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3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4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5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하박국에 이어, 이번 주부터 4주 동안 요나서 속으로 영적 여행을 떠납니다.
요나서는 참으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가득 찬 책입니다.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면서 요나서를 삼행시 안에 한번 담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운을 띄워 주시면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요. 요나가.
나. 나다.
서. 서 있는 자리만 다를 뿐이다.
아멘. 하나 더 가겠습니다. 운을 띄워 주십시오.
요. 요리조리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도.
나. 나 잡아봐라 하면서 배 타고 땅끝까지 도망쳐도.
서. 서늘한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 생고생만 할 뿐이다.
아멘이십니까? 요나서를 이렇게 삼행시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목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저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사가 분명합니다. 저기 영란 집사님은 벌써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으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천재가 맞습니다.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단 한 장면 때문에 요나는 모든 성도에게 '불순종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아이들에게조차 비웃음을 사는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요나가 그런 허접한 인물이었습니까?
사실 당시 요나는 북이스라엘 선지자 중에서도 가장 잘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백성들에게 가장 큰 존경과 사랑을 받던 최고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는지, 거기에는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뼈아픈 역사적 배경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나는 주전 8세기경,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그 시대에는 요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모스와 호세아도 바로 그 땅에서 함께 사역했습니다.
그런데 참 묘하지 않습니까? 같은 시대, 같은 민족을 향해 외쳤는데 이 세 사람이 쏟아낸 메시지의 결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경제적으로 번영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영토는 날마다 사방으로 넓어졌습니다. 국력으로 따지자면 가히 전성기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이란 존재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배가 부르고 기름진 풍요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이 인간의 본성 아닙니까. 화려한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곪아 터져 가는 북이스라엘의 심각한 부패와 타락이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그 썩어 가는 시대를 향해 선지자 아모스는 거침없는 돌직구를 날렸습니다.
"이 바산의 암소들아."
백성들을 향해 날 선 비수를 꽂아 넣은 것입니다.
아모스 4:11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여기서 ‘바산의 암소’가 누구를 가리킵니까. 사마리아의 부유한 귀족 여인들을 뜻합니다.
남편의 권력과 재력을 등에 업은 채 가난한 이웃들을 짓밟았습니다. 오직 자신의 말초적인 쾌락만을 좇던 사치와 방탕의 주역들입니다. 남편이 긁어모아 준 돈과 권세로 날마다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습니다. 그 시절에 이미 침대를 번쩍이는 상아로 둘렀습니다. 최고급 올리브유를 온몸에 바르며 피부 가꾸기에만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단순히 그 사치 하나 때문에 불같은 호통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누린 그 기름진 쾌락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힘없는 백성들의 뼛골을 깎고 피고름을 짜내어 채운 배였습니다. 그러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반드시 망한다, 처절하게 심판받을 것이라고 거칠게 쏟아낸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메시지 역시 칼날처럼 시퍼렇게 날 서 있었습니다.
호세아는 우상숭배에 찌든 북이스라엘 백성을 정면으로 겨냥했습니다. 영적 음란에 빠져 허우적대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피 끓는 심판과 통곡의 경고를 쏟아냈습니다.
아모스가 땅바닥에 처참히 짓밟힌 정의를 폭로하며 포효했다면, 호세아는 하나님을 향해 차갑게 식어 버린 백성들의 심장에 칼을 꽂았습니다. 너희가 지금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다, 날마다 음란한 짓을 일삼는 패역한 세대라고 호통을 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의 선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너희가 지금 돈 좀 쥐었다고,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잘산다고 기세등등하게 까불어대는데, 너희 몸뚱이에서는 지금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한다. 너희는 안에서부터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이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 줄 아느냐. 남은 것은 필패요, 멸망이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뿐이다."
자신들의 모든 언어 속에 핏빛 심판을 꾹꾹 눌러 담아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 두 선지자와 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장밋빛 소망의 메시지만을 쏟아냈습니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잘살게 될 것이다, 경제 대국으로 우뚝 설 것이다, 영토는 날이 갈수록 넓어져 천하를 호령하는 강대국이 될 것이다. 요나는 철저히 백성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는 '굿뉴스 전문 선지자'였습니다.
실제로 열왕기하 14장에 기록된 요나의 사역을 보십시오. 단 한 줄의 예외도 없습니다. 전부 이스라엘의 국경이 넓어지고 나라의 국운이 활짝 열릴 것이라는 대박 예언뿐입니다.
열왕기하 14:2525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러분, 얼핏 들으면 이 세 선지자의 예언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누구는 망한다고 고함을 치고, 누구는 대박 난다고 축복을 선포하니 말입니다. 그러나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이것이 모순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가 어릴 적부터 세상을 흑백논리와 단순한 O, X 잣대로만 재단하는 데 익숙해진 탓입니다.
현실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습니까. 놀랍게도 북이스라엘은 요나의 예언 그대로 되었습니다. 영토는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경제적 풍요는 손에 넘쳐흘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아모스와 호세아의 피 끓는 경고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습니다. 그들의 영혼은 걷잡을 수 없이 썩어 문드러져 가고 있었습니다.
외형적 경제는 눈부시게 성장했으나 나라의 공의와 정의는 처참히 짓밟혔습니다. 웅장한 성전 제사는 날마다 이어졌으나 하나님이 받으실 참된 예배는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진심은 껍데기조차 남지 않은 채, 오직 위선적인 종교적 껍질만 굴러다니는 가장 절망적인 영적 파산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전혀 엉뚱한 메시지를 던지라고 명령하십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도대체 무엇을 외치라는 말입니까. 너희는 이제 끝났다,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임박했다, 모조리 멸망할 것이다, 바로 이 저주의 소리를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저는 요나가 하나님께 이 명령을 처음 받아 들었을 때, 얼굴에 어떤 표정이 스쳤을지 그려집니다.
