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요즘 제 손주가 격주로 저희 집에 와서 자고 갑니다. 얼마 전 잠자리에서 침대에 누운 아이를 위해 축복 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민하가 대뜸 묻습니다.
"할아버지 기도는 하나님이 다 들어주셔?"
제가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럼, 할아버지 기도는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지. 지금까지 안 들어주신 것이 없단다." 그랬더니 아이 입에서 뜻밖의 말이 툭 튀어나옵니다.
"할아버지는 참 좋겠다. 내 기도는 하나도 안 들어주시는데."
벌써 마음에 기도의 생채기가 나 있었습니다. 고작 여섯 살짜리 아이의 가슴에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의 응어리가 맺혀 있는 것입니다. 동생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꽤나 매달렸던 모양인데, 응답이 없으니 속이 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주에는 느닷없이 동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바꿉니다. 하도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너 전에는 동생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잖아.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아이의 대답이 기가 막힙니다. 동생이 태어나면 엄마 아빠가 자기가 아니라 동생을 더 사랑할 것 같답니다. 그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것이지요.
아이의 속이 뻔히 보여서 제가 넌지시 제안을 하나 건넸습니다. "할아버지한테 기가 막힌 생각이 났다. 동생이 태어나면 이렇게 하자. 엄마 아빠는 여전히 민하를 일등으로 사랑하고, 새로 태어난 동생은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사랑해 주면 딱 공평하지 않겠니? 어때?"
그랬더니 이 녀석이 제 말을 흉내 내며 곧바로 맞받아칩니다. "할아버지, 나도 방금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았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말합니다.
"동생은 내가 사랑할게."
동생은 자기가 맡아서 사랑해 줄 테니, 엄마도 아빠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온 식구가 다 자기만 제일로 사랑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섯 살짜리 머리에서 나온 계산법치고는 참 무섭도록 지혜롭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아십니까?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하십니까?
쉽게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지식은 그냥 머리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그 지식을 삶에서 써먹는 것입니다. 결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이 성경을 백독하고 말씀 구절을 줄줄 왼다고 합시다. 그것은 뛰어난 성경 지식입니다. 그러나 거친 세상 한복판, 어떤 기막힌 상황 속에서도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아내는 것, 그것은 지혜입니다.
또 이렇게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소금이 음식 맛을 낸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압니다. 그건 지식입니다. 그러나 찌개에 소금을 딱 얼마큼 집어넣어야 제 맛이 나는지 아는 것, 간을 맞추는 그 감각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입니다.
하나 더 짚어 보겠습니다.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고 시기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다는 사실, 내 영혼이 병들고 사람 관계가 박살 난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 것, 그것은 지식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하나님 앞에 내 무릎을 꺾고 회개하며 내 거친 입술과 못된 발걸음을 멈추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지식과 지혜는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지식이 나를 많이 알게 만든다면, 지혜는 나를 똑바로 살게 만듭니다. 지식이 우리 인생을 그저 설명하는 것이라면, 지혜는 우리 인생을 깊이 이해하게 만듭니다.
오는 길목도 완전히 다릅니다. 지식은 책을 보고 귀로 듣고 쌓아 올리는 축적을 통해 옵니다. 그러나 지혜는 영적인 각성을 통해 옵니다. 뼛속 깊은 깨달음을 통해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은 참으로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경제학과 경영학에 통달했고, 외교학과 자연과학, 건축학과 도시공학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영역이 없습니다. 거기에 철학과 심리학까지 꿰뚫고 있었으니, 소위 인간 지식의 끝판왕 아닙니까? 그는 그 탁월한 지식으로 당대 문명을 쥐락펴락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솔로몬이, 지식의 정상에 섰던 그 솔로몬이 오늘 본문에서 정색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지식보다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이 있다, 내가 지금 그것을 말하겠다. 이렇게 운을 떼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지식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혜입니다. 지혜.
히브리 말로는 호크마(חָכְמָה)요, 헬라 말로는 소피아(σοφία)며, 영어로는 위즈덤(Wisdom)입니다. 바로 지혜입니다. 내가 천하의 온갖 지식을 쥐어보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존귀한 것이 있다, 그것이 지혜다, 솔로몬은 지금 뼈저린 음성으로 그 지혜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7:1111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이 되도다
전도자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지혜는 유산 같이 아름답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이 지금 지혜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려고 '유산'이라는 말을 끌고 들어옵니다. 유산을 빗대어 설명하는데, 도대체 유산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유산은 아이를 잃는 유산이 아닙니다. 부모가 평생 피땀 흘려 모아 자식에게 물려주는 그 재산, 그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왜 하필 지혜가 아름답다는 말을 하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넘겨주는 유산을 예로 들었을까요? 그 기막힌 이유가 바로 본문 12절에 나옵니다.
전도서 7:1212지혜의 그늘 아래에 있음은 돈의 그늘 아래에 있음과 같으나, 지혜에 관한 지식이 더 유익함은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리기 때문이니라
지혜도 돈도, 둘 다 우리 인생에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늘' 하면 어떤 풍경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저마다 가슴속에 그늘 하면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쯤은 다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늘이라는 말만 들으면 어릴 적 시골 동네 어귀에 서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 그리고 그 푸른 그늘 아래 놓여 있던 평상 하나가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 큰 나무와 평상은 단순한 그늘막이 아니었습니다. 삼복더위에 지친 동네 사람들, 뙤약볕에 등가죽이 타들어 가도록 일하던 농부들에게 그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쉼터가 아니었습니다. 지친 뼈마디를 녹여 주고 피로를 단숨에 날려 주는, 그야말로 천연 피로회복제 같은 자리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그늘은 단순히 따가운 햇빛을 가려 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늘은 참된 쉼을 통해 쓰러진 사람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생명의 회복소입니다. 거친 비바람과 폭양으로부터 사람을 넉넉히 품어 안아 주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정의하는 그늘의 본질입니다.
