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4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5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6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7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8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러분, 길을 갈 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방향입니다. 그렇습니다. 방향이 맞으면 좀 늦어도 목적지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습니다. 조금 돌아가고 조금 더디 가도 결국은 그 자리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방향이 틀리면 어떻게 됩니까? 열심히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더 멀어집니다. 땀을 흘린 만큼, 애를 쓴 그만큼 정확하게 멀어집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달리느냐가 핵심이 아닙니다. 지금 내 신앙이 누구를 향해 서 있느냐, 바로 이것이 본질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런 분들을 참 많이 봅니다. 신앙생활을 누구보다 열심히 하는데, 이상하게 열심히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는 분들입니다. 예배도 빠지지 않습니다. 봉사도 늘 앞장섭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하나님과의 사이는 자꾸만 벌어집니다. 속도는 누구보다 빠른데, 방향이 어긋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요나도 보십시오. 열심 하나만큼은 어디 가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의 삶을 방향이라는 잣대로 한번 추적해 보십시오. 계속 하강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파른 내리막길입니다.
1장 3절을 보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가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욥바에서 다시 다시스로 내려갔습니다. 다시스에서 배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무서운 풍랑이 그를 바다 밑바닥까지 끌고 내려갔고, 급기야는 물고기 뱃속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내려가고, 내려가고, 또 내려갑니다. 우리가 흔히 바닥을 쳤다고 말하는 바로 그 지경입니다. 끝없는 하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나가 처음부터 물고기 뱃속으로 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 비극의 시작을 한번 보십시오. 기가 막힐 정도로 단순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야, 니느웨로 가라." 하고 명령하셨을 때, 그는 그저 반대 방향으로 딱 한 걸음만 뗐을 뿐입니다. 처음부터 대단한 반역을 작정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내 생각과 좀 다른데요." 하면서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발을 옮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한 걸음이 욥바가 되고, 다시스가 되고, 배 밑창이 되고, 마침내 캄캄한 물고기 뱃속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인 추락은 거창한 반역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딱 한 발짝 살짝 비켜서서, 그 말씀을 내 편한 대로 해석하는 바로 그 사소한 틈새에서 시작됩니다.

이런 작은 발걸음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수없이 나타납니다. 그 작은 발걸음이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이야기입니다.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 여러분 다 아시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저 사람이 나한테 한 짓을 알면 그런 말 못 하지." 말씀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다 듣고 나서, 내 미움에는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스스로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한 발짝 벗어난 것입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우리는 늘 듣습니다. 듣고도 어떻게 말합니까? "나는 틀린 말 한 적 없어. 내 말이 틀렸어?" 틀린 말을 안 했으니 판단이 아니라고 스스로 면죄부를 쥐여주고 상대를 정죄합니다. 그것이 말씀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말을 더디 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을 번히 알면서도 돌아섭니다. "이 말은 기어이 해야 내가 살 것 같아. 이 말을 쏟아내야 내 속이 시원해." 그러면서 기어이 비수 같은 말을 쏟아냅니다. 그것이 한 발짝 비껴서는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말씀 앞에서는 어떻습니까? "당한 만큼은 돌려줘야지." 보복해 놓고는 "이게 공의고 정의야"라고 포장합니다. 정의라고 착각하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거침이 없습니다. "이런 인간은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해." 말씀에 정면으로 거스르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착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빗나간 것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께서 선한 마음을 주실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 일을 섬기라고 마음을 흔드실 때가 있고, 선한 사역에 헌신하라고 성령의 감동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감동을 받고도 슬그머니 발을 뺍니다. "에이, 누군가 내 대신 하겠지." 바로 거기서 틈이 벌어집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요즘 너무 바빠서." 핑계를 대며 기도 한 자락 없이 하루를 보냅니다. 그 하루가 이틀이 되고, 이틀이 한 달이 되고, 마침내 기도가 메마른 인생이 됩니다.
이렇게 작아 보이는 불순종,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사소한 틈새에서 영적인 추락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거대한 추락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삶을 덮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추락은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부터 말씀 앞에서 야금야금 타협해 온 그 작은 불순종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 마침내 삶을 집어삼키는 큰 추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불순종은 결코 거창하지 않습니다. "내가 오늘부터 작정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겠다." 그렇게 선언하며 시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언제나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는 안일함에서 시작됩니다.
"이 정도는 뭐 어때? 남들도 다 그러는데." 이런 작은 타협에서 시작되는 것이 바로 추락입니다.
요나가 맞이한 참담한 비극도 바로 이 사소한 타협 한 조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방향을 잘못 잡은 요나의 첫걸음이 하강에 하강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어디까지 곤두박질칩니까? 캄캄한 물고기 뱃속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이 사건을 두고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거 너무 비과학적이지 않나? 애들 읽는 동화 같은 이야기잖아."