"이게 뭐야, 이게? 도대체 뭐야, 이게?"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생뚱맞고 기가 찰 노릇이었습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습니다.
요나가 지금까지 평생 무엇을 하던 사람입니까. 오직 내 조국, 내 민족 품 안에서만 예언하던 선지자 아닙니까. 북이스라엘 안방에서, 내 나라 백성들에게만 입을 열었습니다. 그것도 오직 피가 끓어오르는 대박 축복과 장밋빛 희망의 메시지만 선포했습니다.
우리나라 국운이 활짝 열릴 것이라며 만세만 부르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난데없이 원수의 심장부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것도 살기등등한 적국의 거대한 수도 한복판에 홀로 들어가 멸망을 선포하라 하시니, 요나의 입장에서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힐 노릇이었겠습니까.
저에게도 어릴 적 또렷한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그 시절은 누구나 다 가난하게 살던 때 아닙니까. 저희 어머니가 멀건 죽을 쑤거나 감자를 찔 때가 있었습니다. 경상도에서는 부침개를 '지짐'이라고 부릅니다. 어머니가 "옆집에 가서 이 지짐 좀 갖다주고 오너라" 말씀하시면, 저는 신바람이 났습니다. 따끈한 지짐 한 접시, 삶은 감자 몇 알을 받쳐 들고 콧노래를 부르며 옆집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에는 어머니가 저에게 전혀 다른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얘야, 옆집 가서 쌀 한 되만 빌려 온나. 연탄 한 장만 빌려 온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불과 여섯 살, 일곱 살 먹은 어린 나이였는데도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거웠습니다. 너무 가기가 싫어서 "나 안 가, 나 절대로 안 가" 떼를 쓰며 버텼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같은 이웃집 문지방을 넘는 일입니다. 똑같은 심부름입니다.
그런데 내 손에 쥐여 주어 나누는 심부름은 발걸음이 날아갈 듯 신이 났지만, 구걸하듯 빌려와야 하는 심부름은 어린 가슴에도 한없이 부끄럽고 괴로웠습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습니다.
심부름 자체가 고되어서가 아닙니다. 내 손에 무엇을 들고, 누구를 향해 가느냐에 따라 그 걸음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지는 법입니다.
저는 불순종하던 요나를 묵상하다가, 문득 그 시절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 요나의 심정이 바로 그때의 제 심정과 똑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동안 요나는 자기 민족에게 오직 '굿뉴스'만 전하던 사람입니다. 우리 영토가 끝없이 넓어질 것이다, 경제적 대부흥이 찾아올 것이다, 이런 신바람 나는 소리만 쏟아낼 때 요나 자신도 얼마나 어깨가 으쓱하고 행복했겠습니까.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강단에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위로와 축복의 말씀을 선포할 때는 한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심령에 똬리를 튼 죄악을 사정없이 쳐내야 할 때는 말할 수 없이 괴롭습니다. 제 안에서도 날마다 피를 말리는 영적 갈등이 일어납니다. 복된 소식을 전하면 회중에게도 좋은 소리만 듣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백성들에게 날마다 나라가 잘된다는 축복만 외쳤으니, 입을 열 때마다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온 백성에게 존경받는 참된 애국 선지자, 민족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 주는 영웅으로 대접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께서 날벼락 같은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 백성도 아닙니다. 이웃 원수 나라의 심장부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들어가서 무엇을 외치라 하십니까.
"너희들 이제 다 죽었다."
바로 이 살벌한 저주를 쏟아놓으라는 것입니다. 너희 앗수르가 지금 힘 좀 쓴다고, 땅덩어리 크다고 기세등등하게 까불어대는데, 하나님께서 너희를 통째로 쓸어버리겠다고 선언하셨다. 이 말을 적진 한복판에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의 머릿속에 지진이 날 만하지 않습니까. 하얗게 질려 버린 것입니다.
니느웨가 어떤 곳입니까.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당시 앗수르 사람들은 자기 나라에 거슬리는 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을 어떻게 다뤘습니까. 사람의 가죽을 산 채로 벗겨서 처형했습니다. 생살을 찢고 껍질을 벗겨 죽이는 끔찍한 살인귀들이었습니다.
제가 본문을 묵상하다 보니, 요나가 왜 뒷걸음질 쳤는지 인간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솔직히 말해서 쫄았던 것입니다. 간담이 서늘하고 무서워 죽을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속으로 얼마나 온갖 원망이 다 올라왔겠습니까.
'아니, 하나님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흉흉한 소식을 전하라 하시는가. 이런 심판 예언이라면 사방에 전문 선지자들이 널려 있지 않은가. 저기 호세아나 아모스 같은 사람들한테 시키면 제격일 텐데. 그 사람들은 눈만 뜨면 망한다, 썩었다, 독설을 퍼붓는 게 전공인데. 나는 평생 그런 거친 소리를 입에 담아 본 적도 없는데.'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며 머리가 터질 것 같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의 심정이 진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나한테 이러시는가.
사실 요나는 지금까지 선지자 세계에서 소위 최고의 '꿀보직'만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만사형통과 나라의 번영을 외치는 일이야 어느 누가 못 하겠습니까.
