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우리 삶에는 끝내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설명하려 해도 설명되지 않고, 아무리 이유를 찾으려 해도 끝내 답을 얻지 못하는 자리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전도서 3장은 바로 그 자리를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전도서 3장을 보면 '때'라는 말이 스물여덟 번이나 반복됩니다. 전도자는 서로 반대되는 일들을 나란히 놓습니다.
전도서 3:2-82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3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4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5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6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7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8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삶의 양 끝을 오가듯 이 모든 때를 이어 놓으며, 전도자는 우리에게 한 가지를 묻습니다.
이 모든 때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전도서 3장 2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
여러분에게 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태어날 때가 좋습니까, 아니면 죽을 때가 좋습니까? 보통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고들 합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게 낫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전도자 코헬렛은 우리의 상식과 정반대되는 편에 손을 들어 줍니다.
전도서 7:11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도서 7:22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낫고,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낫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읽고 역시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낫구나 하고 단정 지어 버리면, 우리는 허무주의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코헬렛은 전혀 다른 관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아주 깊은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코헬렛은 왜 의도적으로 '죽음'을 끌어들일까요? 전도서가 늘 취하는 방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죽음을 끌어들여 삶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죽음만큼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삶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잔칫집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은근한 비교가 있고, 소리 없는 경쟁이 있으며, 나를 돋보이게 하려는 꾸밈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아는 한 병원 원장님의 자녀가 서울 신라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예식에 비용이 1억 원이 넘게 들었다고 합니다. 잔칫집에는 늘 이렇듯 남들의 눈을 의식하는 과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초상집은 이 모든 부질없는 소란을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실상을 날것 그대로 보여 줍니다.
초상집에 가면 더 잘난 사람도 없고, 더 많이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성취도 그곳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아, 내가 쫓던 것들이 결국 만지면 툭 터지는 비눗방울이었구나. 오색 무지개처럼 눈부셔 보였는데, 손에 쥐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이 준엄한 진실을 우리는 장례식장에서 비로소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더 낫다는 말은 존재의 우열을 가리는 말이 아닙니다. 잔치의 소란함에 가려져 있던 삶의 실상을, 죽음이라는 엄숙한 침묵 속에서 가장 정직하게 발견할 수 있다는 역설적인 선언입니다.
전도서 3장 1절은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이런 식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때를 잘 분별해서 축복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영적인 타이밍을 잘 맞춰서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대비해라.
그러나 코헬렛이 전하고자 하는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혜롭게 때를 분별하라는 조언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하지 않은 수많은 때가 우리 삶에 무조건 찾아온다는 엄연한 사실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영적으로 깨어 있고 분별을 잘한들, 고난의 때가 비껴갑니까? 잘하든 못하든, 인생의 계절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이 유명한 구절이 말하는 것은 '지혜로운 타이밍의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이 애초에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벗어나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얻을 때와 잃을 때, 웃을 때와 울 때. 이 모든 순간은 내가 원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불쑥, 마치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를 맞닥뜨리듯 우리 인생에 주어질 뿐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판단하고 선택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맞이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네가 그렇게 행동하니까 그런 일이 생겼지라며 쉽게 인과관계를 말하지만, 인생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결코 우리의 선택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스스로 창조해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내가 인생을 만든 것 같지만, 사실 인생은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단비내리는교회를 스스로 선택해서 오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 말씀도 좋고, 본질을 추구하는 건강한 교회 같으니 내가 여기 다녀야지 하고 주체적으로 골랐다고 여기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여러분은 모두 이곳으로 떠밀려 오신 것입니다. 내 선택이 아니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떠밀림의 파도가 여러분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을 통해 우리를 여기까지 떠밀어 오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 3장이 보여 주는 것은, 삶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니 균형을 잘 잡으라는 처세술이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이 본문은 우리가 원하는 답을 주는 대신, 우리 삶의 철저한 한계를 그대로 보여 줄 뿐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3:11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쉽게 말해, 사람은 철저히 한계 안에서 살도록 지어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삶의 이유를 다 알려고 합니다. 하나님, 이것만 가르쳐 주십시오. 이 고난의 뜻이 무엇인지 제발 알려만 주십시오 하고 매달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친절하게 다 설명해 주신들, 과연 우리가 알아들을 수나 있겠습니까?
길가에 기어 다니는 지렁이에게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아무리 눈높이를 맞춰 설명한들, 지렁이가 알아듣겠습니까? 하물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광대무변한 일들을, 한낱 피조물인 우리에게 설명해 주신다고 한들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간끼리도 아무리 차근차근 설명해 줘도 도통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천지인데,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인간의 좁은 머리로 어떻게 다 헤아리겠습니까.
설명해 줘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그저 그런 한계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일 뿐입니다.

