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람들을 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 의지대로, 내 선택대로 내 인생을 멋지게 꾸려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럴까요?
제 눈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 마치 목줄에 묶인 개처럼 무언가에 꽁꽁 묶여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참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묶여 삽니다. 입만 열면 돈, 돈 합니다. 돈이 흔들리면 믿음도 흔들립니다. 하나님의 결핍보다 돈의 결핍을 훨씬 더 크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보다 언제나 돈을 먼저 붙잡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감정’에 묶여 삽니다. 누군가가 던진 말 한마디에 하루만 무너지는 게 아닙니다. 그 한마디에 한 달을, 아니 일 년을 무너진 채로 살아갑니다. 기분이 좋으면 온 세상이 다 좋아 보이지만, 감정이 조금만 상하면 모든 관계와 시간을 다 망가뜨려 버립니다.
또 어떤 사람은 ‘상황’에 묶여 삽니다. 형편이 좋을 때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늘 웃으며 감사와 찬양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만 나빠지면 금세 우울해지고 낙심하여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상황이 내 생각을 지배하고, 삶 전체를 이끌고 가는 핸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어떤 사람은 ‘명예와 시선’에 묶여 사람들의 인정에 목말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걱정과 염려’에 묶여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오늘의 행복을 통째로 빼앗기며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겉으로 보면 우리는 참 자유로워 보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삶의 베일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우리는 무언가에 철저히 묶여 있습니다.
묶여 있는 대상만 다를 뿐입니다. 어떤 이는 돈에, 어떤 이는 상황에, 어떤 이는 감정과 염려에 결박당한 채 끌려다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인생의 슬픈 자화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왜 예수 믿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곧바로 내놓을 명확한 대답이 있으십니까?
아마 열 사람이면 열 사람 다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죄 사함 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요.” “이 힘든 세상에서 복 좀 받고 살고 싶어서 믿습니다.”
다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전에 어떤 분에게 왜 예수를 믿느냐고 물었더니, 아주 뜻밖의 대답을 하시더군요. “아내가 시켜서 믿습니다.”
놀랍게도 그렇게 대답하신 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프라이버시가 있으니 누군지 말씀드릴 수는 없고… 정말 궁금한 분은 예배 끝나고 저를 따로 찾아오십시오.
여러분, “왜 예수 믿습니까?”라는 이 질문은 어쩌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저에게 “목사님은 왜 예수를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자유롭고 싶어서요.”
죄와 죽음에서 자유롭고 싶고, 이 팍팍한 세상 삶에서 자유롭고 싶어서입니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돈과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싶어서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저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자유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예수를 믿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을 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을 발견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때는 이 말씀이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막 설레었습니다. 다 소화해 내지 못하는데도 말씀이 그냥 너무 좋았고, 이 말씀을 만났을 때 가슴이 두근두근 떨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훗날 돌아보니 그때의 그 끌림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때가 되면 이 말씀을 저에게 알게 해 주시려고, 그때 처음 이 말씀의 씨앗을 제 안에 심으셨구나 하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경을 처음 읽은 것이 벌써 사십 년 전입니다. 사십 년 전에 심긴 이 말씀의 씨앗이, 사십 년 동안 제 안에서 자라 왔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는 이 말씀은 사십 년 묵은 말씀입니다. 사십 년 동안 제 안에서 자라 숙성된 것을 가지고 나와서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마치 육지와 섬을 이어 주는 다리처럼 본문 전체를 단단히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혹시 구절 속에서 그 단어를 찾아내셨습니까? 바로 ‘거하면’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는 다짜고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앞에 먼저 단서를 붙이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우리는 흔히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뒷구절만 붙들고 외울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선행 조건은 “너희가 내 말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리가 자유라면서 왜 나는 이렇게 자유롭지 못하고 답답할까?” 하고 물을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할 때, 비로소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유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자유는 우리가 말씀 안에 거할 때 비로소 잉태되고 자라나는 ‘열매’입니다.
말씀은 우리 심령에 씨앗으로 떨어집니다. 어떤 씨앗은 싹이 빨리 뜨고, 어떤 씨앗은 시간이 한참 걸리기도 합니다. 사과나무 가지에 사과가 하루 붙어 있었다고 당장 열매가 열립니까? 아닙니다. 가지에 계속 붙어 있으면서 사계절을 견디고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탐스러운 열매가 맺힙니다.
