라." 하박국 하면 단연 이 찬송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하박국을 떠올릴 때, 바로 이 찬양만 안다는 사실입니다. 하박국에 담긴 메시지와 신학적 깊이는 정작 우리 안에 거의 없습니다. 하박국 하면 떠오르는 것이 겨우 이 찬송 한 구절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부터 여름 특집 설교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즐겨 부르는 이 찬양이 도대체 어떤 배경에서 터져 나왔는지, 하박국서 안으로 3주 동안 영적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제가 3주 동안 영적 가이드가 되어, 여러분을 2,600년 전 하박국 선지자가 호흡하던 그 뜨거운 현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하박국서는 소위 소선지서로 분류됩니다. 여러분, 선지자 하면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여러분 생각에 구약의 선지자는 과연 무엇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하십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죄를 책망하고, 심판을 선포하며, 회개를 촉구하는 사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성도들에게 전하기도 합니다. 결국 선지자란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박국은 좀 다릅니다. 다른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었다면, 하박국은 우리의 말을 하나님께 전달해 주는 아주 특별한 선지자입니다. 순서가 거꾸로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었지만, 하박국은 우리의 마음과 답답한 현실을 하나님께 들고 올라갔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질문들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나님을 믿는 나에게 어떻게 이런 비극이 찾아온단 말인가?" "어떻게 이런 불의를 보고도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가?"
우리는 이런 질문을 가슴에 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성도들은 이 질문을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말을 꺼내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고, 다른 이들에게 믿음 없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속에서 질문이 폭발하는데도,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그저 마음속에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우리 모습이 대체로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우리의 이 답답한 마음을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모릅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그 질문들을 하박국이 시원하게 대신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돌직구를 날립니다. "하나님, 이게 정말 말이 됩니까?" 하고 따지기도 하고,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대신 울부짖으며 속을 털어놓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박국이 참 좋습니다. 하박국은 인간의 아픔과 마음 깊은 곳의 질문을 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진정 '내 편' 같은 선지자입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우리를 호통치고 혼내는 엄한 스승 같지만, 하박국은 내 가슴속 응어리를 하나님께 고해주는 따뜻한 대변자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서에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앞으로 3주 동안 하박국 속으로 영적 여행을 떠날 때, 나를 대신해 하나님께 부르짖는 하박국의 고백을 통해 속이 시원해지는 위로와 통쾌함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약 2,600년 전으로 영적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하박국서 안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여러분, 여행을 다니다 보면 이런 장소가 있지 않습니까? 남들은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고, 어느 누구도 "참 특별한 곳이다" 말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끌려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은 그런 장소 말입니다. 남들에겐 평범해 보여도, 이상하게 마음이 당겨서 가만히 앉아 바라보게 되는 자리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하박국 1장 1절이 바로 그런 장소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지나치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남들이 관심 가지지 않는 이 한 구절 앞에서, 저는 너무나 오랫동안 머물며 그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박국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박국 1:11선지자 하박국이 묵시로 받은 경고라
"선지자 하박국이." 참 단순하지 않습니까? '선지자 하박국', 그 이름 앞에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다른 선지자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누구의 아들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어떤 가문과 배경을 가졌는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화려한 수식어들이 이름 앞뒤로 빽빽하게 붙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다릅니다. 그 어떤 수식어 하나 없이 그저 '선지자 하박국', 이것으로 끝입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학적으로 보면 아무 수식어도 없으니 그저 무미건조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래서 이 문장이 참 좋습니다.
제 눈에는 이 문장이 아무것도 없는 껍데기가 아니라, 불필요한 인간의 조건들을 다 감해낸 거룩한 문장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계급장, 배경, 가문의 자랑거리 같은 불필요한 것들을 싹 잘라내고, 오직 선지자라는 본질 하나만 남겨놓은 문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장이 참 좋습니다.
저는 수많은 배와 사람과 해산물이 북적거리는 항구를 찾아가는 여행을 참 좋아합니다. 제 고향이 부산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갈치시장처럼 사람과 배가 활기차게 뒤엉킨 곳에 가면 왠지 마음이 살아나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그런데 때로는 전혀 다른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영광 법성포에 가서 거의 한나절을 혼자 앉아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람 하나 없었습니다. 그저 갯벌 위에 배 한 척이 덩그러니 올라와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포구 전체에 인기척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그 뻘밭에 올려진 배 한 척을 바라보며, 한나절 내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오랫동안 그 풍경을 담았던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저는 왜 아무 볼거리도 없는 그 갯벌과, 덩그러니 올라앉은 배 한 척을 보며 한나절을 보냈겠습니까?