그래서 이런 본문은 어디 가서 전도할 때 꺼내지도 못합니다. 너무 비상식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살아있단 말인가? 위산에 녹지도 않고, 산소가 부족해서 숨도 못 쉴 텐데.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늘어놓으니까 기독교가 욕을 먹는 거지." 심지어 교회 다니는 교인들 중에도 이렇게 혀를 차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펼칠 때 반드시 뼛속 깊이 새겨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닙니다. 생물 도감도 아닙니다. 그런 자연법칙을 증명하려고 쓰인 책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도대체 무슨 책입니까? 성경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하나님의 책입니다. 우리는 매번 인간의 시선과 내 짧은 상식의 잣대로 성경을 재단하려 듭니다. 아닙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무슨 일을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선포하는 책입니다.
그러니 지금 성경이 요나서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물고기의 어종이 아닙니다. 요나의 의학적 생존 확률도 아닙니다.
성경의 초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누가 그 거대한 물고기를 예비하셨는가, 하나님은 왜 그 물고기를 보내실 수밖에 없었는가, 그리고 그 캄캄한 뱃속에서 요나라는 완악한 인생을 하나님이 어떻게 꺾으시고 변화시키셨는가. 오직 여기에만 맞춰져 있습니다. 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니 성경 앞에서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며 따지지 마십시오. 만약 이것이 과학 서적이었다면, 하나님은 그 원리와 메커니즘을 낱낱이 해설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인간의 호기심 따위는 가볍게 지나치십니다. 구구절절 변명하듯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 바로 그것만이 성경의 심장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요나가 보통 고집쟁이입니까? 완전히 황소고집에, 제 고집대로만 살던 사람입니다. 절대로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자기 의의 화신, 그 완악한 요나가 바로 그 물고기 뱃속에서 마침내 고꾸라집니다. 변화가 시작됩니다.
도대체 그 물고기 뱃속이 어떤 곳이기에, 이런 사람의 뼈마디까지 녹여내는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절대로 변할 인간이 아닙니다. 요나라는 인물이 그렇습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평생 잘 안 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지독한 요나가 변했습니다. 어디서 변했습니까? 바로 물고기 뱃속입니다.
도대체 물고기 뱃속이 어떤 자리입니까? 거기가 어떤 환경이었겠습니까?
제가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1번. 물고기 뱃속은 시몬스 침대처럼 푹신하고 안락해서, 누우면 잠이 스르르 오는 특급 호텔 같은 곳이었다. 2번.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고, 역한 위산과 비린내, 악취 때문에 도무지 사람이 견딜 수 없는 생지옥 같은 곳이었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여기서 1번을 고르시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입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그런 분이 안 계셔서 참 다행입니다.
성경은 물고기 뱃속의 환경을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나가 그 뱃속에서 뱉어낸 고백의 언어를 보면, 그곳이 얼마나 끔찍한 자리였는지 직감할 수 있습니다.
2장 2절을 보십시오. 요나는 자신이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다"고 고백합니다.
요나 2:22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물고기 뱃속에 갇힌 자기 처지를 '스올의 뱃속'이라 선언한 것입니다.
여러분, 스올이 어떤 자리입니까? 성경에서 스올은 흔히 지옥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본래 의미는 죽은 자들이 내려가는 곳, 바로 무덤을 뜻합니다.
그러니 지금 요나는 자신의 처절한 경험을 이렇게 쏟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산 채로 무덤 속에 생매장당했다."
살을 에는 공포입니다. 요나는 지금 극단의 공포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어떠했겠습니까? 뿜어져 나오는 위산과 소화액, 숨 막히는 악취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요나는 손가락 하나 제대로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분간조차 안 됩니다. 나갈 문도 없고, 손에 잡히는 것도 없고, 살려달라고 손 내밀 대상조차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그 어떤 발버둥도 칠 수 없는 절대 무력의 자리입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더 와닿으실 것입니다. 당장 죽어버리고 싶은데 죽어지지도 않는 곳. 차라리 숨이 끊어지는 편이 나은데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곳. 그 지독한 절망의 한복판에 요나가 던져진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처지를 세 글자로 무엇이라 부릅니까? '생지옥'입니다.
"내가 생지옥 한복판에 떨어졌다." 요나는 지금 그렇게 처절하게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본질 하나를 반드시 갈라 보셔야 합니다.
풍랑은 요나가 제멋대로 가려던 길을 하나님께서 틀어막으신 자리였습니다. 요나가 가고자 하는 그 방향을 못 가게 가로막아 세우신 것이 풍랑이었습니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은 다릅니다. 희망도, 그 어떤 출구의 빛도 보이지 않는 자리입니다.
