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처방전을 쓰기 전에 오늘 본문을 펼치면 참 묘한 장면을 마주합니다. "행복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 절박한 물음 앞에서, 전도자 코헬렛은 화려한 행복의 청사진을 먼저 내놓지 않습니다. 거꾸로 불행의 바닥부터 우리 눈앞에 날것 그대로 펼쳐 놓습니다.
마치 명의가 칼을 대기 전, 환자의 환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진짜 행복이라는 처방전을 쓰기 전에, 인생을 갉아먹는 불행의 증상부터 낱낱이 파헤치는 것입니다.
전도자가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취하겠습니까? 가짜에 속지 않고 불행의 실체를 똑똑히 마주해야, 비로소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행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절에서 전도자는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해 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을 짓누르는 참으로 무거운 불행을 보았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절에서 그 불행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전도서 6:22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한 사람이 평생을 바라던 재물과 부요, 그리고 존귀를 다 손에 쥐었습니다.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힌 일은, 그 가운데 단 하나도 제 손으로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모든 것을 엉뚱한 남이 다 누리고 맙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기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자기도 누리지 못하고, 자식에게 물려주지도 못한 채 남의 손에 털리는 것은 하늘이 내리는 가장 가혹한 저주였습니다. 전도자는 지금 그 가장 뼈아픈 인생의 비극을 정면으로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속담 중에도 이 기가 막힌 상황을 꼬집는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죽 쒀서 개 줬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챙긴다."
속담
피땀 흘려 죽도록 고생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정작 누리는 놈은 엉뚱하게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남 좋은 일만 실컷 시키고 빈손으로 끝나는 인생의 헛망함을 우리 옛 조상들도 너무나 잘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 민하가 두 살 때 일입니다. 한 오 년 전쯤 된 것 같습니다. 저희 온 가족이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날 태풍이 불었습니다. 배가 대여섯 시간이나 뜨질 못했습니다. 새벽에 출발했어야 할 배가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항구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다로 나가보니 파도가 보통이 아닙니다. 그 거대한 배가 파도 위에서 사정없이 요동을 칩니다.
그 큰 배가 기우뚱기우뚱 흔들리자, 사람 마음이 참 묘합니다. 불현듯 무슨 생각이 스쳐 지나갔겠습니까?
'이거 배 가라앉는 것 아닌가? 이러다 침몰하는 것 아닌가?'
불길한 생각이 번쩍 듭니다. 그런데 그 생각만으로 끝났다면, 제가 오늘 이 부끄러운 이야기를 여러분 앞에 꺼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잠시 뒤 제 마음 밑바닥에서 아주 기가 막힌 상상이 올라왔습니다.
무슨 생각이었겠습니까?
'만약 지금 이 배가 가라앉아서 내가 죽으면, 내가 평생 일군 이 재산은 다 누가 가져가지? 대체 누구 손으로 다 들어가는 거야?'
제가 대단한 부자는 아닙니다. 그래도 병원에 지분이 좀 있고, 집도 한 채 있습니다. 평생 땀 흘려 일군 내 삶의 수고와 결과물들입니다. 그런데 이 피 같은 소유가 대체 어디로 흘러들어가는지, 그 순간 그게 그렇게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번쩍 들었겠습니까?
그 배 안에 제 재산을 합법적으로 물려받을 아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다음 순서인 손주까지 3대가 다 같이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배가 가라앉으면 우리 가족은 다 천국으로 직행합니다. 그런데 정작 세상에 남아서 내 유산을 챙길 상속자가 단 한 명도 없지 않습니까. 내 핏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계산이 서자, 눈앞이 아찔해지며 진짜 상속자가 누구인지 따져보게 된 것입니다.
그 요동치는 배 안에서 법적 상속 순위를 가만히 따져보았습니다. 일 순위가 바로 제 형님이더군요. 가장 가까운 친척이니, 제 모든 재산을 가장 많이 상속받을 권리가 형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제 재산이 가장 안 갔으면 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 형님입니다. "이 재산이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될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 없이 형님이라고 말할 사람입니다.
제가 형님을 미워해서가 아닙니다. 어릴 적 형님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옹졸하게 구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째째한 사람은 아닙니다.
어쩌면 저는 이 세상에서 우리 형님이 행복해지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늘 그를 축복하는 사람이기에, 형님은 제 평생의 가장 무거운 기도 제목입니다. 제 마음에 형님을 향한 미움은 전혀 없습니다. 오직 불쌍함과 긍휼만 있습니다. 그저 형님이 진심으로 잘되고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지금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면서, 왜 재산 넘어가는 건 그토록 아까워했겠습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 돈을 세상에서 가장 무가치하게 쓸 사람이 우리 형님이기 때문입니다. 헛되게 탕진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내가 피땀 흘려 수고한 이 소중한 돈을 그 손에 고스란히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날 흔들리는 배 안에서, 저는 속으로 단단히 다짐했습니다.
'그래, 돈은 내 손으로 다 쓰고 가자. 싹 다 가치 있게 쓰고 가자.'
그 일이 있고 난 후, 저는 제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부자가 되어라. 네가 가난하면 아버지가 모은 소유를 결국 너한테 다 줄 수밖에 없잖니. 아버지는 네가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만든 재산은 내가 다 쓰고 갈 수 있도록, 아버지 인생 좀 폼나게 해 다오."