볼 것이 아무것도 없어야, 비로소 딱 하나가 제대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볼거리가 많으면 시선이 산만하게 분산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볼 것이 없으면, 오직 하나에 시선이 선명하게 고정됩니다.
사람도 없고, 건물도 없고, 화려한 간판도 없습니다. 내 시선을 빼앗아 갈 그 어떤 것도 없으니, 비로소 오래된 그 배 한 척이 제 눈과 가슴속에 꽉 차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 배에 서린 애환과, 그 배를 몰던 사람들의 삶과, 낡아진 페인트 색깔까지 모든 풍경이 온전히 내 안에 담기기 시작합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하박국 1장 1절은 저에게 바로 그 한적한 포구의 뻘밭에 덩그러니 올려진 배 한 척을 바라보는 듯한 은혜를 줍니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어느 지역 출신인지, 학력이나 경력이 어떠한지 아무런 수식어도, 자랑거리도 붙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에게는 '하박국'이라는 선지자 한 사람의 본질이 더욱 선명하고 뜨겁게 다가왔습니다.
저는 이번 여름, 이 하박국 선지자를 깊이 묵상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필요한 껍데기를 떼어내고 나니,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너무나 뚜렷하고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들은 그저 내 이름 석 자 하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이상할 만큼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저 아무런 배경 없이 내 이름 하나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우리는 늘 깊은 결핍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이름 앞에 무언가를 자꾸만 덧붙이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뭔가를 자꾸 얹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름 앞에 무엇을 붙이려 하십니까? 화려한 학력을 붙이려 하고, 높은 학위를 붙이려 합니다. 대단한 경력과 직함을 붙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 년 연봉을 붙여서,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세상 앞에 끊임없이 증명하고 싶어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여러분, 왜 우리는 이름 앞에 이런 것들을 자꾸 붙이려 하겠습니까?
이런 수식어들이 내 이름 앞에 붙어야, 남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내가 제법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나를 돋보이게 만들려고 붙여놓은 이 수많은 수식어들이 더덕더덕 붙다 보면, 어느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진짜 '나'라는 본질이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껍데기 같은 수식어가 나 자신이 되어버리면, 정작 진짜 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수식어가 무엇입니까? 수식어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돕기 위해 존재하는 부속품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수식어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수식어가 주인 노릇을 하고 진짜 '나'는 사라집니다.
그러면 결국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무엇을 이루어도 공허합니다. 아무리 쌓아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수식어로 나를 증명하려 들면, 원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조차 잠깐 기쁠 뿐 이내 헛헛해집니다. 그리고는 더 많은 수식어에 집착하여, 끝도 없이 내 이름 앞에 무언가를 더 얹으려고 발버둥 치게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 욕망의 굴레는 절대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저도 제 이름 앞에 수식어가 참 많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 이름 앞에도, 제 이름 뒤에도 수식어가 꽤 많이 붙어 다닙니다.
목사라는 타이틀 앞에도 그냥 '강봉규 목사'라고만 붙지 않습니다. 제 이름 앞에는 늘 일하며 사역하는 자비량 목사, 직업을 가진 이중직 목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곤 합니다.
어떤 분들은 저를 보며 "목사님은 특수목회를 하시네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선뜻 동의하지 않지만, 특수목회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경우도 더러 보았습니다.
게다가 여러분은 저를 볼 때마다 피부에 광이 난다며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목사가 저렇게 잘생겨도 되나" 하는 수식어부터, 피부 좋은 목사라는 수식어까지 저한테 붙습니다.
제가 예전에 어떤 교회에 설교 초청을 받아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를 회중 앞에 이렇게 소개하더군요. "오늘 오신 강사 목사님은 재야에 숨어 있는 무림의 고수이십니다."
그 소개를 듣는데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마 그 목사님은 무협지를 엄청나게 읽으신 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소개를 하시는 바람에, 그 뒤로 그 교회에 갈 때마다 제 이름 앞에는 '무림의 고수'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제 이름 앞에 붙은 수식어가 하나 있지 않습니까? 백 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목사, 일명 '백하목'입니다. 물론 이 수식어는 제가 여러분을 끊임없이 세뇌시켜 만든 감이 있기는 합니다.