풍랑이 일 때는 그래도 사람이 뭔가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지 않습니까? 찢어지는 돛이라도 내릴 수 있습니다. 비바람이 사납게 몰아쳐도 뱃사람들과 어깨를 맞대며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노를 한번 저어보자." 외칠 수 있습니다. 피눈물 나게 아깝고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값비싼 짐짝이지만, 그래도 목숨보다는 덜하니 바다에 내던져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물고기 뱃속은 그중 단 하나도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단 한 조각도 남지 않고 깨끗이 증발해 버린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풍랑이 인간의 능력이 턱없이 부족함을 깨닫는 자리였다면, 물고기 뱃속은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소멸된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을 때, 정말 사방이 꽉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딱 한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기도입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극한의 처지에서도, 내 힘으로는 그 무엇도 건져 올릴 수 없을 때도 성도가 붙들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기도의 자리에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늘 해오던 습관적인 종교 행위로서의 기도 말고,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 벼랑 끝에서 터져 나오는 그 처절한 기도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한다고 하면 자꾸 '응답'받을 생각부터 먼저 합니다. 그러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무릎을 꿇으면, 응답 이전에 먼저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짜 기도가 터져 나오면,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입니다.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위선과 허세의 껍데기를 다 벗겨낸 자기 자신의 진짜 민낯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주변이 밝을 때는 온갖 세상이 다 보입니다. 다른 사람도 보이고, 남의 허물과 티끌은 기가 막히게 잘 보입니다. 그러니 정작 내 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습니다. 온갖 안경을 바꿔 끼고 이 사람 저 사람 뜯어보느라, 눈앞에 보이는 게 너무 많아서 남 탓하고 정죄하기 바쁩니다.
그러나 칠흑 같은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 절대 고독을 대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의 추악한 실체를 직시하게 됩니다.
"내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단 말인가? 아니, 내가?"
그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진 내 진짜 실상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아는, 인쇄업을 하시는 집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그 집사님이 언젠가 어떤 목사님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죽을 만큼 괴롭다고 털어놓으셨습니다. 어디를 가나 목사들이 문제입니다.
화병이 나서 몸져누울 지경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고통스러웠느냐고 여쭈었더니, 인쇄소 문을 닫아버려야겠다고, 내가 이런 꼴까지 보면서 굳이 이 장사를 해야 하나 싶을 만큼 진절머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누가 봐도 본인의 실수가 명백했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일인데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는커녕 책임을 전부 집사님에게 뒤집어씌우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집사님이 잘못 알아들은 거지." 뻔뻔하게 발뺌을 하니, 집사님 입장에선 기가 막히고 피가 거꾸로 솟는 노릇이었습니다.
"아니, 평신도도 아니고 명색이 목사라는 분이 도대체 왜 저러실까? 저러니까 한국 교회가 욕을 먹는 거지." 그러면서 회의감이 밀려왔답니다. "저런 사람에게 단지 목사라는 직분 때문에 내가 굽신거리며 계속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가? 내가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옳은 줄 알고 밖에서도 계속 저럴 텐데, 저 무례함을 그대로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그래서 주변 지인들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답니다. 세상 사람도 저렇게 무례하진 않은데, 목사님이 저 지경이니 내가 바른말을 한마디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의견이 딱 반으로 갈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래도 목사님은 주의 종인데 하나님께 맡겨야지, 집사님이 직접 나서는 건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다루실 겁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회자도 똑같은 사람입니다. 본인의 무례함을 깨닫도록 지혜롭게 말씀드리는 것이 교회를 위해서도 맞습니다."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고민 끝에 골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저 목사의 무례함을 제가 끝까지 참아 넘겨야 합니까? 아니면 목사님이 제발 자기 잘못을 깨닫도록, 제가 아주 조심스럽고 친절하게 그 잘못을 짚어드려야 합니까?"
그런데 골방에서 피를 토하듯 기도하는 집사님의 심령에, 하나님의 서슬 퍼런 음성이 꽂혔습니다.
"너보다 더 무례한 놈도 있더냐."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너보다 더 무례한 놈이 어디 있더냐?"
그 벼락같은 음성 앞에서 집사님은 그 목사의 뻔뻔한 모습 속에서 바로 자기 자신의 추악한 민낯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고꾸라져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하나님, 나였군요. 저 목사의 그 무례하고 파렴치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제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기도해 보셨습니까? 우리는 당장 눈앞에 닥친 문제를 놓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깊은 기도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그 문제를 즉각 해결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진 나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게 하십니다.
기도하다가 가슴을 치며 눈물을 쏟아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히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내 꼴을 보고, 나라는 존재를 향한 '정직한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에 터져 나오는 눈물입니다.