솔로몬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돈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는 인생의 살인적인 폭염, 숨 막히는 무더위를 만날 때, 돈이 우리 인생의 든든한 그늘막이 되어 준다는 솔직한 현실을 짚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유산이라는 단어 속에 담긴 핵심이 결국 재물 아닙니까? 우리가 인생길을 걷다 보면 타는 듯한 폭염과 가뭄의 때를 반드시 지나게 되는데, 그때 돈이라는 녀석이 그늘을 드리워 숨통을 틔워 주고 쉴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돈을 마다하겠습니까? 솔직히 돈 싫어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다 돈을 좋아합니다. 제가 오랜 세월 사람들을 겪어 보니, 입으로 돈 싫다고 손사래 치는 분들은 대개 이 땅을 떠날 날이 임박한 분들이더군요. 인생의 마지막 문턱에 서서야 비로소 "아이고, 돈이고 재물이고 다 귀찮다, 다 부질없다" 하시는 것이지, 살아 숨 쉬는 인생치고 돈 마다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저 역시 돈 좋아하는 제 모습을 들여다보면, 아직은 주님 품에 갈 때가 멀었구나 싶습니다.

저는 요즘도 말씀 공부 다음으로 경제와 금융 공부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습니다. 지난 몇 년간 내가 어떤 책을 제일 많이 파고들었나 돌아보니, 단연 말씀 연구 다음은 경제와 금융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목사인 제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시장 경제를 들여다보고 이 나이에도 금융 공부에 매달리겠습니까?
돈이 만들어 내는 그늘의 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누구보다 제가 뼈저리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유독 돈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뒤로 뺍니다. 돈과 믿음은 상극이라 여기고, 돈 이야기를 입에 올리면 마치 영성이 없는 것처럼 손가락질을 합니다. 참 지독한 착각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제대로 읽어 보십시오. 성경에서 말씀 다음으로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주제가 바로 돈 이야기입니다. 지겹도록 많이 나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돈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기막힌 문제들을 당장 해결해 주는 강력한 그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든든한 그늘막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몸에 몹쓸 병이 찾아왔을 때, 병원에 가려면 당장 병원비가 손에 쥐어져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돈 없으면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뎌 냅니까? 아플 때 돈은 생명을 지켜 주는 그늘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들, 제대로 가르치고 키워 내려면 밑천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돈이 있어야 자식들 머리 위에 배움의 그늘이라도 만들어 줄 것 아닙니까?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물건이 있을 때, 무릎 꿇고 주여 부르짖으며 기도만 하면 하늘에서 뚝 떨어집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내 손에 쥐어진 돈이 있어야 값을 치를 것 아닙니까.
돈은 우리 삶의 현실적인 무게를 가볍게 해 주는 아주 질 좋은 그늘을 마련해 줍니다. 이 불타는 세상의 뙤약볕을 뚫고 걸어가려면 누구나 그늘이 절실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눈만 뜨면 돈, 돈 하며 목을 매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인생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돈은 단순히 우리가 겪는 눈앞의 현실 문제만 해결해 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묘하게도 사람의 심리적인 여유와 만족감까지 쥐락펴락합니다.
성도 여러분, 통장에 잔고가 넉넉할 때와 바닥이 보여서 딸랑딸랑할 때 우리 마음가짐이 얼마나 다릅니까? 내 통장에 찍힌 숫자 하나에 따라 사람 마음에 여유가 흐르기도 하고, 잔고가 딸랑딸랑 바닥을 치면 공연히 이유도 없이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통장 열어보고 확인하는 순간, 사람 마음의 안색이 확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나 아끼는 후배를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지갑이 든든해서 "오늘 밥값은 내가 낸다." 이 한마디 툭 던질 수 있을 때, 사람 어깨가 펴지고 속이 넉넉해집니다. 그런데 도저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궁색한 형편이 되면 어떻습니까? 사람 만나는 자리 자체가 부담스럽고 슬그머니 위축됩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사인 저도 별수 없습니다. 돈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너그럽게도 만들고, 현실 속에서 기막히게 넓은 그늘을 드리워 주는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 남소례 권사님이 저에게 문자를 한 통 보내셨습니다. 내용이 이렇습니다.
"목사님, 제가 일하는 것이 좋을까요, 노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세상에서 제일 땀나는 일이 우리 권사님들 불쑥 던지는 질문에 답하는 일입니다. 일하는 것이 좋을까요, 노는 것이 좋을까요? 한참을 고민하다가 제가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권사님, 감당할 수만 있다면 일하시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제가 왜 굳이 '감당할 수만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겠습니까? 권사님 연세가 벌써 칠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기셨습니다. 칠십을 넘긴 나이에 사람 돌보는 고된 간병 일을 계속하는 것이 몸에 얼마나 큰 무리가 되겠습니까? 일흔여섯 노구를 이끌고 남을 돌보러 나가신다는데, 목사 된 심정으로 어찌 가슴이 덜컥 내려앉지 않겠습니까. 그 안쓰러운 마음 때문에 차마 선뜻 일하시라고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쉬시는 것보다 일자리에 나가는 편이 낫겠다고 조심스레 권해 드린 이유가 있습니다. 돈이 사람 인생에 만들어 주는 그늘의 위력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일손을 완전히 놓고 주저앉아 있는 것과, 내 땀 흘려 일해서 내 손으로 만들어 내는 인생의 그늘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내 손으로 번 돈은 사람에게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의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궁색하지 않은 안정감의 그늘을 드리워 줍니다. 남에게 손 벌리지 않는 당당한 여유의 그늘을 분명히 내어 줍니다. 이 그늘이 너무도 확실하기에, 세상 사람들이 밤낮없이 돈, 돈 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돈이 만들어 주는 그 수많은 그늘 가운데, 여러분은 어떤 그늘 아래 발 뻗고 쉴 때가 가장 좋으십니까? 어떤 그늘이 제일 달콤하다고 느끼십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돈의 그늘'과 '지혜의 그늘'을 붙들고 씨름하며 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너는 돈이 내어 주는 그늘 중에서 어떤 그늘에 앉아 숨을 돌릴 때가 제일 편안하냐?" 그랬더니 딱 두 가지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그늘입니다.