그런 요나를 향해 "너 당장 저 니느웨로 가서 심판을 외치라" 명하신 것은, 평생을 편안한 꽃길만 걷던 사람에게 사지로 기어들어가라는 잔인한 요구나 다름없었습니다. 뼈골까지 뒤흔드는 청천벽력이 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가 막히고 황당무계한 사명을 던져 주신 것입니다.
요나는 그 말씀을 끌어안고 밤낮으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여러분, 도무지 답이 안 나오고 사방이 꽉 막혔을 때, 인간이 쓸 수 있는 최후의 필살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최고의 작전이 무엇입니까.
흔히 '하이방'이라고 부릅니다. 속된 말로 하이방 놓는 것입니다. 제 고향 경상도 말로는 "단단히 토꼈다" 그럽니다. 바로 줄행랑을 치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요나만의 얕은수가 아닙니다. 손자병법에서도 서른여섯 가지 계책 중에 으뜸으로 꼽은 최고의 작전, 줄행랑 아닙니까.
생각을 쥐어짜고 아무리 굴려 봐도 도저히 각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내 도망질을 칩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그 끔찍한 니느웨만큼은 제 발로 기어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목회자들이 목사 안수를 받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르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혹시 어떤 찬송인지 아십니까.
어느 교단이든 목사 안수식에 가 보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받은 뒤 일제히 목 놓아 부르는 찬송이 바로 이것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그런데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강단 위가 온통 눈물바다가 됩니다. 다들 웁니다.
도대체 왜 울겠습니까.
정말 죽기보다 가기 싫은 험지인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끌려가야 하니 서러워서 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너무도 벅차고 영광스러워서 우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두 마음이 뒤엉켜서 흘리는 눈물입니까. 어쨌든 안수를 받는 목사들은 예외 없이 웁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저는 그날 울었겠습니까.
저 역시 제 머리 위에 손이 얹히고 목사 안수를 받던 그 떨리던 날, 이 찬송을 목청껏 불렀습니다. 제가 울었을 것 같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웃었습니다. 헛웃음이 비어져 나왔습니다.
왜인 줄 아십니까. 이미 내가 지나온 내 삶 전체가 뼈를 깎는 아골 골짜기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더 내동댕이쳐질 아골 골짜기가 도대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기가 막혀 웃음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요즘은 이 찬송가의 가사가 은근슬쩍 바뀌었다고 합니다. 들어 보셨습니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가 아닙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골라 골라 가오리다."
잘 모르시는군요. 요즘은 다들 요리조리 제 입맛에 맞게 골라서 간답니다.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순종하기 편한 말씀, 내 구미에 당기는 자리만 쏙쏙 골라 가며 순종할 뿐입니다.
내 기분에 맞고 내가 좋아하는 명령에는 기가 막히게 순종을 잘합니다.
그러나 내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건드리는 말씀 앞에서는 싸늘하게 등을 돌립니다. 정작 그런 순종은 죽어도 못 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까.
"네 자녀를 위하여 울며 기도하라."
이 말씀에는 우리 모두 두 손 들고 아멘으로 순종합니다. 내 피붙이 자식을 위해 눈물로 무릎 꿇지 않는 부모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정말 꼴도 보기 싫은 사람, 사사건건 내 속을 뒤집어 놓는 원수 같은 자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하라는 말씀에는 어떻습니까. 순종하십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닫아걸지 않습니까. 입술에 강력 본드라도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처럼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내 자식을 위해서는 콧물 눈물 쏟아 가며 통곡하면서도,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는 주님의 서슬 퍼런 명령 앞에서는 차갑게 입을 씻어 버립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밑바닥입니다.
누가 봐도 딱하고 가련한 이웃을 도와주라, 작은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듯 불쌍히 여기라는 말씀에는 우리 다 고개를 끄덕이며 지갑을 엽니다.
그런데 사사건건 시비 걸고 까칠하기 짝이 없는 이웃을 찾아가서 똑같이 품어 주라는 말씀에는 어떻습니까. 목숨을 내놓는 순교보다 더 버거워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이 바로 우리 모습 아닙니까. 정곡을 콱 찌르니 가슴이 찔리고 아프십니까.
예배 시간에 목청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 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속을 썩이는 바로 그 사람을 찾아가 섬김으로, 그 사람의 입에서마저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터져 나오게 만들라는 말씀 앞에서는 철저히 무너집니다. 도무지 순종하지 못합니다.
이런 거북한 말씀 앞에서 우리는 '들을 귀 있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귀를 꽉 틀어막은 '귀머거리'로 돌변해 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순종이 아니라, 사람들이 박수 쳐 줄 만한 순종에만 목을 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지고 칭찬이 따르는 순종은 누구나 번지르르하게 해냅니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빛도 이름도 없는 순종은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화려한 가운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성가대 봉사는 서로 서려고 줄을 섭니다. 하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화장실 청소나, 기름때 묻은 주방 설거지 자리에는 발길을 뚝 끊습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으니까. 아무도 봐주지 않으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순종의 민낯입니다. 오직 내 입맛대로 골라 잡는 얄팍한 순종 말입니다.
여러분, 순종에 대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6:3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저번 주일 예배 후에 우리 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밥을 먹은 테이블에는 방글라데시에서 온 선교사님 가족들이 앉았고, 외부에서 오신 한 집사님이 함께 앉았습니다. 저는 식사하면서, 차를 마시면서 그 방글라데시 선교사님 부부에게 선교 헌금이 담긴 봉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통 때 저는 제 방에 들어가서 드립니다. 여러 사람 있는 데서 이렇게 드리지 않습니다. 선교사님이 가시기 전에 제 방으로 올라와서 마지막 인사와 대화를 나누고 가시는데, 보통은 그때 선교 헌금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냥 식사하고 차 한잔하면서 그 자리에서 선교 봉투를 불쑥 드렸습니다.
