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선지자가 이르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이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들을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들을 세우셨나이다
13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영국의 시인 바이런이 대학 시절 종교학 시험을 치를 때의 일입니다. 시험지에 이런 문제가 나왔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사건의 영적 의미를 쓰라." 이 문제를 받아 든 바이런은 한참 동안 창밖을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단 한 줄의 답안을 적어 냈습니다. "물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참 시인다운 통찰 아닙니까? 저는 그 문장을 보면서 단어 하나를 더 얹고 싶었습니다. 바로 '수줍게'라는 말입니다. "물이 그 주인을 알아보고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저라면 이렇게 고백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이 시간,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살아있는 말씀으로 여러분을 찾아오십니다. 말씀으로 찾아오신 그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십시오. 여러분 심령의 그 맹물 같고 무미건조한 마음이, 포도주처럼 붉고 달콤한 은혜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지난주 하박국의 첫 번째 질문을 함께 묵상했습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해 던졌던 그 처절한 외침을 오늘 우리의 언어로 바꾸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 이 꼴을 보고 살아야 합니까? 보십시오. 악한 자들은 떵떵거리며 살고, 정직한 사람은 바보 취급을 받는 세상 아닙니까? 권력을 쥔 자들을 보십시오. 죄를 짓고도 벌은커녕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습니다. 피해자는 피눈물을 흘리는데, 가해자는 활짝 웃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바닥에 짓밟혔고, 진리는 조롱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정의는 힘을 잃었습니다. 공의는 멈춰 섰습니다. 악이 선을 집어삼키고, 거짓이 진실을 덮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이런 패역한 세상을 언제까지 팔짱 끼고 구경만 하실 작정입니까?"
하박국은 유다 백성의 곪아 터진 죄악을 목도하며 하나님 앞에 거칠게 따져 물었습니다. 그리고 5절 이하를 보면, 침묵하시던 하나님께서 드디어 입을 여십니다.
제가 조금 제 언어로 각색해서 전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박국의 따져 묻는 항변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박국아, 너 내 말 똑똑히 들어라. 너는 유다의 죄악을 두고 내가 손놓고 구경만 한다고 말하지. 아니, 틀렸다. 네 질문부터가 틀렸다. 나는 이미 유다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저 사납고 성급한 족속, 갈대아 사람들을 준비해 두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1:5-65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여러 나라를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의 생전에 내가 한 가지 일을 행할 것이라 누가 너희에게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6보라 내가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이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가 아닌 거처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을 일으켰나니
여기 성경에 등장하는 갈대아 사람은 바벨론 제국을 가리킵니다. 유다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더 악랄하며, 더 포악한 바벨론을 들어서 유다를 치는 심판의 몽둥이로 쓰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기막힌 상황을 잘 꼬집는 속담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혹 떼려다 혹 붙였다.' 조금 거칠게 표현하자면, '쓰레기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였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형국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내놓으신 이 답변은 하박국이 짐작조차 하지 못한 충격적인 응답이었습니다.
하박국이 처음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적어도 이런 식으로 답해 주실 거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내가 유다의 죄를 물어 저 악한 왕 여호야김을 끌어내리겠다. 그 악한 왕을 쳐내고, 다윗처럼 의롭고 지혜로운 왕을 다시 세우겠다. 해이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율법으로 일깨우고, 그들을 통회자복하게 하여 이 땅을 정결하게 하겠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공의가 상식이 되며, 특권과 반칙이 발붙이지 못하는 거룩한 나라를 너희에게 회복시켜 주겠다."
하박국은 이런 통쾌한 정화와 부흥의 응답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의 진짜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너희보다 훨씬 더 악독한 놈을 몽둥이로 들어서, 이번에 너희를 아주 가루로 만들어 놓겠다. 각오해라."
지금 하나님은 이 무시무시한 말씀을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하박국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의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하나님, 우리 백성의 악을 제발 좀 바로잡아 주십시오. 도저히 이 꼴을 못 보겠습니다" 하고 간구했더니, 돌아온 응답이 무엇입니까? "걱정 마라. 너희보다 훨씬 더 악한 놈을 데려다가 아주 묵사발을 만들어 놓겠다."