아들에게 몇 번이고 말했습니다. 말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아들이 부자가 되게 해 주시고 우리 손주는 거부가 되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다음 세대가 스스로 물질을 흘려보내는 삶을 살게 해 주십시오."
자식들 호의호식하라는 세속적인 욕심으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내 다음 세대에게 경제적인 걱정이 없어야, 내가 땀 흘려 번 돈을 내가 진짜 원하는 가치 있는 곳에 다 쓰고 떠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참 존경하고 좋아하는 김장하 선생이 이런 기가 막힌 말을 남겼습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습니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핍니다.
김장하
돈도 이와 똑같습니다. 주변에 아낌없이 뿌려야 생명의 꽃을 피워내는 법이지, 쥐어싸고 모아두기만 하면 그 돈은 사람을 질식시키는 구린내만 풀풀 풍길 뿐입니다.
가슴을 치는 명언이지 않습니까? 저는 이런 말은 성경 한 귀퉁이에 그대로 넣어도 손색이 없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손에 쥐어지는 모든 재정을 주저 없이 밖으로 흩어버리지 않습니까. 연말 결산을 보면 다들 아시겠지만, 우리는 그 물질을 교회 안에 고이지 않게 세상 밖으로 다 흘려보냅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흘려보냈더니, 그것이 거룩한 거름이 되어서 세계 각국 수많은 영혼들의 가슴속에 복음의 꽃이 피고 구원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는 것을, 여러분이 지금 생생한 간증으로 듣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 전도서 6장 2절에 등장하는 이 비극적인 사람을 가만히 묵상해 보았습니다. 솔로몬은 대체 어떤 인간 군상을 빗대어 말한 것일까.
이 사람은 눈만 뜨면 돈, 돈 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속으로는 밤낮없이 '더 긁어모아야 해, 더 채워야 해, 더 높이 쌓아 올려야 해' 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돈으로 내 안전을 틀어막으려 하고, 돈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고 주인 삼아 살아온 사람. 그러니 그 영혼 밑바닥에서 돈이 썩어가며 뿜어내는 구린내가 진동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돈은 모아야 합니다. 인생의 풍요를 만났을 때, 지혜롭게 곳간을 채워두어야 합니다. 가난하고 곤고한 날은 누구에게나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쌓는 것보다 천 배, 만 배 더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돈을 잘못 쌓는 것입니다. 이 물질이 내 영혼 안에서 잘못 쌓이기 시작하면, 그 썩은 돈이 내 심령을 통째로 썩어 문드러지게 만듭니다.
저는 이 거친 자본주의 사회 한복판에서 그 끔찍한 결말을 뼈저리게 보며 살아왔고, 지금도 날마다 목도합니다. 썩은 돈은 기어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지독한 구린내를 뿜어내고 맙니다.
물질을 거룩하게 흘려보내지 않고, 제대로 쓰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돈이 나를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는 헛된 망상에 빠집니다. 돈으로 위로받으려 하고, 마침내 돈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그때 영혼에 썩은 내가 진동하고 지독한 악취가 솟구치는 것입니다. 심령이 썩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정작 제 코는 마비되어 냄새를 못 맡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악취에 고개를 돌립니다.
돈을 주인 삼은 자의 영혼에서 풍겨 나오는 그 썩은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약자를 향한 갑질과 학대로 나타납니다. 위협과 폭언으로 터져 나옵니다. 돈을 우상 삼은 자들은 끊임없이 남을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겉으로는 '나는 시기 같은 거 안 해' 하고 고상한 척하지만, 실상은 시기와 탐욕에 찌들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과 태도에서는 시기의 냄새, 질투의 냄새, 끝없이 남을 깎아내리는 판단과 정죄의 냄새가 진동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고 짓밟는 그 천박하고 악한 냄새가 사방으로 번집니다. 뼈 시린 냉정함과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움, 그것이 바로 돈이 썩어 문드러질 때 나는 악취입니다.
영혼에서 이런 썩은 내가 진동하는 사람들은, 제아무리 거룩한 종교적 외피를 둘러쓰고 그럴싸하게 위장을 해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자기 자신과 탐욕스러운 돈을 하나님 자리에 앉혀놓고 살아가는 우상 숭배자일 뿐입니다.
고린도후서 2:1515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우리를 향해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들 잘 아시는 구절이지요.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사람에게는 저마다 영혼에서 풍겨 나오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다 각자의 냄새가 납니다.
우리는 보통 누군가의 믿음을 가늠할 때 무엇을 잣대로 삼습니까? 대개 이런 외적인 기준으로 따집니다.
'나는 주일 예배 한 번도 안 빠졌어. 나름대로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꼬박꼬박 내며, 주님 앞에 할 수 있는 도리는 다 하고 살아.'
물론 방금 말씀드린 것들은 대단히 소중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저는 성도의 헌신과 봉사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교회가 어떻게 유지되겠습니까. 참으로 귀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짚어보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나를 그럴싸하게 포장하고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얼마든지 종교적으로 흉내 내고 위장할 수 있는 껍데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믿음의 잣대는 과연 무엇입니까? 내가 지금 어떤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잣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영혼 밑바닥에서 지금 어떤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안에서는 어떤 냄새가 나고 있습니까?