어쨌든 돌아보면 제 삶에도, 제 이름 앞에도 이런저런 수식어들이 꽤나 많이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는 내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이 모든 수식어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딱 하나만 붙어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다 떨어져 나가고 오직 하나, 이것만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단어 하나만 제 이름 앞에 딱 붙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목사 강봉규'라고 쓰지 마시고, '그리스도인 강봉규'라고 써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단어 하나만 제 앞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이름 앞에 수식어는 딱 하나, 바로 그것만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우니, 앞에 '참' 자 하나만 더 붙입시다.
'참 그리스도인 강봉규.' 이렇게 '참' 자 하나가 붙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예전에 설교하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50대 때 제 묘비명에 이렇게 적히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한 사람, 여기에 잠시 잠들다."
그것이 제가 50대 시절 내 묘비에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도 사랑한 사람, 여기에 잠시 잠들다.
그러다가 60대가 딱 되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다시 고쳐 쓰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 사랑한 사람, 부활의 날까지 여기에 잠시 잠들다."
그런데 이번 주에 하박국 1장 1절을 묵상하다가 제 마음이 또 바뀌었습니다.
그저 심플하게, '참 그리스도인 강봉규'. 내 문패 앞에, 내 묘비명 앞에, 내 이름 앞에 이것 하나만 붙어 있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 강봉규, 부활의 날까지 여기에 잠시 잠들다."
이렇게 깔끔하게 써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70대가 되면 또 바뀔지도 모릅니다. 신앙이 더 성숙해지고 주님과 깊어질수록 더 깊은 은혜가 보이면 또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 제 가슴에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이름 하나만 남아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대화하면서 누군가를 칭찬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극찬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그 말을 들어보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정말 깊이 인정하고 자랑하고 싶을 때, 저는 그분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 집사님은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누군가를 향해 "이 집사님, 진짜 그리스도인이에요" 하고 소개할 때는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그분을 진심으로 부러워한다는 뜻입니다. '아, 나도 이분을 닮아가야겠구나. 나도 이분의 삶을 좇아가야겠구나' 하고 마음 깊이 존경하는 분들에게만 붙여주는 단어입니다. 참 그리스도인.
그런데 우리는 이 토록 귀한 직분을 놔두고, 자꾸만 권사가 되려 하고 장로가 되려 하며 목사가 되려 합니다. 그리고는 그런 직함들을 무슨 계급장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여러분, 천국에서 인정받는 진짜 계급장은 오직 하나,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입니다.
우리 신앙의 성숙이라는 것은, 내 삶에 무언가가 더 붙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신앙이 성숙해진다는 것을 자꾸 무언가가 얹어져서 더 많이 아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성숙은 오히려 내 안에서 불필요한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과정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껍데기가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착각했던 지식이 떨어져 나가고, 내가 대단하다고 믿었던 자랑거리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바로 진짜 신앙의 성숙입니다.
내 이름을 빛내주던 그 모든 화려한 수식어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 분명하고 선명하게 남는 것. 저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성숙이요 거룩이라 믿습니다.
제가 요즘 성화에 대해 갖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그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거룩을 '성화'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예전에 저는 성화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내 믿음이 더 깊어지고, 내 인격이 더 훌륭해지며, 나라는 사람이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 날마다 주님 앞에서 내가 더 고상하고 훌륭해지는 것을 성화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세월이 흘러갈수록 성화가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룩의 진짜 얼굴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성화란 내가 날마다 대단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아닙니다. 내가 점점 없어지고, 내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훌륭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깨어지고, 내가 죽어지고, 내 고집스러운 자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부서진 자리마다 주님이 드러나서 오직 주님만 선명해지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사라지고, 내 자랑이 뿌리뽑히며, 내 옳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배워도 내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자기 옳음을 증명하느라 얼마나 서슬이 퍼렇습니까?
그러나 그 내 옳음이 사라지고, 내가 내세웠던 그 모든 수식어들이 다 벗겨지고 그리스도만 남는 것. 내 삶에, 내 이름에, 내 가슴속에 오직 그리스도 그분 한 분만 남는 것입니다.
해변의 다른 볼거리들이 다 사라졌을 때 비로소 낡은 배 한 척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던 것처럼, 내가 붙들고 있던 세상의 껍데기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야 비로소 내 안에서 가장 소중한 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분이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만 남는 삶, 그것이 거룩이며 그것이 진짜 성화입니다.