드리는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음성이 들립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표 나지 않게 하라."
그날 제 방으로 다시 올라갈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핑계입니다. 저는 그냥 그 자리에서 드려 버렸습니다.
왜 저는 하나님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음성을 주셨는데도, 그 선교사님에게 사람들 앞에서 차를 마시며 보란 듯이 선교 헌금을 드렸을까요.
내가 이 선교 헌금을 주는 것을 누가 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무의식 속에서 말입니다.
우리 교인들이라면 또 모릅니다. 특히 다른 교회에서 오신 그 집사님이 바로 제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외부에서 오신 그분이 이것을 꼭 봤으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좋은 목사이고, 우리 교회가 얼마나 가난한 선교사님들을 잘 섬기는 교회인지 이분이 똑똑히 보고,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라는 생각을 품었으면 좋겠다. 그 얄팍한 계산이 내 무의식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요나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는 요나입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잡는 '선택적 순종'을 하고 싶어 하고, 순종을 할지라도 기어이 돋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요나입니다.
흘려보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방식은 거부했습니다. 나를 돋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해 버린 것입니다.
귀한 일입니다. 천하 없이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나를 돋보이게 하는 위선의 방식으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순종을 하면서도 그 옆에 슬쩍 '강봉규'라는 석 자 이름을 붙여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렇다니까요.
저는 그날 좋은 일을 해 놓고도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귀한 선교사님을 도와드리는 것,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주님 앞에 엎드려 잘못했다고 빌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것으로 다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제 심령 깊은 곳을 두드리시며 모든 것을 털어놓으라 명하십니다. 성도들 앞에서 이 부끄러운 민낯을 정직하게 고백할 마음을 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 이 목사의 추악한 밑바닥을 까발리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코 저에게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안에 도사린 이 불순한 동기를 토해내게 하셔서, 제 찌그러진 순종을 흠 없는 깨끗한 순종으로 빚어 받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드러내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서 저를 발가벗겨 부끄럽게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를 한층 더 순결한 주의 종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이 목사의 더러운 속내를 먼저 제단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오늘 이 말씀을 마주하는 여러분 심령 속에 웅크린 또 다른 요나를 정면으로 직면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양 떼들 앞에서 목사인 네가 먼저 쪼개어지는 번제물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창피를 주고 민망하게 하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저를 더 거룩하고 정결하게 다듬으실 뿐 아니라, 목회자의 상한 심령을 제물 삼아 여러분 안에 숨은 죄악의 쓴 뿌리까지 모조리 끄집어내어 살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 안에 감춰둔 은밀한 부끄러움을 만천하에 드러내게 하십니다.
여러분에게도 감추지 말고 자복하라며 심장을 치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것만은 제 입으로 차마 털어놓지 못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손가락질당해 고개도 못 듭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뒤로 숨기 바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라 하실 때는, 결코 망신을 주어 내쫓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두껍게 덮어쓴 위선의 가면을 모조리 벗겨내고, 참된 해방과 거룩한 자유를 선물하시려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수치가 아닙니다. 진짜 순결한 주님의 신부로 회복시키시려는 손길입니다.
여러분 안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온갖 종교적 장식과 껍데기를 다 뜯어내고, 거짓된 장식이 아니라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온전히 접붙임 받아 영원히 썩지 않을 진짜 열매를 맺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쏟아놓고 회개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는 남모르게 꼭꼭 숨겨둔 감추어진 부끄러움이 있지 않습니까.
꽁꽁 싸매어 감추어둔 부끄러움은 언제나 우리 내면을 칠흑 같은 어둠으로 몰아넣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은 고백된 부끄러움은 다릅니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의 거룩한 도구가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지체들 앞에서 내 밑바닥을 부끄러워할 줄 아는 거룩한 용기를 품기를 원합니다. 그 정직한 부끄러움을 딛고 일어서는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요나를 향해 니느웨로 가라 명하셨는데, 요나는 발길을 어디로 돌립니까. 다시스로 향합니다.
여러분, 내가 갈 곳을 내가 정하면 그것은 '관광'입니다. 그러나 내가 갈 곳을 하나님이 정해 주시면 그것은 '출장'입니다.
관광은 목적지를 내 마음대로 고릅니다.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누구와 동행할지 철저히 내가 선택합니다.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정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 취소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주권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출장은 다릅니다. 보내는 분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보내는 주인의 뜻과 계획에 따라 토 달지 않고 움직여야 하는 것이 출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손에 저 흉흉한 니느웨로 향하는 출장 명령서를 쥐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하나님의 엄중한 출장 명령서를 팽개쳐 두고, 제멋대로 다시스행 뱃삯을 치르며 유람선 관광길에 오르려 한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얕은수를 부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순종은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디서 순종할지 그 장소는 제가 고르겠습니다."
"하나님, 봉사는 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폼 나고 편한 일만 제가 골라서 하겠습니다."
솔직히 우리 다 그러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라 하시니 사랑의 시늉은 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할지 그 대상은 제 입맛대로 선택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 하시니 용서는 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저 인간만큼은 절대로 안 됩니다. 저 꼴 보기 싫은 인간만은 제발 열외로 빼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내빼는 자들의 걸음입니다. 바로 그 자리가 다시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니느웨로 묵묵히 출장을 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편안함만 좇아 다시스로 유람선 관광을 떠나고 있습니까.