자유도 똑같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그 즉시 자유가 팍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 붙어 있는 그 시간들이 쌓여, 우리 안에 자유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를 무조건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말씀에 거한 ‘깊이’만큼, 말씀에 거한 ‘부피’만큼 우리 안에서 자유가 만들어집니다.
집에서 요리하실 때 오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오이를 소금물에 잠깐 담갔다 꺼내면 어떻습니까? 겉만 살짝 젖은 채 그대로입니다. 하지만 오이를 소금물에 오랫동안 폭 담가 놓으면 어떻게 됩니까? 속까지 간이 푹 절여져 깊은 맛을 내는 오이장아찌가 됩니다.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말씀이라는 소금물에 나를 오랫동안 담가두어, 그 말씀이 내 생각과 마음 깊은 곳까지 푹 스며들어 머무는 상태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너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깊이 들어야 할까요? 왜 참된 말씀을 끊임없이 찾아 듣고 묵상해야 할까요? 참된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얼마나 깊은 착각 속에 빠져 있는지를 깨닫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내 착각을 자꾸 깨뜨립니다.
반면, 겉껍데기뿐인 ‘종교성’은 우리의 착각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굳어지게 만듭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중직자나 교인들 가운데 유독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이 아닌 종교성으로 무장하다 보니, 자기 착각이 단단한 돌처럼 굳어져 버린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오늘날 교회 안에는 크게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진짜 아는 사람입니다. 참 감사하고 아름다운 분이지요.
둘째,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런 분도 저는 괜찮다고 봅니다. 모르면 배우면 되니까요.
문제는 세 번째부터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모르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없어 보일까 봐, 신앙이 얕아 보일까 봐 모르면서도 아는 척 위장하는 사람입니다.
넷째, 이 사람이 진짜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데, 스스로는 하나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을 십 독 했네, 백 독 했네 자랑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네 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지목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들은 제자들을 핍박하고 괴롭히면서도 죄책감을 눈곱만큼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다!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제자들을 매질하고 핍박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이러는 거야!”라고 외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왜 그런 기이한 행동을 하는지 그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33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그들은 스스로 하나님께 충성한다고 믿었지만, 주님은 단칼에 끊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버지와 나를 전혀 몰라서 저런 짓을 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일수록 남을 정죄하면서 자신은 철저히 정의롭다고 착각합니다. 제가 수십 년 동안 목회하면서 이런 모습을 정말 많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의 참된 진리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남을 손가락질하고 정죄하면서 “나는 옳다, 나는 정의롭다”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 알수록 사람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집니다. 이것은 백 퍼센트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면 알수록 사람은 날이 선 것처럼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워지고, 자기 위상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 겸손해집니다. 그것이 제가 수십 년 목회 현장에서 보아 온 거룩한 풍경입니다.
하나님을 진짜 아는 사람일수록 “아,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아는 체하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볼 때 가장 무서운 무지는 단순히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모르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진짜 무지입니다. 진짜 무서운 것은 내가 무지하면서도 무지하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모를수록 오히려 다 안다고 착각합니다. “나, 너 다 알아! 안 봐도 비디오야!” “내 눈에는 다 보여!”
사실 이건 제가 예전에 입에 달고 살던 말입니다.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다 ‘헛방’이더군요. 저 역시 그런 어처구니없는 착각을 얼마나 많이 겪었는지 모릅니다.
이단들의 결정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안다!” 아닙니까? 며칠 전에도 신천지에서 편지 한 통이 왔습니다. 어떤 자매가 맞춤법도 다 틀린 편지에 “목사님, 꼭 이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하고 보냈더군요. 이처럼 모르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다 안다고 장담합니다.
“나는 다 알아, 나만 알고 있어!” 하는 사고방식을 세상에서는 ‘사기꾼’이라 부르고, 종교적으로는 ‘이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다 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사람은 “나 이제 좀 안다” 싶을 때 넘어지고 자빠집니다.
누가복음 1장을 보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고 고지합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복음 1:3434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여러분, 여기서 마리아가 말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남자에 대해 잘 모릅니다, 남자와 연애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뜻입니까? 아니면 “남자와 몸을 섞은(동침한) 적이 없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헬라어의 ‘기노스코(γινώσκω)’, 히브리어의 ‘야다(יָדַע)’—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내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를 머리로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내가 완벽히 하나가 되었다, 깊이 결합했다는 뜻입니다.