제가 지난날을 돌아보면 남부럽지 않게 치열한 세월을 건너왔습니다. 장가들고 난 뒤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단 하루도 편히 쉬지 못한 채 일터에 매달려 돈을 벌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참 지독하리만치 검소하게 살아왔습니다. 제 스스로 봐도 그렇고, 곁에서 지켜본 교우들도 "목사님은 참 대단할 정도로 검소하십니다" 하고 혀를 내두릅니다. 빈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제가 왜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고 그토록 검소하게 살았는지 그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제 타고난 성정이 남에게 머리 숙여 아쉬운 소리 하는 꼴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굶어 죽으면 죽었지, 남에게 궁색한 손을 내미는 짓은 도저히 못 해내는 사람인 것입니다. 손 벌리고 아쉬운 말 꺼내는 일이 뼈를 깎는 것처럼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험한 세상살이가 어디 내 뜻대로만 굴러갑니까? 살다 보면 피눈물 삼키며 누군가에게 아쉬운 소리를 내뱉어야만 하는 기막힌 순간을 누구나 한 번쯤은 만나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 손에 쥔 돈은 그런 비참한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되도록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 줍니다. 돌아보니 저는 그 굴욕적인 소리를 면해 보겠다고, 그 떳떳한 그늘 아래 숨어 보겠다고 밤낮없이 몸을 부수어가며 일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돈이 만들어 주는 그늘 중에 무엇을 참 좋아하는가 돌아보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궁핍한 이웃들에게 이 넉넉한 그늘을 시원하게 흘려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장 도움이 절실합니다. 손에 쥔 물질이 없어 굶주리고 메말라 갑니다. 정말 당장이라도 숨통을 틔워 주고 싶은데, 내 주머니 사정이 바닥이라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을 때, 이것도 사람 피를 말리는 고통이더란 말입니다. 그런데 손에 쥔 돈은 사랑하는 이들의 메마른 머리 위에 넉넉히 드리워 줄 생명의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작년 12월에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이 불쑥 저를 찾아와 꽤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넸습니다. 대충 헤아려 보아도 그분 월급의 두 배는 족히 넘는 큰돈이었습니다. 그 귀한 돈을 건네며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기도하시면서 보시기에 정말 이 돈이 절실한 분들에게 성탄 선물로 흘려보내 주십시오."
저는 그분의 살림살이가 얼마나 빠듯한지 뻔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사래를 치며 간곡히 말렸습니다. "성도님, 교회에서 성탄 구제 헌금도 선교 헌금도 이미 다 넉넉히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이 돈은 제발 성도님 가정을 위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에 쓰십시오."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목사님, 이 돈은 이미 제 손을 떠났습니다" 하며 뜻을 굽히지 않고는, 봉투를 책상에 툭 던져 놓고 문을 나서 버렸습니다. 결국 제가 그 귀한 돈을 두 손에 받아 안았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굳이 그분 이름을 밝히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행여 곁에 앉은 배우자의 가슴에 깊은 시름이 내려앉을까 염려되어서 그렇습니다. 이런 눈물겨운 미담조차 강단에서 이름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는 현실은, 솔직히 우리 교회가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아직 갈 길이 참 멀다는 뜻입니다.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도 여전히 여러분 눈치를 봅니다. 이 말을 던져도 될까, 혹여 시험에 들지 않을까 가슴을 졸입니다. 한 지체를 진심으로 칭찬하는 일조차 사방 눈치를 살펴 가며 조심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단비내리는교회가 밖에서는 참 훌륭한 교회라는 칭찬을 듣지만, 실상은 아직도 영적인 젖을 떼지 못한 갈 길이 먼 공동체입니다. 저는 지금도 누군가를 세워 줄 때 좌우 눈치를 살핍니다. 어느 집 자식이 세상에서 잘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강단에서 온 마음으로 손뼉을 치다가도, 풀리지 않아 속을 끓이는 다른 집 부모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면 치려던 손뼉을 슬그머니 거둡니다. 지금도 목사인 제가 이렇습니다. 그만큼 우리 모두가 온전한 사랑에 이르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먼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그 거룩한 물질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데, 문득 한 목사님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그 목사님은 경기도 거친 바닥에서 청소년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시는 분입니다. 꼬박 십 년 세월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통기타 하나 둘러메고 거리에 서서, 찬양을 부르며 복음을 외치고 방황하는 아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던 분입니다. 온갖 가난과 뼈아픈 고난 속에서도 그 고독한 사역을 십 년 넘게 버텨 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그 목사님을 광주로 불렀습니다. 해남 한우집 협찬을 받아 기름진 소고기를 배불리 대접한 뒤, 그 두툼한 돈 봉투를 목사님 손에 쥐여 드리며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목사님, 이 돈은 우리 교회에서도 하루하루 힘겹게 땀 흘려 일하는 성도님이 피눈물로 바친 돈입니다. 내가 알기로 그분 두 달치 피 같은 월급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돈을 손에 쥐는 순간, 제 머릿속에 딱 한 사람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바로 목사님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작정 연락을 드린 것입니다."