예전에는 믿음이 좋아지면 이렇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매일 주님 없이는 못 산다며 "주님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부르짖으며 살다가, 믿음이 깊어지면 그리스도 없이도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는 것. 저는 그것이 거룩이요 성화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살아 보니 거꾸로더군요.
믿음이 깊어질수록, 주님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입술에서 더 단단한 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고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을 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워져도, "주님, 이제는 제가 단단해졌습니다. 이제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호언장담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입술에서는 오직 이 고백 하나가 터져 나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저는 주님 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저는 연약한 자입니다. 미숙아입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입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나는 단 한 순간도 주님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성화란 내가 스스로 빛나는 존재가 되어 "주님, 이만하면 저 괜찮지 않습니까?" 하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빛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 나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이것이 진짜 성화입니다.
내가 빛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보잘것없는 질그릇이 깨어지고 무너지면서,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자꾸만 드러나는 것이 성화입니다.

내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커지는 사람. 내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더욱더 선명해지는 사람.
여러분, 그 사람이 거룩하게 되어 간다는 사실을, 저는 이제 60대 끝자락에 서서야 비로소 보게 됩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나는 사라지고 그리스도만 더욱더 뚜렷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 자신은 결코 훌륭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통절히 깨달아, 오직 주님만 바라보다 보니 내 안에서 주님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람. 그 사람이 진짜 거룩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것을 거꾸로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하박국 1장 1절의 풍경에 너무 취해서 1절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습니다. 이제 2절로 함께 나아가 봅시다.
우리가 1절에서 '하박국'이라는 단정한 이름을 만났다면, 2절부터 4절까지에서는 하박국의 뜨거운 속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1절을 통해 하박국의 겉모습을 보았다면, 2절 이하에서는 하박국의 속사람, 그 깊은 내면의 모습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박국을 통해 바로 우리 자신의 속사람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1절이 아무 수식어 없이 고요한 풍경이었다면, 2절은 마치 거친 폭풍이 몰아치는 언덕과도 같습니다.
하박국 1:22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2절을 보십시오. 하박국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이토록 부르짖고 외쳐도, 하나님은 어찌하여 듣지도 아니하시고 구원하지도 않으십니까?"
이 구절은 2절부터 4절까지 흐르는 하박국의 모든 심정을 한 문장으로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내가 이렇게 부르짖는데 왜 듣지 않으시고, 왜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하박국은 통렬한 절규가 담긴 질문을 하나님 앞에 던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하박국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따지듯 질문을 퍼붓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지만, 하박국의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핵심만 요약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이미 망하고 없었습니다. 그 땅에는 오직 남유다만 외롭게 남아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 유다에 한때 '요시야'라는 참으로 훌륭한 왕이 있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거의 세종대왕급의 성군입니다. 정말 대단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무너진 유다를 다시 세우기 위해, 신앙의 회복을 붙들고 온몸으로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말씀으로 돌이키고 나라를 거룩하게 바로 세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주전 609년, 요시야 왕은 애굽의 느고 왕과 맞서 싸우다가 그만 므깃도 평원에서 전사하고 맙니다.
문제는 요시야가 죽고 난 다음이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나라는 순식간에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만에 애굽 왕 느고가 올라와 그를 폐위시키고, 애굽으로 끌고 가 처형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애굽은 남유다에 자기들 입맛에 맞는, 말 잘 듣는 꼭두각시 왕을 하나 새로 세웁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시며 자주 보셨을 이름, 바로 '여호야김'입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에 의해 왕위에 오른 이 여호야김이 다스리면서, 유다 나라는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여호야김은 백성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세금을 쥐어짜 내어, 그것을 전부 애굽에 조공으로 바쳐버렸습니다. 그러고도 남은 백성들의 고혈을 쪽쪽 빨아내어 자기는 화려한 왕궁을 짓고, 날마다 호의호식하며 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라 꼴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정치는 썩어 문드러졌고, 경제는 완전히 파탄 났으며, 무고한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힘없는 약자들을 거리낌 없이 착취하고 짓밟고 죽이는,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비참한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신앙이 완전히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시 제 눈에는 신앙의 기초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된 신앙을 찾아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기입니다. 경제적으로 얼마나 잘사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참된 복음이 교회 안에서조차 바로 선포되지 못하고, 참된 복음을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갈수록 사라져 가는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참된 복음에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욕망과 자아를 채워주는 달콤한 메시지만을 갈구하는 위험한 시대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이 시대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너져 내린 시대입니다.