사랑과 기쁨과 용납, 그리고 감사와 겸손과 따뜻함의 향기가 배어 나와서, 누구라도 내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까? 나를 만나고 싶어 하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나누며, 단 몇 분이라도 곁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말끝마다 위협과 무시가 묻어나고, 매사에 날이 서서 판단하고 정죄하며, 차갑고 유아독존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입니까? 정작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발뺌하지만, 속에서 풍기는 그 껄끄러운 악취 때문에 사람들이 슬슬 피하고, 어떻게든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입니까?
여러분 안에서 풍기는 냄새는 과연 어떤 냄새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영혼은 향기를 풍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악취를 풍기고 있습니까?
가만히 있으면 자기 안에서 나는 냄새를 결코 맡지 못합니다. 우리 입 냄새도 스스로는 잘 모르지 않습니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후' 하고 숨을 내쉬어 보아야, 비로소 내 입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 깨닫는 법입니다.
인생의 분주함을 멈추어 서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내 모든 변명을 내려놓고 잠잠히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 비로소 내 안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내 입을 닫지 않으면, 내 영혼에서 냄새가 나는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정작 곁에 있는 사람들은 곁에 가기도 힘들어하는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진짜 믿음은 입술에서 쏟아내는 번지르르한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로 확인되는 것입니다.
내 행동과 말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에서 피어오르는 냄새는 그 어떤 재주로도 틀어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내 신앙이 잘못되어 내 안에 악취가 나기 시작하면, 제아무리 그럴싸하게 위장해도 사람들의 코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거짓말을 해도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아챕니다.
믿음은 입술에서 나오는 언어가 아니라, 영혼의 냄새입니다.
사람의 영혼에서는 기어이 냄새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냄새를 맡지 못하니까, 내 곁에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상처받을까 봐 차마 입 밖으로 말을 안 할 뿐이지,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냄새를 이미 다 맡고 있습니다.
전도서 6장 3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전도서 6:33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백 명의 자녀를 낳고 천 년을 장수하며 어마어마한 재물을 쌓았을지라도, 그 심령 속에 무엇이 없으면 비극이라는 말입니까?
만족함이 없으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만족함이 있으면 사람의 영혼에서 향기가 피어납니다. 그러나 무엇을 쥐어주어도 만족하지 못하면, 그 속에서 썩은 악취가 뿜어져 나온다고 전도자는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우리 영혼은 주님 한 분을 제대로 만날 때, 오직 주님으로 만족할 때 비로소 거룩한 향기를 뿜어냅니다.
하지만 주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만으로는 부족해. 세상의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해.'
내가 바라고 욕심내는 온갖 세상 것들을 속으로 끝없이 쑤셔 넣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하면, 그 영혼에서는 기어이 악취가 진동합니다. 악취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으로 만족하는 심령에서는 감사의 향기, 기쁨의 향기, 평안의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아름다운 생명의 향기가 사방으로 번집니다.
반대로 만족하지 못하면 어떤 냄새가 나겠습니까? 밤낮 남과 비교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썩은 악취를 온 사방에 풍기며 다닙니다. 그것이 탐욕에 눈먼 인간의 적나라한 실상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끝없는 비교가 사라지지 않고,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그 어떤 그럴싸한 변명을 늘어놓아도, 여러분은 지금 주님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전히 주님 외에 다른 썩어질 것들이 더 필요하다고 아우성치는 것입니다.
부부 관계도, 이웃 관계도 이 영적 원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부부가, 이웃이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용납해야 합니다. '너도 연약한 죄인이고 나도 구제 불능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서로에게 만족할 때, 그 관계 속에서 따뜻한 생명의 향기가 번져 나갑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하면, 그 관계는 숨이 턱턱 막히는 악취만 풍길 뿐입니다.
만족은 우리 심령 안에서 영혼의 냄새를 만들어내는 공장입니다.
성경이 자족하라, 만족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를 옭아매는 무거운 율법적 명령이 아닙니다. 자족할 줄 알아야 비로소 네 안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향기가 배어 나온다는 복음의 초대입니다.
내가 처한 형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는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분량과 섭리대로 그 자리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처한 지금의 형편 속에서 감사함으로 자족하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는 공장이 되지만, 끊임없이 불만족하고 투정하면 무엇을 만들어내겠습니까?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는 썩은 공장이 되는 것입니다.
만족이라는 이 짧은 단어는 우리의 영적 생사를 가르는 참으로 무서운 단어입니다.

2절에서 말하는 재물과 부요, 그리고 3절에서 말하는 수많은 자녀와 장수.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목숨 걸고 바라는 대표적인 삼대 복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복을 거저 주겠다고 하면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넘치는 재물과 부요, 줄줄이 낳은 자식들이 번성하고 잘되는 것, 그리고 병 없이 오래 사는 장수. 이것이 인간이 꿈꾸는 가장 완벽한 축복의 조건들입니다.
그런데 전도자 코헬렛은 충격적인 선언을 던집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는 이 삼대 복을 한 손에 다 쥐고도, 사람은 얼마든지 가장 처참하게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복을 다 받아 쥐었을지라도 제 손으로 누리지 못하면, 다시 말해 그 마음에 참된 만족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전도자가 뒤이어 무엇이라 질타합니까? 차라리 햇빛도 보지 못하고 죽은 '낙태된 아이'보다도 못하다고, 가슴을 후벼 파는 가혹한 언어로 찔러대지 않습니까?