이 기가 막힌 선언 앞에 하박국의 속이 온전했겠습니까? 머릿속이 하얘지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청천벽력 같은 대답 앞에, 하박국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깊은 탄식과 절망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진짜 힘들어지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응답이 전혀 없을 때가 아닙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응답,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엉뚱한 응답이 떨어질 때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참 곤혹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이 질병을 고쳐 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병을 고쳐 주시는 대신, 그 아픔을 통해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 버리십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응답을 내놓으십니다.
병을 고쳐 달라고 매달렸더니, 하나님은 내 뼈속 깊은 교만부터 꺾어 겸손한 사람으로 빚어가십니다. 껍데기뿐인 영혼 없는 기도를 하던 우리를, 그 질병의 풀무불을 통과하게 하시며 비로소 눈물 젖은 진심의 기도를 토해내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그저 질병이라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질병을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직장이나 교회에서 유독 나하고 맞지 않는 사람,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피곤한 사람을 만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과 부딪히다 보면 사람이 참 피폐해집니다. 속이 다 타들어 가고 번아웃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람을 두고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쏟아냅니다.
"하나님, 저 사람만 내 눈앞에서 사라져도 제 인생이 살 것 같습니다. 저 사람을 딴 곳으로 치워 주시든지, 아니면 저 사람 뜯어고쳐 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만 딱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 다들 한 번쯤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저 사람을 딴 부서로 보내서 내 눈에 띄지 않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저 인간 마음을 확 꺾어서 나를 편하게 해 주시든지, 제발 둘 중 하나만 해 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런 기도로 응답받은 분 계십니까? 거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람을 치우시는 대신, 그 사람을 몽둥이 삼아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지독한 자기중심성과 교만을 쳐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껄끄러운 사람을 통해 내 서슬 퍼런 '자기 의'를 깨뜨리십니다. 내 못난 성질머리를 깎아내시고,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자존심을 바닥으로 끌어내리십니다. 그 사람을 연단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나를 겸손한 사람으로, 나를 온유한 사람으로, 끝까지 오래 참는 예수의 사람으로 빚어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수많은 벽을 마주합니다. 넘어설 수 없는 문제의 벽 앞에 던져진 존재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견고한 벽 앞에 설 때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이 거대한 벽을 단숨에 무너뜨려 주십시오.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당장 치워 주십시오."
그런데 현실에서 그 벽이 턱턱 치워지는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별로 없습니다. 믿음 좋은 척 포장하지 말고 솔직해져 봅시다. 우리 다 그렇게 애타게 매달렸지만, 벽이 치워지는 응답은 거의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벽을 없애는 것보다, 그 막막한 벽 앞에 선 우리 자신을 빚어가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인생의 문제를 만나면, 어김없이 낙심과 절망이라는 놈을 불러들여 한집에서 동거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터지기만 하면 습관처럼 낙심과 절망을 끌어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 하나만큼은 가슴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문제는 낙심하고 절망하라고 주어지는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문제를 던지실 때는, 언제나 '기도의 재료'로 쓰라고 보내시는 것입니다. 문제는 결코 주저앉아 낙심할 핑곗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갈 가장 확실한 기도의 재료입니다. 이것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 기도와 불평의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불평은 문제를 사람에게 가져가는 것이고, 기도는 문제를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문제 안 만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다 만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기도의 무릎을 꿇고, 어떤 사람은 그 문제 때문에 입만 열면 불평을 쏟아냅니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듭니까? 그 문제를 지금 '누구에게 들고 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바로 그 차이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을 보십시오. 유다의 곪아 터진 타락은 하박국을 절망의 구렁텅이에 처박아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지독한 현실이 하박국에게 가장 뜨거운 기도의 재료가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하박국이 유다의 이 기막힌 모순과 절망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 하박국서라는 이 위대한 성경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문제를 만났더니, 그 문제가 하박국의 기도를 낳았습니다. 기도를 쏟아냈더니,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응답은, 하박국이라는 한 사람을 차원이 다른 깊은 믿음의 경지로 이끌어 올리는 거룩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인생의 문제를 통해 우리를 무너뜨리려는 분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파멸로 몰고 가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거룩한 백성으로 빚으시려는 것입니다. 온전히 엎드리는 예배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삶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그 문제를 들고 '누구에게로 달려가느냐'입니다. 그 문제를 누구에게 가져가느냐에 따라, 여러분은 무릎으로 승부하는 기도의 용사가 될 수도 있고, 입만 열면 원망을 쏟아내는 불평의 달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문제를 사람에게 들고 가면 끝없는 불평과 한숨만 생산할 뿐입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들고 나아가면, 그 즉시 능력 있는 기도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은 문제를 만났을 때 누구에게 먼저 달려갑니까? 당장 전화기부터 붙들고 사람에게 하소연을 쏟아냅니까? 아니면 사람을 찾아가 "그 인간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속을 긁어놓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 무거운 문제를 부여안고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다 쏟아내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발걸음이 향하는 그 자리에 따라,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인지 불평의 노예가 될 것인지가 판가름 납니다.