조금 파격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과 영적으로 ‘동침’했다는 깊은 친밀함의 표현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앎’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느 목사님에게 설교를 들었거나, 성경을 몇 번 읽어서 지적으로 획득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깊이 합일되고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그분을 경험하여 알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앎’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하나 되어 그분을 깊이 알아가는 것이, 과연 우리의 힘과 의지로 가능할까요? 결코 불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요한복음 5장의 ‘베데스다 연못’ 사건입니다.
거기에는 삼십팔 년 동안이나 누워 연못에 들어가지 못한 가련한 병자가 나옵니다. 그 병자가 어떻게 나음을 입었습니까? 진짜 베데스다(은혜의 집) 되신 예수님께서 친히 찾아오심으로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병자는 “구원이 저 연못 물결이 일어날 때 있는데, 내 꼴이 이래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겨우 기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이 먼저 다 들어가 버린다”라며 자기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진정한 구원은, 그가 절망하며 한탄하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진짜 은혜이신 주님이 직접 찾아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구원은 우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는 은혜의 연못을 눈앞에 두고도 단 한 발자국조차 스스로 나아가지 못하는 삼십팔 년 된 병자와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연약한 인물들은 모두 다름 아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구원이 말씀과 은혜 속에 있다는 사실은 뻔히 알면서도, 정작 그 구원을 얻는 방법은 까맣게 오해하곤 합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연못을 향해 기어가야 구원을 얻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설령 바른 길을 안다 해도, 우리는 제 힘으로는 단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이나 아름다움을 향해 걸어갈 능력 자체가 없는, 길 잃은 어린양에 불과합니다.
바로 그 길 잃은 양에게 목자가 직접 찾아오십니다. 그분이 빛으로 오시고, 말씀으로 오시고,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절망적이고 한탄스러운 그 자리에 오셔서 우리를 따뜻하게 껴안아 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품에 안김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주님과 하나가 되고, 거룩한 합일과 동침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과 하나 된 것은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어떠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독일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옥중에서 남긴 시로 만든 유명한 찬송이 있습니다. 그 짧은 가사가 참으로 예술입니다. 들을 때마다 ‘아, 진짜 복음을 온몸으로 경험한 분이 쓴 고백이구나!’ 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주 선한 능력으로 안으시니
그 크신 팔로 날 붙드시네
— 본회퍼, 찬송 『주 선한 능력으로』
저는 이 가사를 대할 때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웅장함과 그 압도적인 은혜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무언가 내 손에 쥐어진 공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면 내가 이 정도는 자격이 되어야지” 하는 율법적인 습성이 뼛속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는 길은 내가 하나님을 간절히 붙잡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꽉 붙드시는 길입니다. 내가 말씀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나를 강하게 붙들어야만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됩니다. 그분의 선한 능력이 나를 감싸 안고, 그 크신 팔에 내가 완전히 안겨 있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억지로 안아서 하나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분의 선한 능력이 우리를 감싸고, 그 친절하고 강한 팔에 내가 안기는 상태—성경은 바로 그것을 ‘거함’이라고 부릅니다.
‘거함’을 한자어로 풀어내면 유숙(留宿)함, 즉 ‘주님 품을 떠나지 않고 그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진짜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머리로 몇 가지 신학 지식을 배워서 아는 껍데기 지식이 아니라, 그분 품 안에 거하면서 비로소 경험하게 된 앎—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야다(יָדַע)’이고, 거룩한 영적 동침입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베드로는 환경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완전히 밑바닥, 절망적인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친 실패한 제자였고, 현실적으로는 밤새 그물질을 했어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한 어부였습니다.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는 무능함, 마치 삼십팔 년 동안 누워 있던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와 다름없는 존재론적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주님이 그 절망의 바닷가로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요한복음 21:15-17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과거 베드로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지나친 ‘자기 확신’이었습니다. 그는 늘 “적어도 나는 나를 너무나 잘 안다”고 확신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자기 확신의 화신이었던 베드로가, 주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물음에 뭐라고 대답합니까?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 고백을 가만히 뒤집어보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 저는 저 자신을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라는 처절한 고백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제 마음조차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아십니다’ 하고 자기 확신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입니다.
만약 예전의 호기롭던 베드로였다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아따 주님, 섭섭합니다! 제가 삼 년 동안 주님을 어떻게 따라다녔는지 다 봐놓고는 저를 못 믿으십니까? 저 사람들은 다 변하고 배신할지 몰라도, 저는요! 절대 안 변합니다!”