진짜 기도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가식의 껍데기를 다 벗겨내고 우리의 진짜 민낯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얼마나 완고한 고집쟁이였는지, 얼마나 홀로 거룩한 척 온갖 의를 다 떨었는지, 하나님 앞에서 온갖 열심을 내는 척하면서 실상은 얼마나 교묘하게 도망치고 있었는지를 낱낱이 들추어내십니다.
그때 비로소 나의 본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얼마나 구제 불능으로 무너진 존재인지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복음이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분의 십자가 공로가 없으면, 그 붉은 보혈이 덮어주지 않으면 나는 그저 멸망으로 끝장날 절망 덩어리구나. 바로 이 처절한 실상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난다면 우리는 영원한 절망일 뿐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기도가 나의 비참한 민낯을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께 엎드릴 때,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끔찍한 절망을 마주한 바로 그 밑바닥에서, 다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이 보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헌신짝처럼 버렸어도, 나를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날마다 알량한 타협을 일삼으며 요나처럼 다시스로 도망치는 나를, 끝까지 뒤쫓아오시는 집요한 하나님입니다. 내치지도 않으시고 진저리치지도 않으시며, 끝 간 데 없는 은혜와 긍휼로 나를 추격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보입니다.
끝도 없는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나 혼자 팽개쳐진 그 절망의 자리에, 희미하게 빛으로 서 계신 분이 바로 내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발견할 때, 어찌 가슴을 쥐어뜯으며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입니다. 저 깊은 심해보다 더 시커먼 내 죄악이 낱낱이 드러나는 동시에, 온 우주보다 더 광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추한 나를 통째로 품어 안으시는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우는 것입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그 참담한 물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요나 2:11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숨 막히는 암흑 속에서 요나가 기도를 시작하자 두 가지가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끊임없이 도망질치던 자기 자신의 완고한 고집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역겨운 물고기 뱃속, 냄새나고 썩어가는 내장 한복판까지 기어이 쫓아오셔서 당신의 종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마침내 나를 찾아내고야 마시는 저 집요한 '은혜의 추격자' 하나님을 그 뱃속에서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9절에서 요나가 드디어 감사를 터뜨립니다.
요나 2:9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이 사람, 평생 감사를 모르던 완악한 인간입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 감사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감사를 토해내는 이 요나의 환경이 단 하나라도 달라졌습니까? 전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캄캄한 물고기 뱃속입니다. 여전히 살아서 밟을 수 있는 육지는 아득히 먼 바다 밑바닥입니다. 아직 육지로 건져 올려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썩은 내 진동하는 물고기 뱃속 한복판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영혼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진심 어린 감사를, 바로 그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있습니다.
여러분, 감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만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일이 잘 풀리고 매듭이 지어져야 비로소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감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서 나오는 보상 심리가 아닙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돌아섰다는 증거이며,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생명의 증거입니다.
감사는 내 손에 쥐고 끙끙대던 그 골칫거리가 끝장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지긋지긋한 불평이 끝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비로소 숨을 거두었다는 확실한 신호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감사입니다.
여러분, 환경이 바뀌면 입술에서 알량한 감사가 나오지만, 하나님을 만나면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가 시작됩니다.
이런 감사 한번 해보셨습니까? 입에 발린 조건부 감사, 내 뜻대로 상황을 풀어주셨으니 고맙다고 던지는 거래 식의 감사 말고 말입니다. 처지와 환경은 단 1밀리미터도 바뀌지 않았지만,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을 만난 그 감격 때문에 심령에서 터져 나오는 감사. 이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짜 감사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도의 신앙입니다.
한 팔구 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인도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그 당시 강단에서 성도님들께 인용해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혹시 그때 자리에 계셨던 분 중에 기억나는 분 계십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영화 말입니다.
아무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참 고맙습니다. 그래야 제가 마음 편히 설교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다 기억하고 계시면 제가 어떻게 설교하겠습니까. 팔구 년 전 설교를 낱낱이 꿰고 계시면 제가 어디 숨이라도 쉬고 살겠습니까?
제가 제 아내를 깊이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제 아내에게는 아주 탁월한 '망각의 은사'가 있습니다. 참 복되고 사랑스럽습니다. 제 아내는 제 설교를 매일 듣습니다. 하루 종일 틀어놓고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간혹 식사하다가 그 설교 내용 중 하나를 넌지시 물어보면 대답이 이렇습니다. "어머, 그런 설교가 다 있었어요?" 기가 막히게 사랑스럽습니다. 목사는 모름지기 그런 성도를 참 좋아합니다.