오늘 본문 12절 이하를 보십시오. 상상조차 하지 못한 하나님의 충격적인 답변 앞에 하박국은 넋이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다시 한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박국이 1장 초반에서 쏟아냈던 첫 번째 질문이 격정에 찬 '감정'의 절규였다면, 오늘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의 항변입니다.
보통 감정이 앞서는 사람은 논리가 무너지기 쉽고, 논리적인 사람은 가슴이 차갑게 식어 감정에 무딘 법 아닙니까? 그런데 하박국은 감정적이면서도 논리적인 사람이고, 서정적인 사람이면서도 서사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평범한 수준의 인물이 결코 아닙니다.
저는 이번에 하박국서를 다시 통독하면서, 하박국의 모습을 보며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여러분도 참 잘 아는, 아주 훌륭한 사람입니다. 누구인 것 같습니까? 누구겠습니까? 바로 저입니다, 저.
예전에 하박국서를 읽을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어 말씀을 깊이 들여다보니, 이 사람과 저의 성정이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통점을 짚어보니 그렇습니다. 일단 질문이 많습니다. 속에 의문이 많습니다. 감정적이면서도 논리적입니다. 설득력이 있고, 생각하는 것이 꽤 독창적입니다. 천국 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지만, 인물도 제법 훤칠하게 생겼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 기회에 이름을 '강박국'으로 한번 바꿔볼까 진지하게 고민 중입니다. 어떻습니까? 강박국 목사. 별로 마음에 안 드십니까?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을 보십시오. 하박국은 그저 감정에 북받쳐 떼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꿰뚫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히 알고, 바로 그 하나님의 성품을 근거로 들고나와 거침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하박국의 항변이 이렇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신 거룩한 하나님 아니십니까? 주님은 눈이 정결하셔서 악을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하시는 거룩한 분 아니십니까? 그런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유다보다 열 배는 더 악독한 바벨론을 들어 쓰신단 말입니까? 하나님, 제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지금 이렇게 따져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완벽한 논리로 무장하여 하나님을 설득해 들어가는 이 장면은,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깊은 영적 울림을 줍니다.
이 대목에서 제가 삼십 대 초반에 드렸던 기도 하나가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미 설교 중에 몇 번 나누어서 잘 알고 계시는 성도님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삼십 대 초반 시절, 극심한 경제적 결핍으로 인생이 참 곤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아주 진지하게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많은 신자들이 가난할 때는 하나님께 매달리다가, 형편이 좀 펴지고 부유해지면 하나님을 훌쩍 떠나버린다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혹시 궁금해서 여쭙는데, 저도 그 꼴 날까 봐 일부러 돈을 안 주시는 것입니까? 물론 제가 부자가 되어도 다른 인간들과 달리 절대 하나님을 안 떠날 거라느니, 돈이 많아지면 더 기가 막히게 잘 믿을 거라느니, 그런 뻔뻔한 장담은 하지 않겠습니다. 저도 제 속을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 저도 진짜 궁금합니다. 제가 물질의 풍요를 누릴 때 과연 어떤 인간으로 서 있을지 궁금합니다. 부자가 되어서도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날지, 아니면 하나님을 더 신실하게 섬길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한번 부자로 만들어 보십시오. 제가 어떤 인간으로 존재하는지 하나님도 한번 지켜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솔직히 하나님도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 돈 좀 달라는 간구를 제가 이렇게 수준 높게 포장해서 올려드렸습니다. 삼십 대 초반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네 이놈, 감히 그런 얄팍한 꼼수에 내가 넘어갈 것 같으냐?" 하며 불호령을 내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놀랍게도 그 기도에 그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돌아보니 저는 그 후로 돈 때문에 인생이 비참하거나 초라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가 찍혀 있든 상관없이, 물질 문제 때문에 제 존재 자체가 위축되거나 초라함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기도는 이렇게 해야 응답받는다" 하는 얄팍한 비결이나 요령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기도할 때 허공에 쓰레기 흩뿌리듯 무책임하게 소리만 지르지 마십시오. 