여러분, 낙태된 아이가 도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이 땅에서 단 하나의 추억도 쌓지 못한 채 사라진 생명입니다. 세상의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인생의 온기나 감각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차가운 태중에서 어둠 속에 잠시 머물다 흔적도 없이 스러졌습니다. 그래서 고대 사회에서 비참함의 밑바닥을 표현할 때, 바로 이 비유를 끌어온 것입니다.
전도자가 이렇게 서슬 퍼런 극단적인 비유를 들이댄 것은 무슨 복잡한 신학적 이론을 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족함이 없는 인생, 만족을 잃어버린 삶이 얼마나 끔찍하게 비참한지를 우리 뇌리에 못 박아 두려는 것입니다.
내 영혼에 만족이 없다면, 아무리 금송아지를 쌓아두고 살아도 그 인생은 태어나지 않은 아이보다 더 비참한 헛것에 불과합니다. 만족 없는 삶이 그토록 무섭고 잔인하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합니다.
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자식들이 줄줄이 잘 나가며, 남들보다 배나 오래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것으로 인한 자족과 감사를 누리지 못한다면, 그 모든 복은 나를 짓누르는 지독한 형벌이요 피곤함일 뿐입니다.
자식이 얼마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합니까? 그러나 자식에게서 만족과 평안을 누리지 못하면, 자식만큼 내 뼈를 깎아 먹는 피곤한 존재도 없습니다.
지난 금요일 밤에도 제가 잘 아는 사모님 한 분이 늦은 시간에 다급하게 상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사모님의 일이 아니라, 그 교회에 출석하시는 어느 권사님의 기막힌 사연이었습니다.
쉰 살 먹은 딸이 하나 있는데, 이혼을 하고 일 년 전부터 그 시골 교회 어머니 집으로 불쑥 내려와 얹혀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딸이 도무지 대책이 없습니다. 홀로 어렵게 사시는 늙은 어머니에게 기생하며 제멋대로 구는데, 옆에서 지켜보는 목회자도 기가 찰 지경이라는 것입니다.
그 늙으신 권사님이 가슴을 치며 이렇게 울부짖더랍니다.
"목사님, 저 딸년이 아무것도 안 하고 뒹굴거리며 사는데, 저도 형편이 어려워 차상위 계층으로 간신히 버팁니다. 그런데 저 딸과 한집에서 숨 쉬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생지옥입니다. 방문 밖에서 딸아이 숨소리와 말소리만 들려도, 내 수명이 뚝뚝 줄어드는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 자식에게서 만족을 누리지 못하면 자식만큼 뼈를 갉아먹는 고통이 없습니다.
우리는 남들보다 하루라도 더 살아보겠다고 온갖 좋은 음식을 챙겨 먹고 비싼 약을 달고 삽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감사의 만족이 없다면 천 년을 산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만족 없는 천 년의 장수는 천 년 동안 이어지는 끔찍한 저주요 형벌일 뿐입니다.
사람의 영혼은 주어진 은혜에 자족할 때 비로소 거룩한 향기를 뿜어내지만, 만족하지 못하면 끝없는 악취를 풍기며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이 무서운 진리를 결코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매일 밥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밥상을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 사람의 중심이 다 드러납니다. 제 아내 같은 사람은 밥상 앞에만 앉으면 그럽니다. "와, 맛있겠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매일 만나는 이 소박한 밥상 앞에서 진심으로 만족할 때, 그 자리에는 기쁨과 감사의 향기가 진동을 합니다.
얼마 전에 지나가다가 개 한 마리가 밥 먹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습니다. 밥그릇 바닥까지 혓바닥으로 싹싹 핥아먹더군요. 그릇 긁히는 소리가 나는데도 온 마음을 다해 핥아먹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에 덜컥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저 말 못 하는 짐승도 저토록 감사하게 먹는데, 나는 언제 하나님이 주신 밥을 저토록 달게 먹어보았는가. 하나님, 너무 맛있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적이 과연 언제였던가.'
밥상머리에서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입니다. 그 자리에는 거룩한 감사의 냄새가 납니다. 그런데 밥상 앞에서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예수 믿는다는 우리 중에도 그런 이들이 참 많습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멘." 기도 딱 끝내고 눈 뜨자마자 그럽니다. "반찬이 왜 이리 먹을 게 없어?"
앞에 드린 기도 A는 그럴싸한데, 눈 뜨고 튀어나오는 기도 B는 엉망진창입니다. 기도 A와 기도 B가 하나로 이어져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밥상 앞에서 깨작거리고 투정하며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는 사람, 그런 사람과 밥을 먹으면 옆 사람까지 얹히고 위장병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밥 잘 먹고 감사 넘치는 분들과 식사하려 애를 씁니다. 감사 없이 투덜거리는 사람과 마주 앉으면 영혼의 힘이 다 빠집니다. 식탁 앞의 태도가 곧 그 사람의 영적 수준입니다.

여러분, 비록 작은 집에 살아도 만족하는 사람은 입술의 고백부터 다릅니다. "비바람 피할 지붕이 있고, 두 다리 편히 뻗고 잘 수 있는 집이 있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 성도의 집에 들어가 보십시오. 어떤 냄새가 납니까. 그 집안 가득 평안의 향기가 감돕니다.