그 영화는 '파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파이는 가족들과 함께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집안 사정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닥치면서 동물원을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결국 파이 가족은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거대한 화물선에 자신들이 기르던 동물들을 싣고 캐나다를 향해 바다를 건넙니다. 그런데 그 망망대해를 건너던 중 무서운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성난 파도가 덮치면서 그 거대한 화물선이 깊은 바다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파이 가족을 비롯해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과 짐승들이 모조리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직 소년 파이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작은 구명보트 한 척이 떠 있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헤엄쳐 그 구명보트에 기어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좁아터진 보트 안에 이미 누군가 타고 있었습니다.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을 가진 거대한 벵골 호랑이 한 마리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방이 막힌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만으로도 앞이 캄캄한 절망입니다. 그런데 그 좁은 보트 안에 맹수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습니다. 이런 처지를 두고 엎친 데 덮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설상가상입니다. 설상가상이 무슨 뜻입니까. 눈 내린 위에 서리까지 하얗게 덮였다는 뜻입니다. 고난 위에 더 지독한 재앙이 얹어진 꼴입니다.
그 좁은 보트에 호랑이가 버티고 있으니, 파이는 단 1초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편히 다리 뻗고 잠을 잘 수 있습니까? 편안하게 목구멍으로 밥을 넘길 수 있습니까? 틈만 보이면 호랑이가 목덜미를 물어뜯을 판입니다.
게다가 짐승인 호랑이에게 무슨 이성적인 판단력이 있겠습니까. 자기가 지금 조난을 당했는지, 어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는지 분별할 지능이 없습니다. 맹수는 배가 고프면 제 눈앞에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가 그저 고깃덩어리 밥으로 보일 뿐입니다.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그 공포 속에서, 파이는 뼈마디가 타들어 가는 배고픔을 견디며 낚시로 물고기를 낚아 올립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지 않고 그 귀한 고기를 먼저 호랑이 주둥이에 던져 넣습니다. 호랑이 배가 불러야 맹수가 잠이 들고, 호랑이가 곯아떨어져야 비로소 자기도 한숨 눈을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지옥 같은 표류를 이어가며 파이는 수천 번, 수만 번 속으로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저 지긋지긋한 호랑이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 망망대해에 버려진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왜 하필 내 보트에 저 살인마 같은 호랑이까지 태워놓으셨단 말인가. 도대체 나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
그런데 여러분, 그 영화를 보면 소년이 무려 200일 동안 바다 위를 표류합니다. 그 지옥 같은 200일의 표류 끝자락에서, 파이는 전율이 돋는 놀라운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밤낮으로 자기를 그토록 피 말리게 했던 그 웬수 같은 호랑이가, 실상은 자신을 죽음에서 건져내 살려두고 있었다는 기막힌 사실입니다.
호랑이 때문에 단 1초도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팽팽한 긴장감이 없었더라면, 사방이 막힌 망망대해의 끔찍한 외로움과 바닥 모를 절망, 압도적인 두려움에 짓눌려 진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거나 미쳐 죽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뼛속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아, 나는 벌써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구나. 200일은커녕 단 20일도 못 버티고 바다에 빠져 죽었어야 마땅한데, 저 지독한 호랑이 때문에 내가 200일을 악착같이 버텨 살아남았구나. 나를 죽일 것 같던 저 호랑이가 사실은 나를 살려낸 생명줄이었구나."
이 기막힌 반전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라는 작은 배 안에도 호랑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무서운 호랑이 한 마리가 우리와 함께 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과 낙심이라는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도 벅찬데, 눈앞에 사나운 호랑이까지 버티고 있다고 생각하니 숨이 턱턱 막히고 사는 것이 지옥 같은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배 안에는 누구에게나 각자의 호랑이가 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표류와 호랑이를 우리 삶의 언어로 바꾸면 도대체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루아침에 길바닥으로 나앉는 실직을 당했는데, 내 등 뒤에는 당장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습니다. 일자리 잃은 것도 피눈물 나는데, 내가 손 놓으면 당장 굶어 죽을 가족들이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목사님, 지금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뼈가 빠지는데, 숨통을 조여오는 빚더미까지 얹어져 있습니다. 도대체 저더러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내 몸 하나 성치 않아서 독한 약을 한 움큼씩 삼키지 않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하는데, 곁에 있는 배우자는 더 몹쓸 중병에 걸려 누워 있습니다. 아픈 병자가 더 위중한 병자를 눈물로 간호해야 하는 기막힌 처지입니다. 목회하면서 저는 이런 성도님들을 수도 없이 만났습니다.
"목사님,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만도 진이 빠지는데, 피땀으로 키운 자식 놈이 골통을 썩입니다. 먹고사는 것만도 죽을 지경인데, 자식 놈들이 부모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속만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도 죽겠는데, 배 안에 맹수 호랑이까지 올라타 있다는 진짜 의미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하며 묻습니다.
"하나님, 숨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도 버거워 죽겠는데, 어쩌자고 이런 재앙까지 내 등에 얹어놓으셨습니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인생인데, 하나님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삶에 이런 가시밭길을 허락하셨단 말입니까?"