정제되지 않은 내 감정의 배설물을 하나님 앞에 무턱대고 쏟아붓지 마십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을 요강 단지 삼아 내 심리적인 오물만 털어내는 것으로 기도를 천박하게 낭비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천지를 지으신 절대자와 마주 앉는 거룩한 통로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빚으신 바로 그 위대한 인격자 하나님을 대면하듯 기도해야 합니다. 제발 기도를 기도답게, 깊이 생각하며 하십시오. 입에서 튀어나오는 대로 청산유수처럼 유창하게 떠들면 기도를 잘하는 줄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기도는 생각을 정돈하며 천천히 무게를 실어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내 영혼의 깊은 중심을 정갈하게 정리하여, 인격자이신 그분 앞에 향기로운 제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공중에 대고 무책임하게 쏟아붓는 기도는 이제 멈춥시다. 너무도 많은 기도들이 공허한 우주의 쓰레기가 되어, 오늘도 허공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온통 쓰레기 더미가 되어 허공을 맴돌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 앞에 내 감정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배설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마주 앉는 거룩한 대면입니다. 하나님과 마주 앉는 것, 바로 이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보십시오. 하박국이 얼마나 치밀하게 두 번째 질문을 준비했는지 한눈에 드러납니다. 바벨론이라는 무지막지한 몽둥이를 들어 유다를 치시겠다는 하나님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 앞에, 하박국은 기막힌 비유를 들고나옵니다. 바벨론을 무자비하게 고기를 낚아채는 어부로, 유다 백성을 속수무책으로 잡혀가는 물고기로 비유하며 자신만의 논리로 하나님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하박국 1:14-1514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을 바다의 고기 같게 하시며 다스리는 자 없는 벌레 같게 하시나이까
15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따져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바벨론 저 악독한 자들은 사람을 한 영혼, 한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고귀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저 그물 가득 몇 마리 잡았느냐며 무더기로 긁어모아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저 잔인한 바벨론은 인간을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저 잡아먹을 물고기 떼 정도로 천박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하박국은 지금 이 처절한 현실을 들어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이 문장이 참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가 낚시로 모두 낚으며 그물로 잡으며 투망으로 모으고 그리고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낚시꾼들이 물가에 나가 낚싯대나 투망으로 물고기를 한가득 잡아 올립니다. 그 고기들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어 칼로 비늘을 벗겨내고 포를 뜹니다. 회를 뜨고 매운탕을 팔팔 끓여냅니다. 소주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외칩니다.
물고기는 지금 숨이 넘어가며 살이 찢기는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잡아 올린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시고,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웃고 떠들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바벨론 저 악독한 자들은 사람을 물고기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잔인한 사냥의 대상, 도륙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자들입니다." 하박국은 이 끔찍한 비유를 들어 하나님께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박국 1:16-1716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
17그가 그물을 떨고는 계속하여 여러 나라를 무자비하게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처절한 비유를 쏟아낸 하박국은 "이것이 과연 공의에 맞습니까?" 하고 따져 물은 뒤, 하나님을 향해 다시 한번 간곡하게 호소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선하고 의로우신 분 아니십니까?"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인정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유다가 죄를 범한 것 인정합니다. 심판을 받아도 마땅한 족속이라는 사실, 백번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물고기처럼 취급하고, 인간의 생명을 한낱 먹잇감처럼 도살하는 저 포악한 족속을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쓰신다는 것은, 하나님, 이것은 정말 아닙니다. 결코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호소합니다.