그는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습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변해도 자신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를 굳게 믿었습니다. “나는 나를 안다”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통곡과 절망의 시간을 통과하며 자신을 돌아보니, ‘내가 안다고 장담했던 그 모든 것이 실은 아무것도 아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의 가장 무서운 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잘 모르는 무지가 아닙니다. 진짜 적은 바로 “나는 다 알아, 나는 잘하고 있어” 하는 오만한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무너진 것은 주님을 몰라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주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자기 자신도 너무나 잘 안다고 오만하게 착각했기 때문에 무너진 것입니다.
인간은 가만히 보면 참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몰라도 아는 척하고 싶고, 없어도 있는 척하고 싶어 하죠. 저 역시 예전에는 티가 팍팍 나도록 아는 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제 특기가 바로 아는 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떨까요? 이제는 티가 안 나도록 아는 체합니다. 훨씬 더 세련되게 아는 척을 하지요. 예전에는 너무 무식하니까 그걸 숨기려고 대놓고 아는 체를 했는데, 지금은 조금 알게 되었다고 티 나지 않게 은근히 아는 체하는 제 모습을 문득문득 발견합니다.
제가 가끔 여러분에게 “나는 그 흔한 박사 학위 하나 없는 사람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속에 사실 무엇이 숨어 있는지 아십니까? ‘나, 사실은 박사들보다 더 많이 알아’ 하는 마음입니다. 겸손을 위장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박사 학위 있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내가 훨씬 더 많이 알걸?’ 하는 교만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가끔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성도님들의 말씀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지만, 속으로는 ‘너희 이거 모르지?’ 하는 은근한 자랑이 슬금슬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떨 때는 본문과 아무 상관도 없는데 원어를 들고 옵니다. 내 무식함을 아는 체로 덮으려는 이 연약함을 제 무의식 속에서 목격할 때가 참 많습니다.
솔직히 저는 처음 목회를 시작할 때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호남에 내려와 병원을 네 개나 세워 다 성공시켰고, 하는 사업마다 늘 승승장구했던 사람이었기에 ‘목회쯤이야, 하면 성공하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목사님들보다 성경도 더 잘 알고, 복음도 더 잘 알고, 세상 경험도 훨씬 많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목회를 하면서 수많은 사건을 겪고, 수많은 사람을 만나며 이리 깨지고 저리 깨졌습니다. 그리고 그 긴 고난의 터널 속에서 주님이 비로소 깨닫게 해 주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아, 내가 진짜 아무것도 몰랐구나… 말씀도 몰랐고, 복음도 몰랐고, 하나님도 몰랐고, 심지어 나 자신이 얼마나 밑바닥인 인간인지조차 까맣게 몰랐구나.’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처절한 깨달음이 저를 절망으로 끌어내린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하더라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르니, 비로소 다 아시는 주님께 겸손히 나아가게 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내가 갈 길을 알지 못할 때 “내가 곧 길이다” 말씀하시는 주님이 계셨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니 다 아시는 그분께 하나둘 맡겨 드리기 시작했고, 내가 모른다는 그 사실은 절망이 아니라 비로소 감격스러운 자유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 보니 ‘믿음’이란, 내가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더 많이 알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나를 온전히 아시는 그분께 나를 온전히 맡겨 드리는 과정이었습니다.
자기 확신에 차 있던 베드로의 그 교만한 확신이 완전히 깨어져 “저는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엎드렸을 때, 그제야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 하셨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던 사명의 말씀을 비로소 맡기신 것입니다.
저 역시 다른 목회자들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교만하게 생각할 때는, 시련과 실패만 잔뜩 찾아왔습니다. 내가 원하고 바라던 성도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고, 평생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나랑 정말 상극인 사람들만 교회로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아, 내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이 하실 일이구나!” 하고 주님 앞에 납작 엎드려지자, 그때부터 주님께서 당신의 양 떼를 한 명 두 명 보내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거룩한 열매가 바로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입니다!
제가 안다고 자만했으면 여러분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모르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엎드렸을 때, 주님은 당신의 귀한 양 떼를 우리 교회로 한 사람 한 사람 보내주셨습니다.