반면에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입니다. "남들은 서른 평, 마흔 평 넓은 아파트에 잘만 사는데, 우리는 왜 아직도 이 좁아터진 단칸방에 살아야 하나." 그런 집에는 들어서자마자 비교와 시기가 뿜어내는 영적 악취가 진동합니다.
돈을 다루는 태도에서도 그 사람의 영적 냄새가 그대로 풍겨 나옵니다. 수중에 쥔 것이 적어도 "이만큼이라도 주셔서 참 감사하다. 이 돈으로 어려운 이웃에게 밥 한 끼라도 대접할 수 있으니 얼마나 복된가." 나눌 것을 먼저 생각하며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넉넉함의 향기가 납니다. 가진 재물이 많지 않아도, 그 사람 곁에 가면 이상하게 영혼이 부요해지고 넉넉해집니다.
반대로 손에 쥔 것이 많든 적든 끝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나겠습니까. 지독한 인색함의 악취가 납니다. 온갖 탐욕과 욕심의 때가 그 영혼에 더덕더덕 묻어 있는 것입니다. 돈 쓰는 씀씀이와 재물을 다루는 태도만 봐도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영적 체취가 확연히 갈립니다.
잘 들으십시오.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형편'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심령의 '만족'이 냄새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느냐, 만족하지 못하느냐의 싸움입니다. 많이 가진 부자에게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할 줄 아는 성도에게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터져 나옵니다.
인생의 비극은 적게 가진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족할 줄 모르는 메마른 심령에서 모든 파멸과 악취가 피어오릅니다.
몇 년 전, 한 재미교포가 삼십 년 만에 고국을 방문했다가 글 하나를 남겼습니다. 제목이 이렇습니다. 「호강에 초쳐서 사는 대한민국 국민들」. 설교를 준비하다가 그 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내용이 길어 요점만 간추렸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한국에 와 보니 웬만한 동네는 전부 고층 아파트 단지다. 가정집은 물론이고 공중화장실까지, 미국에서는 진짜 부자들만 쓴다는 비데가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다. 대중교통은 카드 한 장이면 다 통하고, 안방에 앉아 치킨과 피자를 손쉽게 배달시켜 먹는다. 어느 집에 가도 도어록 비밀번호나 카드 키 하나로 문이 열린다. 열쇠나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 같은 것은 이미 옛날 물건이 되어 버렸다. 차량마다 블랙박스가 달려 있고, 집안 전등은 LED에, 조명과 가스와 콘센트까지 리모컨 하나로 제어한다. 텔레비전 채널은 수십 개가 쏟아져 나오고, 지하철과 고속철도, 음식점, 심지어 버스 정류장에서도 초고속 와이파이가 저절로 잡힌다. 미국 부촌에서 살아온 나조차도 경이롭고 부러울 지경이다.
"그런데 정작 기이한 것은,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살이가 얼마나 팍팍한지 한탄을 쏟아낸다는 사실이다. 전셋값과 집값이 천정부지라며 아우성이고, 사교육비 때문에 등골이 휜다고 하소연한다. 정치가 한심해서 못 살겠다며, 만나는 이마다 이곳이 생지옥이라고 소리친다. 돈이 없다고 아우성치면서도 부동산과 주식 투자에 뛰어들지 않는 이가 드물고, 고급 외제 차를 몰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 자녀들 과외와 예체능 학원은 기본 코스처럼 시키고 있다.
"연봉이 내 절반도 되지 않는 이들이 나보다 훨씬 값비싼 차를 굴리고, 더 화려한 음식을 먹고, 온갖 고급 제품으로 둘러싸여 살아가는데 도대체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의료보험 혜택과 진료비는 미국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저렴한데, 왜 이 땅의 삶을 지옥이라 부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형 냉장고를 두세 대씩 채워 두고 값비싼 고기와 회를 즐기면서도 끝내 만족을 모르는 내 동포들에게, 지금 절실히 필요한 것은 진정한 안식과 평안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쯤 저 굶주린 북녘 동포를 돌아볼 줄 아는 진짜 부자가 되겠는가."
가슴을 찌르는 글 아닙니까. 호강에 초친 대한민국 사람들. 도대체 호강에 초를 쳤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호강이란 모자람 없이 편리하고 풍요롭게 누리는 삶을 말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초를 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온갖 복을 손에 다 쥐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몰라 그 복을 제 발로 뻥뻥 차버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초란 식초를 뜻합니다. 아무리 기름지고 맛있는 진수성찬이라도, 그 위에 식초를 들이부어 버리면 시어서 입도 못 댑니다. 결국 멀쩡한 음식을 다 버린다는 데서 나온 속담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제 눈에는 왜 이렇게 보일까요. 어찌하여 제 눈에는 여러분이 다 호강에 초친 사람처럼 보입니까. 여러분은 입만 열면 힘들어 죽겠다, 괴로워 죽겠다, 못 살겠다, 삶이 지옥이다 아우성을 치는데, 제 눈에는 왜 여러분이 하나님 복을 발로 차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호강에 초를 치며 살아갑니다.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복을 받았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과 은혜를 값없이 받아 누리면서도, 고작 세상 사람들과 비교해서 생긴 사소한 결핍 하나 때문에 안달복달하며 벌벌 떨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받은 천국을 잊어버리고 세상 찌꺼기에 눈이 멀어 불평하는 삶,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복에 초를 치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가 어떤 복을 받았는지 정녕 아십니까. 아마 까맣게 모르고 살아갈 것입니다.