여기서 저와 여러분의 가슴을 향해 질문 하나를 더 던져 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가라 명하시는 니느웨는 어떤 곳입니까. 단순히 지도 위에 찍힌 고대 앗수르의 수도 한복판일 뿐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던져진 영적 니느웨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30년 전, 청년이었던 저에게 니느웨는 바로 '전라도' 땅이었습니다.
저는 뼛속까지 부산 사람 아닙니까. 그런 경상도 촌놈이 낯선 전라도 땅으로 사역지를 옮겨 간다고 하니, 주변에 있던 부산 사람들이 백이면 백 다 뜯어말렸습니다.
"부산 사람이 전라도 땅에 가서 어떻게 배겨나느냐. 가면 십중팔구 못 산다. 절대로 가지 마라."
30년 전 제게는 그 서먹하고 두려운 전라도 땅이 가기 싫은 니느웨였습니다.
만약 그때 제가 하나님이 지목하신 전라도라는 니느웨를 걷어차고, 내 눈에 익숙하고 편안한 다시스를 골라 도망쳤다면 제 인생은 과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거기 가면 텃세 때문에 못 산다는데, 경상도 사람이 가면 뼈도 못 추린다는데, 온갖 핑계를 대며 하나님이 정해 주신 니느웨를 버리고 내가 머물고 싶은 다시스로 줄행랑을 쳤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떻게 흘러갔겠습니까.
니느웨가 도대체 어디입니까.
니느웨는 단순히 지도 위에 찍힌 지명이나 물리적인 장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며 깨달은 니느웨는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이 곧 땅이고, 사람이 곧 흙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빚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 할 영적 니느웨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내 곁에 붙여 주신 사람입니다. 사람이 바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서야 할 니느웨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가장 거룩하고 중요한 출장지입니다.
우리는 사명지라고 하면 흔히 머나먼 아프리카나 인도의 척박한 오지만 떠올립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내게 붙여 주신 바로 그 한 사람, 그 사람이 내가 감당해야 할 진짜 니느웨입니다.
그 사람이라는 출장지로 나아갈 때, 나를 통하여 누군가가 꼬꾸라져 회개하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설령 그 출장지에서 그 사람이 끝내 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사람을 깎는 정으로 삼아 마침내 내가 깨어지고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순종하여 출장을 떠나면 그가 변하든 내가 변하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일하십니다. 그러나 내 편안함만 좇아 다시스로 관광을 떠나 버리면, 내 인생에는 아무런 하나님의 역사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이라는 니느웨로 가라는 출장 명령서를 손에 쥐고도, 슬그머니 다시스행 배표를 끊어 도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치려 하자, 하나님께서 무엇을 내던지십니까. 바다 위에 '큰 바람'과 '큰 폭풍'을 쏟아부으십니다.
요나서에 등장하는 아주 상징적이고 중요한 단어가 바로 이 '큰'이라는 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무시무시한 폭풍을 바다 위에 던지셨겠습니까. 요나를 쓸어버리려는 하나님의 잔인한 심판입니까.
성경을 영적으로 꿰뚫어 보는 눈이 없으면 늘 헛소리를 지껄입니다. 어디서 지진이 터지면 저주받아 심판당했다, 홍수가 덮치면 죄지어서 멸망했다, 온갖 정죄를 늘어놓고 다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풍랑을 보내신 목적은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그 거친 풍랑을 일으키셨습니까. 요나를 물속에 처넣어 죽이려고 그러셨습니까. 성경의 문맥을 보십시오.
잠에서 깨어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영적 혼미함에서 번쩍 눈을 뜨라고 풍랑을 보내신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니 요나는 배 밑창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누워 세상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 선장이 내려와 요나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깨우며 이렇게 호통을 칩니다.
요나 1:66선장이 그에게 가서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하니라
여러분, 이 기막힌 선포를 보십시오. 교회의 거룩한 목사가 외친 설교가 아닙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이방인 선장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입니다.
세상 선장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향해 영적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참 기가 막히고 역설적인 장면 아닙니까.
"잠자는 자여,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당장 일어나 네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하라."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발 정신 차리고 기도 좀 하라는 것입니다. 잠꼬대하지 말고 무릎 꿇고 기도 좀 해라.
어쩌면 오늘날 가장 기도를 안 하는 사람이 저 같은 목사들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교회를 향해 제발 기도 좀 하라고 멱살을 잡는 꼴입니다.
이 장면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선장이 참된 선지자 같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요나는 생각 없는 뱃놈처럼 굴러떨어졌습니다. 완벽하게 주객이 전도되어 버린 부끄러운 영적 파산의 현장입니다.
저는 불신자들에게 온갖 수모와 손가락질을 당하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숱하게 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시를 당하는지 모릅니다. 제발 기도 좀 하라는 소리, 너나 성경 말씀대로 똑바로 살라는 비아냥을 예수 없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날마다 듣고 삽니다. 이런 기막힌 소리를 듣고 사는 자들이 오늘 교회 안에 천지로 널려 있습니다.
진짜 영적 민감성이 무엇입니까. 부끄러운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에게 온갖 멸시를 당하고, 예수 안 믿는 자들에게 너나 잘 믿으라는 핀잔을 들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불신자 가족들에게 "너 같은 인간이 다니는 교회라면 나는 죽어도 안 간다"는 소리를 날마다 들으면서도, 도무지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얼굴에 철판을 깔았습니다.