그 봉투가 제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눈물겨운 사연을 다 털어놓은 뒤, 제가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목사님을 이토록 지독하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돈이 들어왔을 때 단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는데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었을 만큼, 성도 얼굴도 모르고 이름 석 자도 모르는 먼 곳의 목사를 불러 이 물질을 쥐여 주실 만큼, 하나님은 당신을 눈동자처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거친 길바닥을 누비던 목사님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 목사님이 왜 제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겠습니까? 그 손에 쥐어진 돈이 한낱 종잇조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타는 듯한 인생의 광야 한복판에서, 지친 영혼의 숨통을 틔워 주시는 하나님의 서늘한 그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펼쳐 주신 그늘 아래서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를 만났기에, 맺혔던 눈물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돈은 이처럼 우리 인생길에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솔로몬이 왜 지혜를 두고 유산 같이 아름답다고 노래했겠습니까? 바로 이처럼 누군가를 살려내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자, 여기까지 말씀을 나눴으니 이제 여러분 가슴에 이런 질문 하나 툭 던져도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더러 두 그늘 중에 딱 하나만 고르라면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지혜의 서늘한 그늘 아래서 휴가를 보내시겠습니까, 아니면 돈이 척척 만들어 주는 두둑한 그늘 아래서 휴가를 즐기시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둘 중 딱 하나만 고르라면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아 보십시오.
뭐라고요?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거룩한 소리를 하셔야지요.
주일 예배 자리에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말씀의 그늘, 가슴을 울리는 찬양의 그늘이 있습니다. 반면에 오늘 이 예배 자리에 나오지 않고 눈 딱 감으면 내 손에 현찰 천만 원이 떨어지는 그늘이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교회 안 나가면 당장 생돈 천만 원이 생깁니다. 천만 원이면 꽤 넓고 든든한 그늘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교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그 천만 원은 공중으로 흩어집니다.
그 대신 내 손에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세상 돈을 거절했다는 영적인 그늘, 내가 주님을 더 사랑했다는 그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그늘, 사랑하는 지체들을 마주하는 그늘,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그늘입니다. 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시겠습니까?
솔직히 돈 쪽으로 몸이 기울지 않습니까? 저 역시 그렇게 양자택일을 하라고 들이밀면, 오늘 주일 설교는 김영성 목사님께 부탁드리고 당장 천만 원짜리 그늘을 찾으러 튀어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아, 이거 받아서 선교비로 쓰면 되지 않습니까" 하고 거룩하게 위장까지 칠 것 같습니다.
우리는 뼛속까지 본능적으로 돈의 그늘을 좋아합니다. 눈앞에 목돈이 굴러들어 온다는데 그걸 매몰차게 거절할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평소에 별 대단치 않은 일에도 예배 자리를 얼마나 쉽게 비워 버립니까? 목사인 저 역시 타이틀 떼어놓고 목사만 아니었다면 슬그머니 빠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닐 텐데, 목사 완장을 차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것 아닙니까? 기회만 닿는다면, 내 손에 확실한 이익과 물질이 쥐어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그늘보다 돈이 만들어 주는 달콤한 그늘을 넙죽 집어삼키는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전도자는 단호하게 지혜가 만드는 그늘의 손을 들어 줍니다. 돈의 그늘과 지혜의 그늘을 나란히 저울 위에 올려놓고는, 망설임 없이 지혜의 그늘 쪽으로 기웁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참으로 명쾌하게 밝힙니다. 바로 지혜가 그 지혜 있는 자를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지혜 있는 자가 돈의 그늘보다 지혜의 그늘을 기어이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혜만이 그 사람의 영혼과 인생을 끝끝내 살려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살린다'는 말은 그저 밥숟가락 뜨며 숨 쉬고 살아남는 단순한 생존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을 진짜 제대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지혜가 사람을 살린다는 것은, 어떤 처지와 형편 속에서도 비굴하지 않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게 한다는 말입니다. 썩어 냄새나는 세상 한복판에서 그리스도의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살게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이 온전하게 서서 걸어갈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해 준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솔로몬은 오늘 지혜의 손을 번쩍 들어 올렸지만, 결코 돈이 지닌 현실적인 힘과 가치를 함부로 깎아내리거나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돈의 유익을 인정하고 칭송했습니다. 돈이 우리 팍팍한 삶에 서늘한 그늘막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긍정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동시에 돈이 가진 치명적인 한계선이 어디까지인가를 똑똑히 짚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 인생에 엄청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돈이 가진 분명한 한계선을 똑똑히 보라고 경고합니다. 돈이 드리워 주는 그늘은 마치 요나의 머리 위에 솟아올랐던 박넝쿨과 꼭 같습니다.
그 무성하던 박넝쿨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찮은 벌레 한 마리가 뿌리를 갉아먹자마자, 하루아침에 모조리 시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돈이 제아무리 대단한 그늘을 만들어 준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 한 마리만 인생에 기어들어 오면, 우리가 돈으로 애써 쌓아 올린 그 거대한 그늘막은 순식간에 맥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한계가 빤히 정해져 있는 그늘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만들어 내는 그늘은 예외 없이 유통기한이 찍혀 있는 그늘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쓴맛 단맛을 다 보았던 전도자의 솔직한 탄식이요, 뼈아픈 고백입니다. 내가 천하의 부귀영화를 다 누려보고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았더니, 돈의 그늘이란 고작 이것뿐이더라는 피맺힌 선언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참 기이한 광경을 자주 마주합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인생의 살인적인 뙤약볕 속에서도 기형적일 만큼 무너지지 않는 성도들을 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인생에 살을 에는 폭염과 광풍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잠시 휘청거리는 듯싶다가도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곧장 돌아옵니다. 도대체 저 기가 막힌 고난 속에서 어떻게 저토록 의연할 수 있을까, 혀를 내두를 만큼 어떤 폭풍우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예외 없이 뚜렷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어떤 인생이기에 저토록 견고한가, 제가 목회 현장에서 뼈저리게 확인해 보았습니다.