당시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업신여긴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아예 우습게 여겼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박국과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루는 예레미야가 여호야김 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경고가 적힌 두루마리 말씀을 왕 앞에서 읽어줍니다.
그때 여호야김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그 참담한 광경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루마리에 적힌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자, 여호야김은 그 두루마리를 빼앗아 면도칼로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똑똑히 보는 앞에서, 찢겨진 말씀의 조각들을 화롯불 속에 던져 모조리 불태워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 속에 처넣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선지자들을 끊임없이 핍박했고, '우리야'라는 선지자는 칼로 쳐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왕이라는 자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말씀을 짓밟으니, 백성들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사회가 어떻게 변하고 말았습니까?
말씀이 힘을 잃었습니다. 법치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땅바닥에 완전히 짓밟히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비참한 시대적 상황을 통틀어, 하박국 선지자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하박국 1:44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
바로 이 상태입니다. 하박국은 지금 유다가 보여주는 이 참담한 현실, 소망이 짓밟힌 자기 조국의 꼬라지를 바라보며 속에서 천불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 이게 나라입니까?"
오늘날 우리도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보며 "이게 참된 교회입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까? 이게 나라입니까? 이게 과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회입니까? 속에 불꽃이 일어나니 하나님을 향해 그렇게 절규를 토해낸 것입니다.
하박국은 자기가 살아가던 그 암울한 시대를 단 하나의 단어로 압축하여 표현했습니다. 그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강포'입니다.
'강포'라는 이 묵직한 단어 하나에 그 시대의 모든 아픔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2절에도 나오고 3절에도 연속해서 등장합니다.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강포'는 단순히 사람들이 서로 티격태격 싸우고, 말다툼하고, 주먹다짐하며 치고받는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포란 불의가 정의를 비웃으며 이겨버리고, 턱없는 탐욕이 순전한 양심을 짓밟아 버리며, 썩은 권력이 법을 무력화시키고, 한낱 인간의 오만한 소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정면으로 짓밟아 버리는 세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상실하고 질서가 파괴된 사회, 성경은 그런 세상을 향해 '강포한 세상'이라고 선포합니다.
자, 거칠고 강포한 세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하박국은, 통회하는 가슴을 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십니까? 살아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나님 진정 살아 계신다면, 왜 저 악한 자들은 승승장구하고 선하게 살려는 자들은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왜 가해자는 저렇게 멀쩡하게 잘만 살아가는데, 억울한 피해자는 눈물 흘리며 고통 속에 울부짖어야 합니까? 하나님, 정말 이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시기는 합니까? 다 보고 계신다고 믿는데, 보고 계신다면 왜 가만히 방관만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 제 기도를 듣기는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이렇게 가슴을 치며 울부짖는데, 내 기도를 듣고는 계신 것입니까?"
지금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따지듯 돌직구의 기도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의 뜨거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하박국의 질문은 2,600년 전 이름 모를 한 선지자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우리 무의식 깊은 곳에 이 답답함과 물음표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세상을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하나님, 세상이 왜 이 꼴입니까? 왜 이 모양입니까?"
하박국이 세상을 향해 그렇게 물었다면, 오늘 우리는 내 인생을 바라보며 묻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내 삶과 내 가정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이렇게 되묻곤 합니다.
"하나님, 내 삶이 왜 이렇습니까?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고단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주님이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지 주님이 다 아시면서, 이토록 부르짖는데도 하나님, 도대체 내 기도를 듣고나 계신 것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질문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아파해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 병마와 싸우며 환자로 지내야 합니까?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이 사람 때문에 이토록 괴로워하며, 참아내고, 견뎌야 합니까?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언제까지 자식 때문에 이렇게 밤마다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 왜 그토록 기도했는데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내 기도를 듣고는 계십니까? 그저 공중에 흩어지는 무익한 소리에 불과한 것입니까?"
"나는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나를 정말 사랑하는 자녀라 부르신다면, 왜 내 모든 기도 앞에 귀를 막고 계신 것입니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발 말씀 좀 해주십시오."
돌아보면 제 마음 깊은 곳에도 항상 이런 답답함과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 앞에 똑같이 그 절규를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하박국의 이 간절한 질문에 하나님께서는 과연 어떻게 대답하셨겠습니까?