에베소서 1:3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바로 이 복을 이미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이 말씀의 시제를 똑똑히 보십시오. 과거형입니다. 완료형입니다. 앞으로 주실까 말까 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남김없이 다 주셨다는 선언입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분을 내 인생의 참 주인으로 모신 성도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복이 도대체 어떤 복입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통째로 다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어마어마한 복을 이미 받아 쥐고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예수를 똑바로 믿는 성도는 더 이상 보탤 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더 받을 복이 없습니다. 이미 전부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더 받아내야 성이 차겠습니까.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우리 손에 다 쥐여 주셨는데 말입니다.
진지하게 한번 물어봅시다.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답을 한번 해 보십시오. 도대체 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도대체 손에 쥔 게 뭐가 없어서 불행하다고 아우성을 칩니까. 이것 딱 하나만 손에 쥐어주면 무조건 행복해지겠다고 장담하는 그 물건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또 돈입니까. 또 돈 문제입니까. 정말 여러분, 지금 통장에 돈 꽂아주면 온전히 행복해질 자신 있습니까. 지금 가진 것보다, 여러분이 평생 바라는 그 액수만큼 돈을 쏟아부어 주면 정말 행복할 자신이 있습니까. 돈이 넘쳐나면 부부 관계가 저절로 회복되고, 이웃에게 더 넉넉해지고, 더 따뜻하고 향기로운 사람이 될 자신 있습니까. 지금 손에 쥔 작은 것으로도 자족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통장에 돈이 넘쳐나면 더 악착같이 인색해지고 더 흉해질 뿐입니다.
그러면 건강입니까. 몸에 병 하나 없이 건강하기만 하면 마냥 행복할 것 같습니까. 이 자리에도 육신의 질병으로 신음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분들에게 정직하게 한번 물어봅시다. 건강을 되찾으면 정말 영원히 행복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아프기 전에 온몸이 건강할 때는 정녕 행복했습니까. 사지 육신 멀쩡할 때도 감사와 행복을 모른 채 살았던 사람은, 병풍처럼 누워도 행복하지 못하고 몸이 나아도 여전히 불평뿐입니다. 우리는 아플 때마다 '이 지긋지긋한 병만 나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착각합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건강하게 살아갈 때는 그 크신 은혜에 감사 한마디 없었으면서 말입니다.
육신의 고통으로만 치자면 우리 교회에서 김덕진 장로님이 가장 중환자 아닙니까. 그런데 저분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평안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영적 비밀을 도대체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현경 자매도 저 자리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고 먼 길 택시를 대절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예배 전 로비에서 마주쳤는데 제 손을 잡고 이렇게 고백하더군요. "목사님, 오늘 교회에 너무 오고 싶어서 새벽 다섯 시부터 눈 떠서 기다렸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저 자매가, 오직 주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고 싶어서 새벽 다섯 시부터 가슴 졸이며 이 예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남김없이 부어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오늘을 살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34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을 살라는 이 지엄한 말씀을 주신 주님께서,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오늘'이라는 날을 허락하지 않으신 분이 있습니까. 오늘이라는 생명을 다 받아 누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오늘을 선물로 받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이 예배당이 아니라 다 장례식장에 누워 있어야 마땅합니다. 주님께 오늘을 거저 받아서 다 이 자리에 나와 앉아 계신 것 아닙니까.
자, 성도 여러분. 주님이 오늘을 살라 하셨는데, 제가 '오늘'이라는 현실 안에서 정직하게 한번 물어봅시다. 혹시 오늘 당장 입에 풀칠할 양식이 없는 분 계십니까. 점심 저녁으로 오늘 먹을 쌀 한 톨이 없으면 정말 괴롭고 막막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당장 먹을 끼니가 없는 분이 정녕 계십니까. 혹시라도 그런 분이 계시다면 예배 끝나고 당장 저를 찾아오십시오. 점심은 교회에서 대접할 것이고, 저녁은 우리 집에 데려가서 따뜻한 밥 배불리 먹이겠습니다.