이분들은 틈만 나면 말씀의 서늘한 그늘 아래 엎드려 쉬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앞에, 십자가의 든든한 그늘 아래 머물기를 사모하는 자들은 인생의 사나운 폭풍우가 덮치고 타는 듯한 폭양이 내리쬘지라도 결코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손수 드리워 주시는 서늘한 영적 그늘 아래 늘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인간의 악착같은 오기나 타고난 배짱으로 버텨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절대적인 그늘 아래서 영혼을 적시고 하늘의 회복을 맛보았기에, 세상 어떤 불볕더위를 만난다 해도 넉넉히 털고 일어서는 것입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그가 가진 천하의 지식으로 찬란한 당대 문명을 세웠지만, 지금 그 화려했던 것들이 어디에 남아 있습니까? 그가 공들여 지은 성전도, 화려한 궁궐도 모조리 흙먼지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솔로몬이 하나님께 받아 가르치고 흘려보낸 하늘의 지혜는 어떻습니까?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메마른 수억만 영혼들에게 끝없는 생명의 그늘막이 되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결국 지혜가 이긴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잔지식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가 최후 승리를 거둔다는 말입니다.
자식 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여러분, 단순한 지식의 시대가 이미 끝장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지식을 욱여넣는 시대의 막은 이미 내렸습니다. 지금까지는 남보다 정보 하나 더 많이 쥐고 외우는 자가 앞서가던 지식의 세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쏟아지는 방대한 인공지능과 정보를 어떻게 다루고 분별할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오직 지혜에 달려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식을 머리에 잔뜩 채운 아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로 무장한 아이들이 앞으로 이 거친 세상을 이끌고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헛된 지식을 쌓으려고 애태우지 마시고, 하늘의 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지혜를 눈물로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솔로몬은 돈의 그늘도 우리 삶에 유익한 면이 참 많지만, 지혜가 빚어내는 그늘과는 감히 견줄 수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런 다음 13절과 14절에 이르러 지혜가 과연 무슨 일을 하는지, 지혜의 속살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명확하게 짚어 냅니다.
전도서 7:1313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전도자는 단호하게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응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그 거룩한 역사 자체가 곧 지혜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보고 살아갑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이 이루신 역사를 보며 사는 인생이 극히 드뭅니다. 온통 자기가 벌여놓은 일만 쳐다보고 삽니다. 내가 이만큼 해냈다며 자기가 한 일만 뚫어져라 보고 살아갑니다. 거기서 오지랖이 좀 더 넓은 인간들은 남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고, 저 인간이 나한테 어떻게 대했나 그것만 곱씹으며 살아갑니다.
성경이 정의하는 참된 지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지난날 행하신 일을 똑똑히 기억하며 사는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행하실 그 위대한 일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먼 자들은 어떻습니까? 주야장천 자기가 한 일만 헤아리고, 앞으로 자기가 할 일만 계산합니다. 남이 한 일에 배 아파하고, 남이 할 일에 삿대질하며 인생을 낭비합니다. 성경은 이런 인생을 두고 가차 없이 '미련한 자'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이 내가 한 일과 남이 한 짓만 쳐다보고 살면, 생각의 궤적이 뻔한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일이 조금만 잘 풀려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갑니다. 내가 똑똑해서, 내 수완이 좋아서 이렇게 성공했다고 교만을 떱니다. 반대로 일이 꼬이고 틀어지면 어떻습니까? 다 내 탓이라며 방구석에 틀어박혀 스스로를 자학합니다.
여기서 한 술 더 뜨는 악한 자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저 인간 탓이다. 저 인간 잘못 만나서 내 인생이 이 꼴이 났다." 손가락질하며 남을 향해 살기를 내뿜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은 영락없는 마귀의 짓거리요, 마귀가 뿌려대는 더러운 덫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보지 않고, 내 주머니만 내려다보고, 눈앞의 사람만 흘겨보며 사는 인생의 종착역은 늘 똑같습니다. 잘되면 지가 잘나서 그렇고, 망하면 남 탓입니다. 끝없이 남을 저주하다가 결국 자기 영혼까지 갉아먹는 자해로 끝을 맺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완전히 잃어버린 자들, 살아 계신 하나님의 통치를 보지 못하는 영적 장님들에게 어김없이 나타나는 멸망의 증후군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혜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러러보고 산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내 꼬락서니의 어떠함이 아닙니다. 내 곁에 선 사람들의 못난 어떠함도 아닙니다.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어떠하심만을 응시하며 사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죽는 날까지 나의 어떠함, 남의 어떠함만 내려다보고 흘겨보며 인생을 허비합니다.
제가 이 똑같은 메시지를 강단에서 지금 20년째 피를 토하듯 외치고 있습니다. 솔직히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려니 저 스스로도 참 징글징글합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뿌리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삶의 민낯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지, 아니면 그저 나 하나에 갇혀 사는지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오늘 본문에서 정색하며 선포하는 핵심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사는 것, 그것이 지혜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 경건한 떨림이야말로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자 근본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딴청 피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똑바로 쳐다보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하나님이라는 렌즈를 통해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내 곁의 이웃도 하나님을 통과하여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라는 거룩한 창을 통해 나를 비추어 보아야 비로소 추악하고 부끄러운 진짜 내 본모습이 정직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통해 저 얄미운 이웃을 들여다보아야, 저 사람의 모진 악함이 실상은 악해서가 아니라 죄에 찌들어 허덕이는 가련한 '약함'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게도 하나님의 어떠하심은 까맣게 잊은 채 살아갑니다. 밤낮없이 내 알량한 어떠함, 저 인간의 괘씸한 어떠함에만 매달려 아귀다툼을 벌이니, 우리네 인생살이가, 날마다 살아가는 마음속이 잿빛 지옥으로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14절에서 이어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전도서 7:141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보십시오. 형통과 곤고는 낮과 밤처럼 이 세상에 언제나 함께 존재합니다.