제가 예전에 병원 운영 때문에 뼈를 깎는 고통을 겪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 병원 밥 먹고 사는 일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의료 계통에 몸담고 계신 분들은 서로 이런 말을 자주 나눕니다. "웬만하면 병원 밥 먹지 마라." 아파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아 먹고사는 일이 의료업 아닙니까. 겉으로는 번듯하고 고상해 보여도, 병원 밥 먹는 속사정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지 의료계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제가 병원 운영으로 감당하기 힘든 벼랑 끝에 몰려 괴로워할 때, 하나님 앞에 이렇게 핏대를 세우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병원 하나 꾸려가는 것도 숨이 턱턱 막혀 죽을 지경인데, 이보다 열 배는 더 머리 아픈 교회는 도대체 왜 저에게 떠맡기셨습니까? 병원 하나만으로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데, 이 지긋지긋한 교회는 왜 맡기셔서 목회까지 하라고 등을 떠미십니까? 제 앞가림 하나 온전히 못 하는 반편이 같은 놈인데, 왜 저에게 이 무거운 짐을 둘 다 짊어지게 하십니까? 병원도 힘겨워 죽겠는데 왜 교회까지 얹어놓으시고, 이렇게 속 썩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저를 피 말리게 하십니까?"
실제로 그렇게 악을 쓰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병원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지옥 같은데 도대체 왜입니까? 왜 하필 접니까?"
그런데 여러분, 어느 날 골방에서 문득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아졌습니다.
"내가 이 교회를 섬기다가 살아났구나."
이 골치 아픈 교회 때문에 비로소 나의 알량한 밑천을 발견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마주했습니다. 이 벅찬 병원에 더 벅찬 교회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다가, 성도들과 부둥켜안고 함께 울고 함께 웃었습니다. 이 거친 세상 속에서 다른 복음이 아닌 오직 피 묻은 바른 복음을 토해내려고 피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 제단 앞에 내 자아를 맷돌처럼 갈아 엎어가며 그렇게 하루하루 버텨내다 보니, 어느 날 제가 완전히 딴사람으로 빚어져 있는 것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나를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그 끔찍한 고통들이, 이제는 상처 하나 내지 못할 만큼 내 영혼이 단단하게 살아나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어떤 성도님이 들려주신 가슴 아픈 사연이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 바람난 남편에게 어린 핏덩이 둘을 안은 채 처참하게 버림을 받은 여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에게 내쳐진 뒤 그분이 겪은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해 원망이 터져 나오더랍니다.
"목사님, 처음에는 속에서 피눈물이 솟구쳤습니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벅차 죽겠는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딸 하나 아들 하나, 이 어린것들을 혹처럼 내 등에 얹어놓으셨단 말인가. 평생 바깥일 한번, 직장생활 한번 해본 적 없는 연약한 여편네인데, 이 험한 세상에 어린것 둘을 딸려 보내면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 하나님, 어떻게 나한테 이토록 잔인한 일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까."
그런데 십몇 년 전 우리 교회에 출석하시던 그 집사님이,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제게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목사님, 지나고 보니 그때 그 어린아이들이 저를 살려낸 은인이었습니다."
내 몸 하나 추스르기도 힘겨워 "이 어린것들을 어쩌나" 하며 그저 아이들 얼굴만 쳐다봐도 억장이 무너져 눈물이 쏟아졌답니다. 너무 괴롭고 막막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때마다 그 어린 핏덩이들의 눈망울이 눈에 밟혀 차마 죽지를 못했다는 것입니다. 끝끝내 벼랑 끝에서 자신을 붙들어 살려낸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내 인생의 짐짝인 줄만 알았던 그 두 아이였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셨습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게도 우리 인생에는 이런 기막힌 역설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숨이 끊어질 것 같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 죽을 것 같은 가시로 나를 기어이 살려내십니다.
나는 이것이 내 인생을 짓누르는 저주스러운 짐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것은 짐이 아니라 힘이다. 너를 끝까지 살려내는 생명의 힘이다." 그러시면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우리 손에 꼭 쥐여 주십니다.
나는 그것이 내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으로 나의 영원한 파멸과 진짜 추락을 막아서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택함 받은 성도만이 누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풍랑을 만난 소년 파이의 배 안에 호랑이가 타고 있었다면, 풍랑을 만난 요나의 배 밑바닥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물고기였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대한 물고기였습니다.
그 시커먼 아가리가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 그 목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며 요나는 절망했을 것입니다. "아, 내 인생의 마지막이 결국 바다 괴물의 밥 한 끼로 끝장나는구나."