그 답변은 다음 주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방송 드라마도 "다음 주에 계속됩니다" 하고 끊어야 성도님들이 더 집중해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 깊은 메시지를 오늘 한 주만에 다 다룰 수는 없습니다. 1장에 이 질문이 나오고, 3장에 가서야 위대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에,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다음 주에 차근차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오늘은 하박국의 질문 앞에 조금 더 머물면서, 이 질문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분의 가슴에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하박국의 절규하는 모습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될 아주 소중한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품어야 할 두 가지 영적 인격이 바로 이 질문 속에 담겨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과 이 두 가지 영적 인격을 깊이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질문자여야 합니다.
믿는 사람은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물을 수 있는 질문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은 제가 볼 때 이 부분이 가장 약합니다.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질문하는 법 대신 무엇을 배웠습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무조건 "아멘". 납득이 가지 않아도 무조건 "아멘". 그저 아멘 잘하는 사람이 믿음 좋은 성도라 배웠습니다. 속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도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겠지, 그저 믿어라" 강요받아 왔습니다.
그 바람에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순간 믿음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박국서를 통하여 성경이 보여주는 진실은 다릅니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고 질문을 던지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참으로 뛰어난 영적 성품입니다.
여러분, 이해도 되지 않는데 맹목적으로 아멘 하고, 납득도 안 되는데 기계적으로 아멘 하는 것은 결코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맹신'이요 '샤머니즘'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이 왜곡된 샤머니즘을 진짜 믿음으로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로봇처럼 서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와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모르면 모른다고 고백하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격적인 하나님을 대하는 참된 성도의 태도입니다.
질문을 잃어버린 신앙은 우매함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질문하기를 멈추면, 그 신앙은 예외 없이 우매함으로 흘러갈 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문이 없으면 신앙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생각하지 못하면 진위와 본질이 분별되지 않습니다.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어떻게 됩니까? 신앙이란 주님과 나 사이의 가장 인격적인 만남이어야 하는데, 그저 누군가의 말에 끌려다니는 수동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사람 말에 휩쓸려 다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멸망의 길인지도 모른 채, 남들이 우르르 많이 가는 길로 무작정 따라가는 꼴입니다.
거룩한 질문이야말로 우리 신앙을 이 어리석음과 우매함으로부터 지켜주는 강력한 방파제입니다.

맹목적으로 "아멘"을 외치기 전에, 스스로 가슴에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메시지가 정말 성경에 근거한 말씀인가? 진정한 복음에서 나온 선포인가? 진리의 말씀이 맞는가? 우리가 믿는 사랑의 하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겠는가?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참된 뜻이 맞는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질문해야 합니다.
여러분, 질문은 결코 우리의 믿음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질문은 내 안에 쌓여 있던 잘못된 신앙의 껍데기들을 무너뜨릴 뿐입니다. 질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질문은 허황된 가짜 믿음을 다 털어내고, 우리를 마침내 진짜 믿음의 깊은 자리로 인도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솔직하고 담대하게 질문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질문하며 나아가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질문하는 인격에 이은 그리스도인의 소중한 영적 인격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의로운 분노, 즉 의분을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 시대와 사회에 만연한 강포를 바라보며 속에서 거룩한 화가 솟구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토설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 불의를 보고 도무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믿음을 오해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불의와 아픔에는 싹 관심 끊고, 그저 주일에 예배당이나 왔다 갔다 하면서 기도만 열심히 하면 그것이 좋은 믿음이라 착각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들을 그저 '교회만 잘 다니는 아이'로 키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정의로운 자녀'들로 키워내셔야 합니다.
학교에서 약한 친구가 억울하게 맞고 있으면, 비록 내 힘이 모자랄지라도 함께 서서 싸워줄 줄 아는 정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 앞에 가슴을 치며 치를 떨 줄 아는 거룩한 성품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저 세상 일엔 눈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복이나 빌면 된다는 식의 무기력한 아이들로 키워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공의이며 무엇이 불의인지 분별하고, 불의 앞에서 분노할 줄 아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우리 다음 세대를 세워가야 합니다.
여러분, 거룩이란 불의와 악에 대해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행하셨는지 기억하십니까? 불의와 외식, 위선으로 가득 찬 자들 앞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호통치셨고, 겉만 번지르르한 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이라 부르셨습니다.
마태복음 23:27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예수님은 악을 보고도 못 본 척 가만히 계시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울분을 토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판으로 만들어버린 자들, 예배마저 자기 비즈니스와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자들을 보시고는, 성전 안의 상을 뒤엎으시고 채찍을 휘두르셨습니다.