내 삶에 곤고가 찾아왔을 때, 내 기도가 부족해서 매를 맞는 것이 아닙니다. 내 손에 형통이 쥐어졌을 때, 내가 하나님 앞에 남보다 순종을 빼어나게 잘해서 보상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순종을 잘했든 기도가 부족했든 그런 알량한 계산과 상관없이, 우리네 인생길에는 형통과 곤고가 낮과 밤처럼 끊임없이 맞물려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둘을 나란히 병행하게 만들어 놓으셨다고 성경이 똑똑히 증언하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이상한 인과응보의 잣대를 들이대며 내 환경을 입맛대로 뜯어고치려 하지 마십시오. 형통과 곤고는 내가 잘났다고 찾아오고 못났다고 비켜 가는 자판기식 원리가 아닙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이 교차하듯 형통과 곤고가 한 호흡으로 공존하도록 우리 인생에 허락하셨습니다. 천하의 예수를 아무리 잘 믿어도, 곤고라는 불청객에서 면제되는 특권 따위는 없습니다.
저 역시 오랫동안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예수만 악착같이 잘 믿으면 인생의 모든 곤고에서 면제받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나님 마음에 들어보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애를 쓰면 쓸수록 더 혹독한 곤고가 밀려오더군요. "하나님, 이게 도대체 무슨 꼴입니까?" 피를 토하듯 묻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고난의 면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제 뼈에 새겨 가르쳐 주시려고 그러셨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된 것입니다.
곤고와 형통은 하나님께서 친히 짝을 지어, 가장 정확한 때에 우리 인생의 안마당으로 들여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태어나 죽을 때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형통의 꽃길만 걸어간 인생은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반대로 평생토록 칠흑 같은 어둠의 터널에만 갇혀 살다 끝나는 인생도 없습니다. 혹시 지금 캄캄한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저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일 뿐입니다. 영원히 갇힌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통이라는 날줄과 곤고라는 씨줄을 가지고, 마치 거룩한 직물을 짜 내려가듯 우리 인생이라는 한 편의 베를 정교하게 짜 가십니다. 우리는 지금 내가 밟고 있는 바닥이 왜 이리 험한지 영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은 지금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직물을 짜 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가 무엇입니까? 내 인생길에 낮이 오면 밤도 올 수 있고, 곤고와 형통이 언제든 내 문지방을 넘나들 수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겸허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우리에게 정색하고 권면합니다. 형통한 날이 오거든 마음껏 기뻐하라.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형통은 내가 뭘 잘해서 얻어낸 삯이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가 날마다 헛짓하고 잘못해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분에 넘치는 형통의 날들을 은혜로 쏟아부어 주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그 눈부신 형통의 날을 마주했을 때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기뻐 뛰노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뼈아픈 곤고의 날이 찾아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되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내 걸음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곱씹을수록 기가 막히게 깊은 말씀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고스란히 담아낸 절대적인 진리입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그런데 전도자가 이토록 명쾌하게 인생의 길을 열어 주었건만, 오늘 저와 여러분은 매일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대부분은 정반대로 살아갑니다. 형통한 날이 찾아오면 마치 제 능력으로 이룬 양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 버립니다. 그 형통 앞에서 감사와 감격으로 기뻐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차려주신 천국 잔치가 벌어지는데, 기뻐하기는커녕 무덤덤하게 제 배만 불립니다.
그러다가 살을 에는 곤고한 날이 불쑥 닥치면 어떻습니까? 온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자기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호들갑을 떱니다. 지독한 원망과 낙심의 수렁에 빠져 어두컴컴한 자기만의 동굴 속으로 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걸어 버립니다. "하나님,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나한테 이따위 일을 허락하십니까?" 삿대질하며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비참한 민낯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형통한 날'은 과연 어떤 날입니까? 우리는 대체 어떤 날을 두고 형통하다고 말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저 재수 좋은 날이라고 부릅니다. 횡재하고 수지맞은 날이 형통한 날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내가 바라고 원하던 일들이 내 뜻대로 척척 풀리는 날을 형통한 날이라 여깁니다. 날마다 그런 날만 오기를 학수고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저는 언젠가부터 깊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형통한 날이 어떤 날인가? 곱씹을수록 형통한 날이란 내가 꿈꾸던 욕망이 이루어진 날이 아니라, 내 삶에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은 그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언가 대단한 대박이 터진 날이 아닙니다. 아무런 불길한 일도 터지지 않고 조용히 흘러간 평범한 일상, 바로 이 하루가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형통이겠구나 깨달아진 것입니다. 우리를 목숨처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형통을 부어주셨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현실을 둘러보면 우리가 바라는 식의 형통을 거머쥔 성도는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매일 형통하게 이끄셨다고 하는데 도대체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 아무런 재앙도 없이 무탈하게 지나간 이 평범한 하루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형통의 날이었구나, 비로소 무릎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 취업준비생이 각고의 노력 끝에 행정고시에 떡하니 붙었습니다. 좋은 날입니까? 당연히 좋은 날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벅찼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혼자 애태우며 짝사랑하던 여인에게서 먼저 만나자는 연락이 왔습니다. "오래전부터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고백까지 받아냈습니다. 꿩 먹고 알 먹고 아닙니까? 고시 패스한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인데, 그토록 사모하던 사람까지 내 품에 안겼으니 얼마나 날아갈 듯했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셋째 날 아침 눈을 떴더니, 손에 쥔 복권이 자그마치 삼백억짜리 일등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이 청년이 심장마비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답니다.