여러분, "자는 자여, 어찌함이냐."
이 호통은 겉으로 보면 이방인 선장이 요나에게 내지른 소리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 그 선장의 입술을 빌려, 시대를 뚫고 오늘 저와 여러분의 가슴을 향해 내리치시는 서슬 퍼런 음성입니다.
"잠자는 자여, 네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너는 목사라 하고 말씀 전한다 하면서 왜 쿨쿨 자고 있느냐. 너는 직분자라 하고 수십 년 교회 다녔다 하면서 왜 영적 깊은 잠에 빠져 있느냐. 남들 깨운다고 설레발치기 전에, 너부터 제발 번쩍 깨어나면 안 되겠느냐."
여러분, 여러분이 보실 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깊이 잠든 사람 같습니까.
우리는 흔히 이렇게 재단합니다. 주일 성수 빼먹는 사람, 십일조 떼먹는 사람, 교회에서 궂은 봉사 하나 안 하는 사람. 교회 마당만 밟으며 은혜의 단물만 쏙쏙 빼먹고, 평생 전도 한 번 안 해 본 사람. 이런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며 영적으로 깊이 잠들었다고 단정 짓습니다.
물론 방금 열거한 신앙의 기본 요소들은 교회 생활에서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일들입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천사도 흠모할 만한 거룩하고 귀한 직무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토록 귀하고 거룩한 사역들을 하면서도 영적으로는 까무러쳐 잠든 채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목사와 선교사와 장로들도 얼마든지 영적으로 곯아떨어진 채 목사 노릇 하고, 선교사 흉내 내고, 장로 감투 쓰고 행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깊이 잠든 채 기계처럼 목회하는 목사들을 너무나 많이 봅니다.
그리고 요나가 바로 그 산증인 아닙니까.
선지자라는 자가 배 밑창에서 쿨쿨 잠들어 있습니다. 그것도 당대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백성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최고의 스타 선지자가 영적 송장이 되어 잠들어 있습니다.
이제 이 요나의 모습을 거울삼아, 영적 잠의 치명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낱낱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영적 잠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하나님의 '낯'을 피했다고 기록합니다. 자꾸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으려 합니다.
제가 성도들과 상담을 하다 보면, 본인이 진짜 듣고 싶어 하는 말보다 듣기 거북한 말을 해 줄 때가 훨씬 많습니다.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는 하지만, 제 입에서 나가는 대답은 상대가 기대하는 달콤한 말이 아니라 듣기 싫을 수밖에 없는 뼈아픈 말일 때가 대부분입니다.
얼마 전에도 우리 교회의 한 집사님이 저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어떤 물건을 하나 사려고 하는데 아내와 의견이 팽팽하게 갈린다, 목사님 보시기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물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부부가 의견이 부딪힐 때는, 아내 말을 듣는 것이 정답에 가까울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내 집사님이 저에게 먼저 찾아와 물었다면 저는 뭐라고 했겠습니까.
"부부가 부딪힐 때는, 남편 말을 따라주는 것이 정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저는 상담하러 오는 분들에게 언제나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물론 제 말이 백 프로 다 맞을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손해만 봐서도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갈림길에 서 있다면 기꺼이 내가 손해 보는 쪽을 택하는 것이 믿음의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담을 마치고 나면, 성도들의 반응이 정확히 두 갈래로 갈립니다.
비록 듣기에는 거북하고 속이 쓰려도, "목사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 보니 말씀대로 내려놓는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하고 순종한 사람들은 저와의 관계가 한층 더 깊어지고 가까워집니다.
반면에 제 조언을 귓등으로 흘리고 제 고집대로 선택한 사람들을 보면, 왠지 모르게 저와의 사이가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제가 그분들을 향해 먼저 거리 두기를 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저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제 마음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목사 말대로 다 살아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본인이 기도하고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선을 긋거나 거리를 둔 적이 눈곱만큼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만 거리가 멀어지는 서먹한 느낌이 들겠습니까.
도대체 왜 그렇겠습니까. 그분이 하루아침에 목사 얼굴이 보기 싫어져서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제 얼굴 자체가 보기 싫은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권면을 알면서도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는 그 내면의 찔림과 불편함이 무의식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북함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슬금슬금 목사의 낯을 피해 뒷걸음질 치게 되는 것입니다.
요나가 왜 뱃밑바닥으로 내려갔는지,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요나가 하나님 자체가 싫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정확히 아십니다. 싫어서 도망간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도망쳤겠습니까.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또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내게 뼈아픈 손해를 요구하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것입니다. 그 말씀을 다시 마주하는 자리가 너무도 껄끄럽고 불편해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으로 깊이 잠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불신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듣고 순종하기가 뼈를 깎듯 괴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버리면 일단 마음은 편하거든요.
하나님과 다시 정면으로 마주치기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시퍼런 진실과 명령 앞에 똑바로 서는 일이 너무도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나만 온통 손해 보고, 나만 죽도록 괴로운 것 같습니다. "하나님, 다른 말씀은 다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죽어도 못 하겠습니다" 하고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는 것입니다.
속으로 '우리 목사님은 어떻게 저렇게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볼까' 싶으십니까.