저는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하박국의 이 호소야말로 설득의 진정한 고전이구나'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습니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이 본문을 뼈속까지 파고 내려가 설득에 관한 책이라도 한 권 쓰고 싶을 만큼, '아, 상대를 설득하는 진짜 대화는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하는 통찰이 이 짧은 구절 속에 완벽하게 담겨 있습니다.
여러분, 하박국은 지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아 피를 토하듯 괴로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부정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선하신 분인지 뼛속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 내 기도에 응답해 오시는 하나님의 처절한 방법이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뼈아픈 고통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하박국과 똑같은 자리에 설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아 가슴을 치며 매달립니다. "하나님, 도대체 왜입니까? 왜 하필 이런 방식으로, 왜 하필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수없이 이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 앞에 던지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 머리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 속에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을 끝까지 붙드는 것,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믿음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다.
머리로 다 납득되고 인과관계가 맞아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식이고 과학일 뿐입니다.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숨결조차 느껴지지 않는 기막힌 절망의 현실을 마주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지라도, 그분의 선하심과 신실하심만은 끝끝내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을 향해 모든 질문을 다 쏟아낸 다음에도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는 성루 위로 올라갔다고 선언합니다.
하박국 2:11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선지자가 성루에 올라가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묵묵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박국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믿음의 진수입니다.
이해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해가 안 되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니 다신 안 본다" 하며 등을 돌려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박국은 이해되지 않아도 자리를 지켰고, 납득되지 않아도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하박국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질문을 다 쏟아놓은 뒤, 마침내 입을 닫습니다. 철저한 침묵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파수꾼이 캄캄한 밤 성루 위에서 동터오는 아침을 애타게 기다리듯, 하나님의 거룩한 응답을 기다립니다. "하나님, 제가 드릴 말씀은 다 올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차례입니다." 파수꾼의 눈빛으로 성루에 우뚝 서서, 하나님의 입술에서 떨어질 말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내가 할 말 다 털어놓았으니 이제 끝났다며 "아멘" 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 그것은 온전한 기도가 아닙니다. 내 말을 다 쏟아낸 순간은 기도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진짜 기도가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기도의 마무리는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 말을 하나님 앞에 다 올려드렸다면, 이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기다리는 것이 마땅한 기도의 태도 아닙니까? 그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너무 많은 말을 쏟아놓습니다. 내가 할 말만 속사포처럼 쏟아붓고는, 하나님께서 입을 여실 틈조차 드리지 않은 채 "아멘" 하고 벌떡 일어나 버립니다. 잔뜩 하소연을 늘어놓고는, 하나님이 이제 말씀 좀 하시려는데 휭하니 가버립니다. 자기는 다 쏟아놓고 하나님의 음성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르짖음을 다 들으시고 "그래, 내 아들아, 내 딸아, 내 말을 들어보아라" 하고 말씀하시려는데, 이미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 가버렸습니다. 내 말만 일방적으로 퍼붓고 "아멘" 끝,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한 지독한 무례입니다. 영적인 교양이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혼자 떠드는 독백, '셀프 토킹'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마주 앉아 나누는 거룩한 대화입니다.
하박국이 하나님 앞에 온 마음을 쏟아붓고 성루에 올라 잠잠히 기다리자,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이 임합니다.
하박국 2:2-32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3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거룩한 응답을 세 문장으로 선명하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유다의 악한 죄를 저 열 배는 더 악독한 바벨론으로 덮는다는 말입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피를 토하듯 질문하는 하박국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답변이 무엇입니까?
"하박국아, 정한 때가 있단다." 이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하박국은 "도대체 언제까지 악인들이 승승장구하고 의인들은 피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하나님은 언제까지 팔짱 끼고 구경만 하실 작정입니까? 언제까지 손 놓고 계실 것입니까?" 하고 따져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있단다. 나의 때가 있단다. 헬라인들이 말하는 물리적인 시간 크로노스가 아니라, 내가 역사에 개입하는 카이로스의 때가 있단다. 시간의 주권은 나의 것이지 결코 너희의 것이 아니란다." 이것이 하나님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저 포악한 바벨론도 반드시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유다를 심판하는 그 몽둥이조차 박살이 날 심판의 때를 내가 이미 정해 두었다. 반드시 정한 때가 있단다." 선지자에게 이 확실한 약속을 선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 좁은 생각에는 하나님이 늘 한 박자 늦으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늦으시는 법이 없습니다. "너의 조급함과 달리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신음 소리를 다 듣고 있고, 유다의 죄악도 다 꿰뚫어 보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네가 잠잠히 기다려야 할 때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라는 인간의 절규 앞에, "내게는 이미 정한 때가 있단다." 이것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첫 번째 응답입니다.