물론 제가 여러분 웃으시라고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마냥 황당한 농담만은 아닙니다. 언젠가 한 저명한 의사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한 말이 제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하루에 복권이 당첨되고, 이튿날 초고속 승진 통보를 받고, 사흘째 되는 날 자녀가 서울대에 덜컥 붙는 식의 엄청난 대박 행운이 며칠 연달아 쏟아지면, 사람은 딱 일주일을 못 넘기고 다 죽는답니다. 사람의 연약한 심장은 그런 격렬한 충격과 자극을 도무지 버텨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자극이 연거푸 때려 박히면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린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런 사고도 터지지 않는 이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가슴 깊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감사는커녕 그저 지루하다며 매일의 하루를 당연하게 낭비해 버립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미련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 탈 없이 평탄하게 지나간 그 하루가, 하나님이 내 목숨을 붙들어 주신 기적 같은 형통의 날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도대체 언제 깨닫습니까?
기어이 사달이 나서 그 평범했던 일상이 와장창 깨어질 때입니다. 애지중지하던 자식 녀석에게 덜컥 큰 문제가 터지든, 멀쩡하던 내 몸뚱이에 몹쓸 암 덩어리가 발견되든, 밥벌이하던 사업장이 한순간에 곤두박질치든, 물 한 모금을 삼켜도 소화를 못 시켜 위장이 타들어 가는 지옥 같은 고통이 닥칠 때입니다. 그 잔인한 곤고함이 안방까지 들이닥칠 때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끙끙 앓으며, 그때서야 땅을 치고 통곡합니다. "아, 지난 세월 내 발로 걸어 다니고 내 손으로 밥숟가락 뜨던 그 모든 평범한 날들이, 하나님이 베푸신 어마어마한 형통이었구나." 그제야 피눈물을 흘리며 그 평범했던 하루를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매 순간 하나님의 눈부신 형통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눈을 비비고 일어나 교회에 모여 서로의 얼굴을 마주합니다. 함께 목청껏 하나님을 찬양하고, 숟가락 부딪히며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고, 실없는 농담에 소리 내어 웃습니다. 이 평범하고 고요한 하루야말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 값으로 우리 품에 안겨주신 가장 찬란한 보물 같은 형통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 한복판에 이 형통의 선물을 날마다 배달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기적을 다 받아 누리고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 손에 쥐여주신 이 평범한 형통을 진짜 하늘의 잔치로 꽃피우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으시며, 오늘 우리를 향해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기뻐하라, 기뻐하라."
그런데 여기서 "기뻐하라"는 말씀은 결코 찰나의 기분에 취해 낄낄거리는 가벼운 유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성경이 명령하는 이 거룩한 기쁨 한가운데 두 가지 핵심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감사'요, 다른 하나는 '경탄'입니다. 감탄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짜 기쁨은 깊은 감사요, 턱이 빠질 듯한 경탄입니다.
눈에 띄지 않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알아채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저 허락된 이 평탄한 하루, 아무런 포격도 없는 이 평화로운 하루를 부어주신 하나님을 향해 엎드려 감사하고 경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란이나 저 전쟁터 한복판에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그 잿더미 속에서 어린아이들 품에 안고 살아가는 부모의 삶은 그 자체로 생지옥 아니겠습니까?
이 평범한 하루, 무탈한 하루가 오직 하늘의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손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적 같은 하루를 마주하고도 춤추며 기뻐하기는커녕, 지극히 당연한 제 권리인 양 받아먹습니다. 한 술 더 뜨는 미련한 인간들은 입만 열면 온갖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며, 하나님이 주신 보물 같은 오늘을 제 손으로 난도질해 버립니다.
목사인 저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했는데, 고마워하는 기색조차 없이 심드렁하면 솔직히 다시는 밥 한 끼 사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옹졸한 본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매일 이 거룩한 하루를 공짜 취급하고 당연시하는데도, 지치지도 않으시고 끝도 없이 또 다른 오늘을 배달해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우리 삶에 살을 에는 궁핍과 곤고를 반드시 밀어 넣으셔야만 합니다. 그 곤고의 철퇴를 맞지 않고서는, 인간은 이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눈물겨운 은혜인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평범한 일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깊이 호흡하고 누리며, 그분이 행하신 일에 넋을 잃고 감탄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이 오늘 아침 식탁에 둘러앉게 하신 은혜, 서로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마주 보게 하신 기적, 숟가락으로 따뜻한 밥을 떠먹게 하시고,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게 하시고, 내 품에 따스한 온기를 안아보게 하신 것, 창밖으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을 보고 토닥토닥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이 하루.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기적 같은 일상을 마주하며 가슴 벅차게 감사하고 경탄할 때, 비로소 우리의 하루는 하늘의 빛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매 순간을 감격으로 살아내는 것, 성경은 그것을 두고 '지혜'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내 아이를 위해 빵에 노란 버터를 발라주고, 저녁이면 이부자리를 탈탈 털어 곱게 펴 주는 그 손길이 얼마나 거룩하고 경이로운 일인지를 너무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내 새끼 입에 들어갈 빵에 버터를 정성스레 발라주는 일,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내 배우자가 편히 누울 요를 한번 털어 바닥에 정갈하게 깔아주는 일, 이것이 얼마나 온몸이 떨리도록 복되고 경이로운 축복인지 우리는 자꾸만 까먹습니다.
"아이를 위해 빵에 버터를 바르고 이부자리를 펴 주는 일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우리는 자꾸 잊어버린다."