예전에 제가 목회하던 곳들을 돌이켜 보면, 하늘이 탁 트여 보이는 아름다운 예배당도 있었고, 호숫가 옆에 그림처럼 서 있던 근사한 전원교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성도 구경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교인은 하나도 없고, 주일에 나와서 그렇게 예쁘게 지어놓은 예배당 구경만 실컷 하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 곁에 나를 내려놓기 시작하자, 지하에 있어서 눈에 띄지도 않고 쉽게 찾아오기도 힘든 이 작은 예배당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귀한 양 떼를 친히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온 세계 열방을 다니며 그곳의 양 떼를 먹이라고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내가 안다고 호언장담할 때는 한 마리의 양도 보내지 않으시더니, 내가 모른다고 고백하니 온 세계 각국의 양 떼를 맡겨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앎은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모르는 존재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이 겸손하고 참된 앎이 진리이신 예수님과 나를 비로소 하나 되게 만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진리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참된 자유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이 본질을 모르면, 교회를 천 년 만 년 다녀도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지금 어떤 모습인가? 나는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어떤 근사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비쳐야 할까?’
늘 이것만 들고 나갑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안아 주심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합니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내놓을 조건으로 만들려고 하지요. 즉, ‘나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의 어떠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려 하면 우리는 전부 영적 조울증 환자가 됩니다. 내가 좀 잘할 때는 교만해지고 거만해지다가, 내가 좀 못할 때는 낭패감을 느끼고 넘어져 자빠져 난리가 납니다.
그리고 ‘나의 어떠함’으로 살려고 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화려하게 꾸며야 합니다. 박사 학위로 꾸미고, 돈으로 꾸미고, 좋은 집으로, 비싼 자동차로, 명품 옷으로 꾸밉니다. 심지어 자식으로 나를 꾸밉니다. 믿음 있는 척, 다 아는 척, 사람 좋은 척, 우리는 평생 연기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한두 번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과연 언제까지 그 연기를 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삶에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신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대하실 때, 우리의 어떠함은 단 0.1%도 바라보지 않으십니다. 오직 ‘당신의 어떠함’으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우리의 어떠함은 다 누더기 같은 더러운 옷과 같아서 하나님 앞에 감히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의 어떠함’이라는 거룩한 세마포 옷을 친히 입혀 주셔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제 손자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 뒤에 있는 우리 민하가 예전에 “어른 되면 할아버지는 돌아가셔” 하고 말했다고요. 그런데 저번 주에 그 말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어른 돼도 할아버지 안 돌아가셔” 하고 놀라운 말을 하더군요.
제가 깜짝 놀라서 “너 저번에는 할아버지 돌아가신다며, 왜 바뀌었어?”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안 돌아가셔. 그런데 내가 어른 되면 할아버지는 꼬부랑 할아버지가 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죽는다는 말이나 꼬부랑 할아버지가 된다는 말이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어쩜 팩트가 이렇게 정확하지? 역시 우리 민하는 남다르다!’ 하고 혼자 감탄을 합니다.
오늘도 예배가 끝나면 저 아이가 드럼을 칠 텐데, 여러분은 점심시간에 그 소리를 들으시면 참 시끄럽고 정신없으시겠지만, 제 귀에는 모차르트의 명곡처럼 들립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제 손자는 저를 힘들게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말도 안 듣고, 사고 치고, 떼를 씁니다. 그런데도 그 아이의 모든 말투와 행동이 다 예쁘게만 보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 아이의 어떠함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의 모든 것을 예쁘게 바라보는 ‘나의 어떠함’이 저 아이를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기로 결심한 ‘나의 어떠함’으로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기에, 아이의 모든 모습이 그저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역시 우리의 어떠함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습을 보고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택하신 ‘그분의 어떠함’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이유를, 하나님은 나에게서 찾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에게서 찾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발 나라는 존재에게 갇혀 있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을 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나 자신도 다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연약한 존재입니다’하고 겸손히 엎드릴 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참된 나 자신을 알게 하시고, 사랑의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진리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내려와 진실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나를 꾸미려 하지 않고, 아는 척하지 않고,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나의 어떠함에 매이지 않고, 당당하면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이 말씀을 진짜 내가 소화하고 붙들기 시작하면, 세상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게 됩니다. 이 진리가 우리를 완벽하게 자유롭게 합니다!
죄에서 자유롭게 하고, 자기 확신에서 자유롭게 하고, 남과의 비교와 경쟁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하고, 불안과 염려에서 자유롭게 하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 모든 결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경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내가 그분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이 유일한 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주의 말씀을 목말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 삶에 참된 자유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이 자유가 여러분의 영혼을, 마치 새장 문이 열려 하늘을 솟구쳐 오르는 새처럼, 모든 결박을 풀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가게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선포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 깊은 곳에 떨어진 거룩한 씨앗이 되어, 자라나면 자라날수록 여러분을 더욱 자유롭게 하기를 주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