그런데 지나고 보니 어떠했습니까? 그 물고기는 요나의 숨통을 끊어놓을 저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요나를 살려내기 위한 하나님의 생명줄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만큼 끔찍한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바로 그 물고기 뱃속에 처박혀서야 비로소 끝없는 하강을 멈추었습니다. 바닥 모를 추락이 거기서 딱 멈추어 섰습니다. 더는 내려갈 밑바닥이 없었습니다.
죽어 자빠져 있던 영혼이 바로 거기서 깨어났습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칠 때 배 위에서 이방 선원들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제발 네 하나님께 기도 좀 해달라" 애원할 때도 입을 꾹 닫고 버티던 완악한 인간이었습니다. 기도를 잃어버렸던 그 고집쟁이가,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토해내기 시작했습니다.
파이에게 호랑이가 끔찍한 고통인 동시에 생명을 붙들어준 생존이었듯이, 요나에게 큰 물고기는 무서운 심판인 동시에 가장 확실한 구원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은 요나를 가둔 칠흑 같은 감옥인 동시에, 요나의 목숨을 건져 올린 방주였습니다. 요나는 그곳을 뼈가 썩어갈 무덤이라 여겼지만, 실상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룩한 자궁이었습니다.
옛 요나를 장사 지내고, 새로운 요나를 해산하는 은혜의 자궁으로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자리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신약으로 넘어오면 이것을 바로 '십자가'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몰려와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습니다. "어디 표적 한번 보여봐라. 저기서 기적을 베풀었다는데, 우리 눈앞에서도 한번 신통한 능력을 펼쳐봐라." 그렇게 집요하게 표적을 요구할 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 호통치셨습니까?
마태복음 12:39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성경을 읽으시면서 이 말씀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십자가는 요나의 물고기처럼 무서운 심판인 동시에 가장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요나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옛사람을 장사 지내는 무덤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이 해산되는 거룩한 자궁. 그것이 바로 요나의 큰 물고기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끊임없이 알량한 표적을 요구합니다. 기적을 많이 체험한 사람이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인 양 착각하고, 기도의 자리에 엎드릴 때마다 표적을 내놓으라고 하나님을 보챕니다.
어떤 식으로 구합니까?
"하나님, 이번 일만 시원하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정말 제대로 믿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이 소원만 딱 들어주시면, 제가 주님 앞에 목숨 걸고 충성하겠습니다." 우리는 늘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흥정을 벌입니다.
"하나님, 지금 제 몸에 몹쓸 중병이 찾아왔습니다. 이 병만 깨끗이 고쳐주시면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을 두 눈으로 믿겠습니다. 내 배 안에 올라탄 이 지긋지긋한 호랑이 좀 치워주십시오. 이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당장 나를 끄집어내 주셔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매번 이런 기복적인 표적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섭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우리를 향해 단호하게 잘라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야, 너희에게 보여줄 것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
여러분, 이 선언은 차가운 거절의 말씀이 아닙니다. 능력 없어서 안 보여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는 말씀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확실하고 완전한 표적을 너희 손에 쥐여주었다는 하나님의 단호한 선포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기적보다 비교할 수 없이 거대한 표적을, 이미 십자가 위에서 너희에게 다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요나처럼 완악한 인간, 틈만 나면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치고 또 도망치는 패역한 인생일지라도, 내 목숨을 버려 끝끝내 건져내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의 피 묻은 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성도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적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가 바로 우리의 가장 완벽한 표적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흐릿해지면, 하나님께 받은 하늘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내 손에 쥐지 못한 썩어질 세상 것들만 눈에 밟히게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선명하게 살아 있는 성도는 다릅니다. 삶의 형편이 모자라고 부족해도, 주님이 베푸신 십자가의 은혜가 온 우주보다 크게 보이기 때문에 그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오직 감사뿐입니다.
그 십자가 복음이 심령에 깊이 박혀 있다면, 감사는 쥐어짜 내는 숙제가 아니라 성도의 호흡처럼 당연한 삶의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선포한 이 놀라운 고백을 여러분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3-4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환난 중에 즐거워하라고 쓰여 있다고 해서, 지금 피눈물 흘리며 고통받는 지체에게 다가가 "성도라면 환난 중에도 웃고 즐거워해야지" 하고 훈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문제입니다. "바울 사도도 환난 중에 기뻐했으니 집사님도 기뻐하세요." 여러분,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영적인 폭행입니다.
바울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고백한 것이 어디 환난 자체가 좋아서 한 말이겠습니까? 환난은 원래 좋은 것이니 매일 환난이나 달라고 기도하고, 풍랑을 만나면 손뼉 치며 좋아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말의 본질은 고난 그 자체가 달콤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을 에는 환난의 한복판에서도 여전히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두 눈으로 보았기에, 오직 그 하나님 한 분 때문에 즐거워한다는 선포입니다.