하박국의 고뇌에 찬 질문을 향한 하나님의 두 번째 응답은 바로 "더딜지라도 기다리렴"입니다.
"하박국아,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잠잠히 기다려라. 종기도 완전히 곪아 터져야 새살이 돋듯이, 내 거룩한 때가 있는 법이다. 너는 아직도 너무 조급하구나. 너라는 사람 자체가 믿음 안에서 더 무르익어야 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묵묵히 기다려라. 네 좁은 생각에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기다려야 한다." 이렇게 타이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 눈에 한없이 늦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큼은 가슴 깊이 새기십시오. 더딜지라도, 결코 멈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올려드린 기도는 단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다 응답됩니다. 내 뜻과 내 방식이 아닐지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릎 꿇고 간구한 모든 기도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한마디도 빠짐없이 다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가장 완벽한 카이로스의 때에, 가장 합당한 방식으로 그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결코 헛되이 멈추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이 "기다리라"고 명령하니까, 어떤 이들은 두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체념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기다리라는 말씀 속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네 기도 제목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쥐고 있으니, 너 또한 먼저 지쳐서 포기하지 말아라." 바로 이 엄중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물 젖은 기도를 재료 삼아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가 먼저 며칠 기도해 보고 "에이, 응답이 없네" 하며 섣불리 기도의 손을 내려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선하고 존귀한 방식으로, 가장 정확한 그때를 위해 여러분이 기도한 그 문제를 빚어가고 계십니다. "정한 때가 있다. 비록 네 눈에 더딜지라도 잠잠히 기다려라." 오늘 우리 심령을 향해 이 약속의 말씀을 던지고 계십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막막한 기다림의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살아내야 하겠습니까? 기다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다렸으면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까지 생겨났겠습니까? 기다리다 보면 눈이 짓무르고 턱 끝까지 숨이 차오릅니다. 기다림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오늘 본문 4절이 그 답을 선언합니다.
하박국 2:44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구절은 너무도 거대하고 중요해서, 훗날 사도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무려 세 번이나 각기 다른 맥락으로 인용했던 복음의 심장이자 핵폭탄 같은 말씀입니다. 이 구절의 신학적 깊이는 훗날 로마서를 강해할 때 다시 한번 뼈속까지 깊이 있게 파고들 것입니다.
오늘 하박국에게 선포된 이 말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진리의 무게를 여러분의 심령에 새겨드리기 위해 책 한 권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유대인 작가이자 인권운동가인 엘리 위젤이 쓴 자전적 소설 『밤(Night)』에 나오는 기막힌 일화입니다.
엘리 위젤은 참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세계적인 작가이면서도 노벨문학상이 아니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모진 고초를 겪은 생존자이기도 합니다. 그가 피로 써 내려간 책 『밤』을 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잿빛 하늘 아래서 목격했던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사건 하나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해 질 녘이었습니다. 나치 군인들은 하루 종일 강제노역에 시달리다 돌아온 포로들을 숙소로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연병장에 죄다 줄을 세웠습니다. 운동장에 모여 서서 바라보니, 그곳에는 세 개의 교수대가 흉흉하게 솟아 있었습니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힌 세 명의 수용자가 밧줄에 목이 걸린 채 서 있었습니다. 탈출하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보라는 것입니다. 본보기로 고통스럽게 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은 이들의 심장에 공포를 때려 박으려는 잔인한 처형이었습니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그 참혹한 광경 앞에서 수용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모자를 벗어 가슴에 얹고 소리 없이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숙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수대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대에 목이 매달린 세 사람 중 한 명이, 너무도 어린아이였기 때문입니다. 아빠의 손을 잡고 도망치다가 붙잡힌 그 어린아이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형이 집행되었습니다. 두 명의 어른은 밧줄이 조여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린아이는 몸무게가 너무 가벼워 숨이 곧바로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밧줄에 목이 매달린 채 대롱대롱 흔들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습니다. 죽음의 공포에 질려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서서히 목이 졸려가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살려달라고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그 처참한 소리를 들으면서, 나치 군인들은 담배를 피워 물고 낄낄거리며 비웃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겪는 단말마의 고통을 바라보며 조롱하듯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바벨론 군대가 무자비하게 낚아 올린 물고기의 배를 가르고 회를 뜨며 술잔을 부딪치듯, 나치 군인들은 서서히 죽어가는 어린아이의 고통을 보며 악마처럼 즐거워하고 합니다.