성도 간의 거룩한 교제와 믿음으로 연결된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몸이 아니라, 자기 탐욕과 이익을 챙기는 집단으로 변질된 것을 보셨을 때 주님은 그대로 좌시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이것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 하시며 판을 엎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 무감각한 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 무엇을 보고도 가슴이 끓어오르지 않는 사람, 그것은 거룩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이요 바보에 불과합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은 분노해야 할 불의 앞에서 거룩하게 분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자, 핵심은 이것입니다. 내가 화를 내느냐 안 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반드시 가슴에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때로 거룩한 화를 내야 합니다. 우리 주님도 분노하셨고, 세례 요한도 화를 내었습니다. 성도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 앞에서 의로운 분노를 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관건은 이것입니다. '내가 과연 무엇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가?'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과연 어디에 그 소중한 화를 내고 있는지 보십시오. 대개가 자기 자존심이 상해서 화를 냅니다. "나 다른 건 다 참아도 내 자존심 건드리는 건 절대로 못 참아."
여러분, 그것이 무슨 자랑거리입니까?
또 어디에 화를 냅니까? 남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내가 이것밖에 대접받을 사람이 아닌데 나를 이렇게 대해?" 하면서 분통을 터뜨립니다. 내 호주머니에 작은 손해라도 입히면 절대로 못 참겠다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렇게 자기 손해 앞에서는 서슬이 퍼렇게 화를 내고,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노발대발하고, 자기 자존심 좀 상했다고 불같이 분노하면서, 정작 이 세상에서 거짓이 진실을 비웃고 이기는 참상 앞에서는 벙어리처럼 침묵합니다.
힘 있는 자가 아무 죄 없는 약한 사람을 거리낌 없이 짓밟고 짓뭉개는 것을 보면서도, 혹시나 내 신상에 불똥이라도 튈까 봐 비겁하게 모른 척 눈을 감아버립니다.
여러분, 묻겠습니다. 그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입니까? 그저 종교 서적 들고 교회 왔다 갔다 하는 '교회 다니는 종교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정의 앞에서는 침묵하고 자기 이익 앞에서만 분노하니, 오늘 이 세상이 이 모양 이 꼴로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 거룩한 의분을 품으십시오.
그러나 그 의분을 품고 터뜨리기 전에, 그 의분의 칼끝이 세상을 향하거나 타인을 향해 겨누어지기 전에,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그 칼끝이 가장 먼저 나 자신을 향해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향한 정직한 통회를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세상과 타인을 향한 진정한 의분을 발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단 한 번도 분노하지 않으면서, 남을 향해서만 핏대를 세우고 의분을 쏟아내기 시작하면, 성경은 그것을 의분이 아니라 정죄라고 부릅니다.
의분의 칼끝이 가장 먼저 어디로 가야 합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세상의 거짓을 보며 분노하면서, 내 삶에 도사린 거짓에는 한없이 관대하지 않습니까? 기득권자들의 탐욕을 향해 저럴 수 있냐며 분통을 터뜨리면서, 내 가슴속에 도사린 작은 욕심에는 지긋이 눈을 감아버리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의 위선을 보며 저 사람 정말 이중적이라며 입에 단내가 나도록 비난을 쏟아내면서, 내 안에 숨겨진 위선과 허물에는 늘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지 않습니까?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거룩한 의분이 아니라, 그저 저열한 정죄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분명하게 가슴에, 뼈아프게 각인해 두어야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이 강단에 서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직 본 것만을 선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이나 달래주기 위해 부름받은 설교자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서 본 것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하기에,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 없이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카롭고 냉정하게 받아낼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영적으로 혼탁하고 어두운 시대입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절규를 따라가며, 참된 믿음의 사람이 반드시 품어야 할 두 가지 영적 인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정직한 질문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거룩한 질문자로 키워내십시오. 아이들이 질문을 던질 때 "됐고, 몰라도 되니 시키는 대로나 해라" 짓눌러 버리지 마십시오. 정성껏 대답해 주고, 또다시 깊이 생각하며 질문할 수 있도록 질문을 통해 아이들의 영성을 깨워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질문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들이 당신 앞에 나와 솔직하게 물어보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믿는 사람은 거룩한 의분을 품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의분의 칼끝이 가장 먼저 향해야 할 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영적 인격이 성도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꺾이지 않는 뿌리로 깊게 내리는 복된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