제가 뼈저리게 경험해 보아서 너무도 잘 압니다. 저 자신이 그 도망자의 자리에 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낯을 피해 잠들어 버릴 때, 내 영혼이 하나님과 얼마나 까마득하게 멀어지는지 저는 처절하게 겪어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깊이 잠든 자의 두 번째 특징입니다. 내 곁에 있는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 철저히 무감각해집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거대한 폭풍으로 배가 산산조각 날 지경에 이르자, 선원들이 어떻게 합니까. 목숨 하나 건져보겠다고 배에 실린 모든 짐을 바다로 집어던졌습니다.
당시 그 배는 한가롭게 노니는 유람선이 아닙니다. 장사하는 물건을 가득 실은 상선입니다. 상선에서 짐을 바다에 던져버렸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결코 단순한 화물이 아닙니다. 선원들에게는 목숨 같은 밥줄입니다. 상인들에게는 전 재산입니다. 그 배 뒤에 매달려 있는 수많은 가족들의 생계이자 처절한 미래입니다.
그 짐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것을 바닥에 내던졌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죽음의 공포가 턱밑까지 차올랐다는 말입니다.
그 처절한 바다 위에서 선원들이 공포에 질려 울부짖으며 전 재산을 바다에 던질 때, 우리의 주인공 요나 선지자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배 밑창에서 세상 편하게 두 다리 뻗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남들은 죽겠다고, 숨이 턱에 차서 죽어간다고 피눈물을 흘리며 아우성치는데, 이 사람은 홀로 태평하게 곯아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으로 잠든 자가 보여주는 가장 전형적인 비극입니다.
영적 깊은 잠에 빠져들면, 이웃의 피눈물이 도무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짓눌린 고단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의 찢어지는 아픔과 뼈아픈 외로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내 곁의 가족과 지체들이 깊은 한숨을 내쉬면, 그 가슴속에 서린 애달픔과 슬픔을 헤아리기는커녕 "너는 왜 맨날 처량하게 한숨만 쉬어대느냐" 타박부터 쏟아냅니다. 그 한숨 뒤에 도사린 고통의 무게를 전혀 읽어내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잠들어 버리면 오직 '내 억울함' 하나만 눈에 들어옵니다.
세상천지에 나만 제일 억울합니다. 나만 제일 힘들고, 나만 피해자입니다. 다른 사람의 피눈물과 억울함과 고통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왜 이 지경이 되었겠습니까.
자기 상처라는 감옥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천성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남들보다 유독 못되고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자기 연민과 자기 상처라는 좁아터진 껍질 속에 갇혀 있다 보니, 정작 내 곁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잠든 자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깨어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짜 깨어 있다는 것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딱 두 가지로 판가름 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한 것이요, 둘째는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아픔과 고통에 민감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답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힘주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 주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해 주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전부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본질입니다.
로마서 12:1515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예수를 믿는 진짜 신앙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찢어지는 마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오늘 내가 마주한 그 한 사람의 짓눌린 마음에 민감하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영성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산 믿음입니다. 그것을 빼놓고 나면 신앙에 도대체 무엇이 남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지금 삶의 거센 풍랑을 만나 신음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풍랑을 만납니다.
요나가 죄를 짓고 도망치다가 풍랑을 만났으니, 우리도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야만 풍랑을 만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은 자도 풍랑을 만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자도 풍랑을 만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예외 없이 풍랑을 마주합니다.
풍랑을 만났다고 해서 모든 풍랑이 요나처럼 불순종해서 얻어맞는 풍랑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죽도록 순종하다가 만나는 거룩한 풍랑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다가 집채만 한 풍랑을 만났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고 노를 젓다가 풍랑에 갇힌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로마로 가라는 출장 명령서를 주셨을 때, "예, 가겠습니다" 순종하며 로마로 향하다가 유라굴로라는 무시무시한 광풍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것은 내가 풍랑을 만났느냐, 만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날마다 모여서 인생에 풍랑이 비껴가게 해 달라고, 풍랑 좀 안 만나게 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러나 백날 천날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풍랑이 안 옵니까.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데, 평생을 바다 위에서 살아가면서 어떻게 풍랑 한 번 안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풍랑은 누구나 만납니다.
우리의 시선은 오직 '내가 풍랑을 만났는가, 안 만났는가'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시는 시선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그 풍랑 속에서 '깨어 있는가, 아니면 깊이 잠들어 있는가'를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가 보는 잣대와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풍랑이 몰아칠 때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동자로 주시하시는 단 하나는, 네가 깨어서 그 풍랑을 딛고 서 있는가, 아니면 풍랑 속에서도 영적 깊은 잠에 빠져 곯아떨어져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요나도 풍랑을 만났고 바울도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풍랑 앞에 선 두 사람의 모습은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완전히 달랐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로 도망치다 풍랑을 만났고, 바울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로마로 출장을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보십시오. 요나는 자기 한 사람의 죄악 때문에 배에 탄 무고한 사람들이 다 죽게 생겼는데도, 차가운 배 밑바닥으로 기어 들어가 쿨쿨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풍랑을 만난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번쩍 깨어 있었습니다. 갑판 위로 당당히 올라와,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벌벌 떠는 사람들을 향해 사자처럼 포효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안심하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이 풍랑은 우리를 수장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똑똑히 보여 주시려는 기회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을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패닉에 빠져 허둥대던 사람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위로하고 축복했습니다. 풍랑 한복판에서 절망하는 이방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바울은 거친 파도 위에서 하나님을 담대히 증언하는 산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22-2422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23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24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행전에 똑똑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 배에 타고 있던 276명 모두가 바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단 한 사람의 인명 피해도 없이 건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똑같은 풍랑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 잠든 요나 곁에 있던 사람들은 밥줄과 재산을 다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습니다. 반면에 영적으로 번쩍 깨어 있던 바울 곁에 있던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온전한 살길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역사를 맛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삶의 거센 풍랑 한복판에서 도대체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함께 풍랑을 만나 죽어가는 이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참된 위로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살려내는 축복자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이야 죽든 말든 나 하나만 편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배 밑창에 숨어 곯아떨어진 영적 잠든 자입니까.