오늘 당장 걸치고 나갈 옷이 없는 분 계십니까. 제가 네팔 선교 가려고 옷을 잔뜩 모아두었습니다. 그중에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서 기꺼이 내어드리겠습니다. 남이 입던 헌 옷이라고 섭섭해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도 그 트레이닝복 입고 강단 밖을 활보하고 다닙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해서 안달입니까. 돈이 없다고요. 오늘 당장 생존을 위해 써야 할 돈이 단 한 푼도 없는 분 계십니까. 오늘 꼭 써야 할 긴급한 돈이 없는 분은 저에게 찾아오십시오. 오늘 밤 비바람 피해 잠잘 방 한 칸이 없는 분들도 저를 찾아오십시오. 우리 집 안방이라도 기꺼이 내어드리고 재워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오늘'을 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려면 오늘 먹을 양식만 있으면 족하지 않습니까. 오늘 몸을 가릴 옷 한 벌만 있으면 되고, 오늘 밤 두 다리 뻗고 잘 자리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오늘 먹을 양식이 있고, 입을 옷이 있고, 누워 잘 방이 있습니다. 오늘 함께 사랑을 나눌 성도가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거룩한 교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디 보통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가 무려 강봉규 목사를 보유한 교회 아닙니까. 설교 잘하는 목사는 세상에 널렸을지 몰라도, 설교도 기가 막히게 잘하면서 인물까지 갖춘 목사는 정말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모든 은혜를 주님께 이미 다 공급받았습니다.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라 하셨습니다. 성도는 '오늘'이라는 믿음의 단위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내일 눈을 뜨면, 그 내일이 또 주님이 주신 복된 '오늘'이 됩니다. 주님께서 오늘을 살아갈 호흡과 힘을 매일 아침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일 주어지는 오늘을 주님의 선물처럼 기쁘게 받아 살아가면 그뿐입니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감사함으로 살다가 주님이 부르실 때 눈 감으면, 영원한 천국 영생까지 완벽하게 예비되어 있지 않습니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저 세상 건너가서야 비로소 받는 나중 복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생명과 은혜까지 통째로 다 포함된 복입니다. 주님은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그 복을 전부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어마어마한 하늘의 복을 이미 다 받아 쥐었습니다. 도대체 손에 쥔 게 뭐가 없다고 아무것도 없는 알거지처럼 죽어가는 표정으로 살아갑니까. 어찌하여 주님 앞에서도 도무지 만족할 줄을 모릅니까. 이렇게 크고 놀라운 것을 다 쥐여 주셨는데, 여기서 도대체 무엇을 더 달라고 아우성을 칩니까. 여러분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결핍이란, 결국 여러분의 더러운 욕망과 끝없는 욕심과 시퍼렇게 살아있는 자아가 만들어낸 헛된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그 썩어질 신기루에 눈이 멀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복에 스스로 초를 치고 있는 꼴입니다. 서로 얼굴을 한번 쳐다보십시오. 온통 호강에 초친 얼굴들을 하고 앉아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행복할 상황과 형편이 안 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누릴 영적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꽤 오래전 일입니다. 우리 교회에 출석하던 한 여집사님이 대뜸 저에게 이런 말을 던졌습니다. "목사님, 저도 목사님 같은 분을 남편으로 만났으면 참 행복했을 텐데요." 자기 남편이 바로 옆에 뻔히 서 있는데 그 소리를 해서 제가 얼마나 진땀을 뺐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집사님은 저를 남편으로 만나 살았어도 똑같이 불행했을 가능성이 백 퍼센트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저도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사람입니다. 저도 만년설 같은 인간입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나 은혜롭고 근사해 보이지, 가까이 다가가서 부딪치며 살아보면 뼛속까지 춥고 시리고 아픈 존재입니다. 가까이서 겪어보면 괴롭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멀리서 볼 때만 그럴싸해 보이는 법입니다.
그런데 제 아내는 저와 수십 년을 살면서도 늘 행복해합니다. 제 아내가 저라는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 심령 안에 어떤 환경에서도 행복을 빚어낼 수 있는 '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결혼해서 손에 쥔 것 하나 없이 감옥 같은 다섯 평짜리 단칸방에 살 때도 제 아내는 늘 웃었습니다. 행복에 겨워 날마다 웃었습니다. 입술에서 불평 한마디 나오는 것을 평생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 비좁은 다섯 평, 일곱 평 방 한 칸에 살면서도 얼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젊은 시절 술독에 빠져 살 때, 매일 만취해서 집에 들어오지도 않거나 새벽녘에야 기어들어 올 때도 제 아내는 저를 보며 멋있다고 치켜세워 주었습니다. "당신은 뭔가 남들과 다른 사람이다. 당신은 영혼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 곁에서 자꾸 그렇게 믿어주고 인정해 주니, '아, 내가 진짜로 깊이 있는 인간이 되어야겠구나' 결단하며 인생을 바로잡게 된 것입니다.
그 비참하고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제 아내는 온전히 자족하며 행복해했고, 늘 웃는 얼굴로 남편을 세워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확신합니다. 삼십 대 시절, 술독에 빠져 허우적대던 강봉규와 살면서도 행복을 누려낼 줄 아는 여인이라면, 도덕적으로 파탄 난 악한 인간만 아니라면 세상 어떤 남자를 만났어도 행복하게 살아냈을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의 조건 문제가 아니라, 그 영혼 안에 어떤 형편에서든 감사와 평안을 건져 올리는 영적 실력이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불행한 이유는 세상의 조건과 환경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허락하신 은혜 안에서 자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거룩한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봉규 집사님과 조현숙 집사님이 오늘도 저 먼 대구에서 올라오셨습니다. 대구에서 여기까지 오가려면 왕복 일곱 시간 가까이 운전대를 잡아야 합니다. 대구가 어디 보통 거리입니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매 주일마다 대구에서 여기까지 여섯 시간, 일곱 시간을 꼬박 달려오겠습니까. 인간적인 의리 때문이겠습니까. 의리 따위로는 그렇게 못 합니다. 의리는 얼마 못 가서 바닥이 드러나는 법입니다.