"우리는 환난을 기뻐해야 돼. 시련이 닥치면 무조건 감사하고 좋아해야 성도야." 제발 그런 영혼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세상에 고통을 좋아할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환난을 겪을 때 고통 그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환난의 수렁 속에서도 내 곁을 단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시고, 끝까지 나를 쫓아오시는 '은혜의 추격자' 하나님이 바로 그 환난 속에 버티고 서 계심을 보았기에, 바울은 터져 나오는 찬송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요나의 언어로 바꾸면 바로 이 뜻입니다.
"나는 이 썩어가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 뼈가 묻힐 무덤이 아니라 나를 살려내신 구원의 방주요, 죄악 된 옛사람을 죽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궁이기 때문이다."
요나는 바로 그 캄캄한 뱃속에서 그렇게 목놓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정리합시다.
여러분은 정말 골고다의 십자가를 마주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저를 통해 수년 동안 십자가 복음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사석에서 마주 앉을 때도 피 묻은 복음의 이야기를 수없이 나누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묻습니다. 여러분은 진짜 사도 바울이 목숨 걸고 증언했던 그 십자가를 통과하셨습니까?
이것은 "글쎄요, 나 십자가 만난 것 같습니다"라고 기분으로 말한다고 만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직 못 만난 것 같습니다"라고 주눅 든다고 못 만난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 복음을 심령으로 진짜 겪어낸 사람에게는 삶에서 반드시 드러나는 단 하나의 명백한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십자가를 진짜 만난 사람은 내가 통과하는 고난을 전혀 다르게 해석할 줄 압니다. 그 처절한 고난의 한복판에도 여전히 살아 계신 내 아버지가 계심을 알기에, 고난의 의미를 하늘의 눈으로 다시 풀어내는 사람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방이 막힌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것도 죽겠는데, 어쩌자고 눈앞에 사나운 호랑이까지 태워놓으셨나" 한탄하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표류하다가 절망에 미쳐 죽을 나를 끝끝내 살려두시려고, 하나님이 저 무서운 호랑이까지 내 생명줄로 사용하시는구나" 담대히 선포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깊은 바다에 빠져 숨이 넘어가겠는데, 집채만 한 물고기까지 나를 집어삼키는구나"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성난 파도에 영원히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저 거대한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나를 덮어 건져내셨구나" 무릎 꿇고 찬송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별천지에 사는 별종들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거친 파도를 맞닥뜨릴지라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하며 당당하게 살아내는 '십자가의 안경'을 쓴 사람들입니다.
복음을 가졌다고 고난이 피해 갑니까? 아닙니다. 복음을 쥔 사람도 똑같은 풍랑을 만나고, 똑같은 질병을 만나고, 똑같은 배신과 뼈아픈 눈물의 골짜기를 다 지나갑니다.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십자가의 렌즈를 낀 자들은 세상 사람들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능력, 곧 그 시련과 아픔과 고통을 하나님의 섭리로 통역해 내는 영적 권세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는 그 어떤 환난 앞에서도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늘 마주한 그 지긋지긋한 문제, 뼈를 깎는 고난과 시련 때문에 여러분의 인생은 절대로 침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트 안의 호랑이에게 결코 물어뜯겨 죽지 않습니다. 큰 물고기의 밥으로 썩어 없어질 비참한 인생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내가 받아야 할 영원한 저주와 심판은 이미 끝장났습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께서 당신의 피로 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남은 생애는 덤으로 사는 인생이요, 말할 수 없는 은혜의 보너스로 누리는 삶입니다. 모든 죄책은 말끔히 씻겨졌고, 우리는 흠 없는 하나님의 의인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하겠다"는 전능자의 절대적인 보증까지 손에 쥔 자들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 이 거대한 지구는 흙먼지 날리는 무덤과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썩은 내 진동하는 물고기 뱃속 같은 세상에 갇혀 있고, 사방이 막힌 어둠 속에 내던져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심장 속에는 사망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고동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서 썩어 멸망할 자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거룩한 새 인류로 날마다 빚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십자가라는 가장 완전한 표적을 가슴에 품은 자답게 사십시오. 이 험한 땅에서 온갖 환난과 시련을 만날 때, 핏대 세워 원망하지 말고 믿음의 눈을 들어 이렇게 선포하십시오.
"이 고난이 나를 파멸시키는 저주가 아니다. 이 환난을 통하여 내 안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어 나가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구나. 저 징글징글한 고난의 물고기 뱃속이 바로 나를 새롭게 해산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궁이로구나."
시련의 파도 속에서도 무덤이 아닌 생명의 자궁을 바라보는 거룩한 믿음의 눈이,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 모든 성도들의 심령 가운데 활짝 열리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존귀하신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