영적으로 깊이 잠든다는 것은 단순히 나 한 사람 망하는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곁의 가족들을 파멸로 몰아넣습니다. 내가 속한 교회와 공동체, 내 주변의 힘없는 사람들을 모조리 거친 풍랑 바닥에 빠뜨려 죽게 만듭니다. 그들의 뼈아픈 생계와 소중한 짐들을 바다에 다 내던지게 만듭니다. 끝내는 그들의 영혼까지 절망의 깊은 바다로 내몰아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영적으로 잠들었을 때 일어나는 끔찍한 파괴력입니다.
인생의 풍랑을 만나 보면, 그 사람이 진짜 깨어 있는 자인지 잠든 자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단번에 드러납니다.
이 험악한 세상이라는 풍랑 한복판에서, 내 곁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품어내는가를 딱 보면 그 사람의 영적 민낯이 그대로 까발려집니다.
골방에 틀어박히고 기도원에 올라가 목청 높여 기도만 해댄다고 해서, 그 사람이 과연 진짜 깨어 있는 사람입니까.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깊이 잠든 사람을 한번 흔들어 깨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곤히 잠든 사람을 깨워 놓으면 좋아합니까, 싫어합니까.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성질을 부립니다. 생난리를 피웁니다.
조금만 더 달콤하게 자고 싶은데 귀찮게 깨운다고 별별 소리를 다 해댑니다.
학교 늦는다고, 출근 시간 늦는다고 애가 타서 깨워 주는 것이니, 깨워 주는 사람에게 백번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아닙니까. 그런데 잠에 취한 인간들은 깨워 주면 적반하장으로 성질부터 냅니다. 온갖 짜증을 부리며 왜 깨우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심지어 강단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깨워 보니, 어떤 사람들은 단순한 짜증으로 끝나지 않고 목사를 미워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매일 아프게 찌르는 소리만 골라서 한다."
뒤에서 투덜거리며 원망을 쏟아냅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을 도대체 어떻게 깨워야 합니까. 여러분 귀에 듣기 좋은 달콤한 설탕물 같은 말씀만 날마다 떠먹여 드릴까요. 그래서 온 성도가 다 함께 영적 당뇨병에 걸려 썩어 죽어야겠습니까.
깨워 줄 때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 비로소 잠에서 깨어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깊이 잠든 자는, 자신의 그 추악한 잠듦을 지적해 주면 오히려 상대를 멸시하고 경멸합니다.
"네가 뭔데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드느냐."
이를 갈며 등을 돌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완악한 사람을 살리시기 위해, 그의 인생 한복판에 진짜 피할 수 없는 무서운 폭풍을 집어던지시는 것입니다.
환경으로 깨워도, 사람의 음성으로 흔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돌아서지 않는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궁금하십니까. 알고 싶다면 끝까지 한번 버텨보십시오. 진짜 감당할 수 없는 풍랑, 인생을 뒤흔드는 큰 풍랑이 무엇인지 한번 겪어보십시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결코 멸망의 자리에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한 번 택한 내 자식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어이 끌고 가십니다. 그분이 바로 '은혜의 추격자'이십니다.
우리가 빗나갈 때마다 하나님은 끝까지 쫓아오십니다. 사람의 경고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음성마저 짓밟을 때, "너는 이제 끝났다, 포기했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거센 풍랑을 일으키고, 온 세상을 다 뒤집어서라도 나 하나를 건져내려 끝까지 추격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이 집요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끝없이 도망치면, 하나님은 기어코 더 큰 풍랑을 보내십니다.
그 풍랑이 내 육신의 질병으로 올지, 아니면 피눈물 나는 자식 문제로 닥칠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풍랑의 모양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욥처럼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환경으로 몰아넣어서라도, 기어이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지독하고 거룩한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거센 큰 풍랑은 요나를 죽이려고 보내신 심판의 바람이 아닙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요나를 기어이 깨우기 위해 울리신 하나님의 거룩한 알람이었습니다.
깨어나면 끝납니다. 일어나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풍랑을 보내시고 인생의 밑바닥을 흔들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어서라도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러니 인생의 풍랑 앞에서 제발 짜증 내지 마십시오.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풍랑을 만났을 때, 우리는 이렇게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영혼의 어느 부분이 지금 깊이 잠들어 있습니까. 깨어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흔드실 때, 감당하기 힘든 환경으로 깨우실 때, 내 육신의 본능으로 대항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이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알람인 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감각을 열어 주십시오."
성도 여러분, 지금 감당할 수 없는 풍랑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리거나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죄과에 대해 벌을 내리시는 자리가 아닙니다. 제발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오늘 네가 감당해야 할 중대한 사명이 있다고, 지금은 인생의 영적 시험 날이라고, 가야 할 현장이 있고 네게 맡겨진 하나님의 일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 환경이라는 메가폰을 들고 강력한 알람을 울려대시는 것입니다.
오늘 선포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영혼을 강타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알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뱃밑바닥에서 잠든 요나로 주저앉아 있지 않고, 풍랑 속에서도 담대히 깨어 사명을 감당했던 바울과 같이 일어서는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