알랭 드 보통
이 멋들어진 문장은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유명한 작가가 남긴 통찰입니다. 혹시라도 강단에서 우리 목사님 참 문학적이고 멋진 말 한다고 쓸데없이 칭찬하실까 봐 솔직하게 출처를 밝힙니다.
어찌 되었든 우리네 일상에서 매일같이 일어나는 이 작고 사소한 순간들을 경외의 눈빛으로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으십니다. "그래, 네가 진짜 믿음이 좋구나. 네가 뜬구름 잡지 않고 진짜 믿음으로 하루를 살아내는구나." 칭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참된 동행이요, 날마다 숨 쉬는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행복은 주머니에 잔뜩 쑤셔 넣고 가진 자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감사할 줄 알고, 일상을 보며 턱 빠지게 감탄할 줄 아는 거룩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제발 하나님 보좌를 흔들며 그놈의 행복 좀 달라고 떼쓰지 마십시오. 이미 내 발밑에 쏟아부어 주신 하나님의 행복을 똑똑히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열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기도의 수준이 곧 그 사람의 신앙 수준입니다. 헛된 것을 구하지 말고, 일상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형통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령한 눈을 열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전도자는 마지막으로 곤고한 날을 만나거든 무엇을 하라고 엄히 명합니까? 되돌아보라고 외칩니다.
뼈아픈 곤고의 날을 마주했을 때 보통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냅니까? 제가 곁에서 지켜보니 영락없이 이렇게 흘러갑니다. 곤고한 날이 발목을 딱 잡는 순간,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재앙이 닥치는가? 이게 누구 때문인가? 저 인간 때문인가?" 온갖 원망을 쏟아내며 자기 비하에 빠지고 남 탓하기에 혈안이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에 곤고가 닥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되돌아보고 잠잠히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 멱살을 잡을까 탓하기에 바빠 죽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는 우리를 향해 뭐라고 단언합니까? 곤고한 날을 만나거든 눈앞의 참담한 상황에 함몰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사람 쳐다보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선 내 영혼의 적나라한 꼬락서니를 똑똑히 응시하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왜 하필 자신을 돌아보라고 명령했을까요? 그 정직한 돌아봄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을 비로소 깊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을 에는 곤고한 날을 통과할 때, 무릎 꿇고 자기를 돌아보며 깊고 웅장한 신앙인으로 빚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대로 밤낮없이 남 탓하고 환경 탓하다가 속절없이 망가져 패가망신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이 찾아오는 곤고한 날이지만, 어떤 인생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감탄을 빚어내고, 어떤 인생에게는 뼈를 깎는 지옥 같은 한탄만을 남깁니다.
저는 결코 고난을 거룩하게 미화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고난 그 자체는 쓰디쓰고 아픈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바닥을 치는 처절한 실패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고통 속에 허덕이는 다른 이웃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리가 만무합니다. 미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목사인 저 역시 고난받는 것 죽기보다 싫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가정에 고난이 들이닥치는 꼴은 더더욱 보기 싫습니다.
그러나 곤고의 가시밭길을 통과해 보지 않은 인생은, 벼랑 끝에 선 다른 사람의 아픔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슴이 뜯겨 나가는 상실의 피눈물을 흘려보지 않은 자는, 비통한 상실의 수렁에 빠진 지체를 결코 품어 안고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백 퍼센트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사람의 어설픈 충고는 위로는커녕, 듣는 사람의 숨통을 조이고 기운을 쏙 빼놓습니다. 피눈물 나는 고통을 통과하지 못해 하나님 앞의 '상처 입은 치유자'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 쏟아내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기만이며 듣는 이에겐 그저 역겨운 자기 자랑질에 불과할 뿐입니다.
저는 본문 14절의 말씀을 이렇게도 풀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알랭 드 보통이 아니라 제가 한 말입니다.
형통한 날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턱이 빠질 듯 감탄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고 무릎 꿇어 감사하는 법을 배우는 날입니다. 그리고 곤고한 날에는 도대체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한 줌 흙에 불과한 인간 실존이 무엇인지, 내 연약한 인생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뼈에 새기며 배우는 날입니다. 이 두 가지를 제대로 배워내야 비로소 우리는 비바람 앞에서도 요동치 않는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손에 형통의 날이 쥐어졌는데도 그 안에서 거룩한 기쁨과 감사를 배우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인간은 어김없이 제 잘난 맛에 취해 목을 꼿꼿이 세웁니다. 교만의 극치를 달리며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쳐 버립니다. 반대로 뼈아픈 곤고의 날을 통과하면서도 인생의 유한함을 깨닫지 못하고 벌거벗은 내 영혼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평생토록 곁에 선 사람만 물어뜯고,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며 분통만 터뜨리다가 제 영혼을 지옥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오늘 전도자가 우리 가슴에 박아준 이 생명의 말씀을 마지막 권면으로 여러분에게 던집니다.
형통한 날에는 하나님을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이것이 참된 신앙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입니다. 여러분, 지금 형통한 날을 지나고 계십니까? 솔직히 오늘 숨 쉬고 발 딛고 선 저와 여러분의 삶은 대체로 다 눈부신 형통의 날들 아닙니까? 이 평범하고 찬란한 형통의 날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쁨을 찾아내어 온몸으로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기뻐하십시오.
그리고 살을 에는 곤고한 날이 찾아오거든, 사람 탓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적나라한 내 꼬락서니를 정직하게 응시하십시오.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배움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리하여 세상의 돈이 만들어 내는 유통기한 있는 그늘이 아니라, 영원토록 쇠하지 않는 하늘의 참된 지혜의 그늘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의 전 생애를 넉넉하고 푸르게 덮어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귀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