의리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저 두 분 집사님이 황금 같은 주일에 왕복 일곱 시간을 쏟아부으며 달려오는 이유는 단 하나, 예배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고, 가슴 벅찬 찬송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에서 만난 믿음의 동역자들이 참 좋고, 그 거룩한 성도의 교제를 온전히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고 가는 긴 도로 위에서 부부가 서로를 깊이 누리고,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을 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이 찬란한 자연을 누리며 오기 때문입니다. 그 걸음 속에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차고 넘치기 때문에 그 먼 길이 가능한 것입니다. 영혼의 누림이 없다면 의리나 의무감 따위로는 단 몇 주도 버티지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온몸으로 누릴 줄 아는 영적 실력이 있기 때문에, 그 먼 고된 길도 기쁨으로 달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설교 중에 말씀드렸지만, 저는 '빨간 머리 앤'이라는 드라마를 참 좋아합니다. 기억나십니까. 제가 왜 틈만 나면 그 드라마를 다시 찾아보겠습니까. 넷플릭스에서 가끔씩 꺼내 봅니다. 제 영혼이 복잡하고 탁해질 때마다 일부러 찾아봅니다. 왜 꺼내 보는가 하면, 그 드라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제 영혼이 맑게 씻겨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아, 내가 지금 세상 헛된 것에 눈이 팔려 헛짓거리를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 뼈저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삶을 보면서 내 남은 생애를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방향을 다시 한번 심장에 새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빨간 머리 앤이라는 아이는 세상 환경과 조건으로만 따지면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해야 마땅한 아이 아닙니까. 부모도 없습니다. 가진 재산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세상 기준으로 보면 예쁘지도 않고, 손에 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고아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삶을 살아내는 모습을 보면 어떻습니까. 마치 세상을 향해 행복을 선포하러 보냄을 받은 사람 같지 않습니까.
앤이 자기를 거두어 준 양부모와 함께 마차를 타고 광활한 들판을 지나갈 때였습니다. 환희에 찬 목소리로 양부모를 바라보며 이렇게 외칩니다. "저는 가을이 너무 좋아요. 10월이 존재한다는 것이, 이 10월이 있는 세상을 내가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기쁘지 않나요?" 가진 것 하나 없는 고아 소녀가 황량한 들판을 지나가며 양부모에게 그럽니다. 10월이 있고 이 눈부신 가을이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도대체 얼마나 큰 축복이냐고 말입니다. 저는 앤의 그 고백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양부모가 그 순수한 모습을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자, 앤이 또다시 가슴 벅차하며 말을 잇습니다. "10월 하늘에 떠 있는 저 뭉게구름을 볼 수 있고, 저 파란 하늘을 우러러볼 수 있고, 이 서늘한 가을 공기를 내 폐부 깊숙이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 같아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이 따사로운 3월의 봄날을, 이 3월의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저 앤처럼 온몸으로 누리고 계십니까. 오늘 주님 앞에 드리는 이 거룩한 예배가 메마른 영혼을 단숨에 살려내는 생명의 바람처럼 여러분 가슴에 와닿고 있습니까.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또 다 함께 둘러앉아 점심 식사를 나눌 것입니다. 누군가의 땀방울과 희생과 섬김으로 정성껏 차려진 그 밥상 앞에서, 환한 웃음으로 감사하고 자족하며 그 한 끼의 기쁨을 온전히 누리고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호흡하는 지체들, 어쩌다 우연히 마주친 남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핏줄처럼 엮어주신 내 인생의 영적 노다지들 아닙니까. 믿음으로 누리기만 하면 은혜가 쏟아지는 영적 노다지들입니다. 예배 후에 밥 한술을 함께 뜨면서 그렇게 서로의 존재에 만족하고, 서로를 주님이 보내신 최고의 선물처럼 귀하게 누릴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빨간 머리 앤의 심령이 그토록 지혜롭고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맑을 수 있었던 비결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 아이는 '오늘'이라는 하루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받아 온전히 누려낼 줄 아는 실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빨간 머리 앤을 보며 도대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그 아이는 오지 않은 내일을 미리 당겨와 불안에 떨며 오늘을 갉아먹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상처와 결핍을 끄집어내어 오늘을 썩히지도 않았습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의 온갖 염려를 짊어지고 오늘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지나간 과거는 십자가 보혈 안에서 다 끊어내고, 불확실한 미래는 전능하신 주님의 손에 온전히 내어맡기며, 오늘 나에게 허락된 하루를 주님의 선물로 기쁘게 살아냈기 때문에 그 영혼이 그토록 맑고 찬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의 눈만 밝아지면 여러분은 사방 천지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행복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세상 모든 곳이 온통 하나님이 심어두신 행복들입니다.
전영복 시인이 쓴 「수많은 행복들」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간 날 때 꼭 한번 찾아 읽어보십시오. 그 시에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눈을 뜨고 가만히 세상을 바라보니, 행복이란 놈이 저 들판의 꽃처럼 온 천지에 주렁주렁 열려 있다고 노래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끝없는 욕심을 긁어내고, 미움을 걷어내고, 남과 비교하는 시기를 통째로 들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그 완악한 심령 속에 박혀 있는 죄악의 돌멩이들, 그 썩은 악취를 뿜어내는 정욕의 찌꺼기들만 말끔히 걷어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흩뿌려 놓으신 찬란한 보석 같은 은혜들을 날마다 건져 올리게 될 것입니다. 그 소박한 행복들을 매 순간 누리며, 입술만 열면 감사밖에 터져 나오지 않는 진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 도처에 활짝 열려 있는 이 수많은 하늘의 행복들을 믿음의 눈으로 발견하고, 온몸으로 넉넉히 누려내기를 바랍니다. 그 영혼의 누림이 차고 넘쳐서, 마침내 메마른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 흘려보내는 참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