그 참혹한 광경을 숨죽여 바라보던 수용자들 틈에서, 누군가의 억눌린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누구의 입에서 나온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포로가 짓밟힌 영혼으로 나직하게 읊조렸습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 절망의 순간, 엘리 위젤의 영혼 밑바닥에서 천둥 같은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저 어린아이와 함께 저 차가운 교수대에 매달려 있단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눈물로 붙들고 있는 십자가의 신비입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인간의 처절한 절규 앞에, 갈보리 십자가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내가 바로 여기 있단다. 나는 너의 고통 바깥에서 팔짱 끼고 구경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네가 겪는 그 지옥 같은 고통 한가운데 함께 매달려 있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회복을 얻습니까? 내 고통의 심장 한가운데 함께 피 흘리며 매달려 계신 그 주님과 눈이 마주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그저 마술처럼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내 찢어지는 고통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그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짊어지시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을 만나는 순간, 내 고통은 더 이상 나를 파멸시키는 저주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는 거룩한 원리입니다.

여러분, 의인은 인생의 모든 의문과 질문에 명쾌한 답을 얻었기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서 나를 끝까지 품에 안으신 주님을 보았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온전히 신뢰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내 삶에 도대체 왜 이런 기막힌 일들이 벌어졌는지 다 알지 못합니다. 내 뼈를 깎는 이 고통이 언제쯤 끝이 날지 그 기약조차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다루시는 거친 손길과 그 섭리의 방식을 머리로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비록 방법은 몰라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만은 똑똑히 알고 살아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인생에 닥쳐온 수많은 풍파와 하나님의 광대한 일하심을 우리가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머리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일하시는 방법은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우리는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그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그분은 결단코, 절대로 나를 내팽개치거나 버릴 수 없는 분입니다. 절대로 나를 포기하지 못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아무리 못난 짓을 하고 곁길로 빗나갈지라도, 끝끝내 나를 놓지 못하시는 신실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그 절절한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숨이 턱턱 막히는 고통의 한복판에서 피투성이가 된 나를 두 손으로 붙들고 계신 바로 그분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그 처절한 죽음의 자리에서도, 마지막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나를 사랑하셨던 바로 그분입니다. 당신의 온몸에서 물과 피를 남김없이 다 쏟아내시면서도, 십자가 아래 서 있는 우리를 향해 끝없는 긍휼의 눈빛을 거두지 않으셨던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압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그 하나님을 전격적으로 알고, 그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신뢰하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의 진짜 의미입니다. 그것이 믿음으로 살아내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을 향한 하나님의 응답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하는 자야, 이미 정한 때가 있단다. 시간의 주권은 나의 것이란다."
때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을 신뢰하며 버텨내는 기다림은 우리의 몫입니다. 때는 하나님의 것이요, 기다림은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막막한 기다림의 터널을 끝끝내 견뎌내게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엄중한 약속을 우리 가슴에 새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언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오직 자기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이 '그의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이 말씀의 무게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은 결국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은 분량만큼만 인생을 살아낸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그의 믿음'으로 산다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복잡한 교리적 수식어를 덧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모든 성도가 딱 자기가 가진 믿음의 크기만큼, 딱 그 믿음의 그릇만큼 현실을 돌파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엄숙한 진리입니다.
똑같은 고난과 똑같은 문제의 벽을 마주하고도 사람마다 반응이 천차만별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아는 믿음의 수준만큼만 현실을 살아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강단에서 선포된 이 말씀이, 여러분 심령 속에 웅크리고 있던 믿음의 그릇을 넓히고 믿음의 지경을 활짝 열어젖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