전도서 3장뿐 아니라 전도서 전체는 인간을 구멍 뚫린 항아리처럼 그려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 채우고 부어도 밑으로 줄줄 새어 버리는 허무한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을 만납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 안의 모든 공허가 사라진다. 믿음이 좋으면 주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아무런 부족함도, 어떤 외로움도 느끼지 않고 살 수 있다.
거짓말입니다.
예수 잘 믿으면 우리 안의 모든 공허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까? 외로움이 완전히 없어집니까?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애초에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 역시 나름대로 치열하게 몸부림치며 주님을 믿고 살아왔지만, 제 안의 공허가 완벽히 채워진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목사로 살아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제 안에는 정체 모를 답답함이 있고,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예배 중에, 혹은 기도 중에 가끔 그 평화를 선물처럼 맛보긴 합니다. 하지만 그 평화가 제 안에 24시간 늘 고여 있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기분이 좋았다가도 어떤 날은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해집니다. 아침에는 마음이 맑았다가 저녁에는 흐려집니다. 어떤 날은 만나는 사람마다 보석처럼 귀하게 보이다가도, 어떤 날은 스치기만 해도 피곤하고 지칩니다. 마음에 감사가 넘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온통 짜증으로 뒤덮이는 날도 있습니다.
이것이 솔직한 제 고백이며, 부인할 수 없는 제 삶의 실상입니다.
지난주일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한 성도님이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가 제 인생 설교였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금세 기분이 좋아져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목사가 틀림없어. 그러고는 한껏 행복해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예배 후에 같이 밥을 먹는데, 그 성도님이 불쑥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말씀도 참 좋았지만, 사실 저번 주 설교가 진짜 최고로 좋았던 것 같아요.
저는 그 한마디에 급격히 우울해졌습니다. 아, 오늘 설교는 별로였다는 뜻이구나. 이렇게 사소한 말 한마디에 기분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증상을 정신의학에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바이폴라 디스오더(Bipolar disorder), 우리말로 하면 조울증입니다. 양극성 장애라고도 하지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우리는 다 조울증을 조금씩 앓고 있습니다.
저와 아주 절친한 정신과 원장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신병이 있느냐 없느냐는 질적인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있느냐는 양적인 문제다.
결국 우리 중에 정신병이 없는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다 저마다의 정신질환을 품고 살아가는데, 그 농도가 얼마나 짙으냐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뉠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들키면 자존심이 상해서 견디지 못합니다. 외모가 못난 사람에게 못났다 하면 성을 내고, 머리가 나쁜 사람에게 둔하다고 하면 몹시 기분 나빠합니다. 평생을 '나'라는 존재를 위장하고 포장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실상을 마주하면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은 스스로를 대단히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전도서 9장 3절은 인간의 상태를 아주 정확하게 폭로합니다.
전도서 9:33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가 다 똑같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폭로하는 우리의 똑같은 모습은 바로 '평생 미친 마음을 품은 채 살다가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저와 여러분을 그렇게 규정합니다.
제가 예전에 이 지구별은 거대한 정신병원 같다고 말씀드렸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독설이나 비유가 아닙니다. 성경의 렌즈로 세상을 보니, 이 땅이 정말 거대한 정신병원과 다름없더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니,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죄인'은 법정 용어입니다. 이 법적 용어를 의학 용어로 바꾸면 무엇이 되겠습니까? 바로 '환자'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다 아픈 환자들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고 정상처럼 보여도, 우리 안에는 온갖 정신질환적인 요소들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꾸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느냐며 자신을 변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존재'이기 이전에, 이미 안으로부터 철저히 '망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본질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아무 이유 없이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까? 도저히 화낼 일이 아닌데도 불같이 화를 내고, 누군가 지나가며 툭 던진 말 한마디를 밤새 곱씹으며 잠 못 이룹니다. 그러다가도 누가 칭찬 한마디 해 주면 이틀 사흘을 들떠서 공중을 부양합니다.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내 마음대로 통제하려 들고, 깨끗이 용서했다면서 정작 받은 상처는 무의식 깊은 곳에 꽉 붙들고 살아갑니다. 저는 이제 다 잊었습니다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교양 있고 단정해 보이지만, 우리 속사람을 들여다보면 온갖 정신적 소음과 비명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자기를 직시한 사람은 바로 이 참담한 실상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나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건강하고 정상입니다라고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아픈 환자입니다. 한계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 없이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습니다라고 떨며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정직한 자기 고백과 한계의 인정이 있는 사람에게만, 마침내 '신약(新藥)'과 '구약(舊藥)'이라는 하나님의 처방전이 유효해집니다.
구약은 우리의 병명이 무엇이며 그 병이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지를 끊임없이 고발하는 책이고, 신약은 도무지 고칠 수 없는 이 불치병을 앓는 우리에게 이 병을 고칠 참된 의사가 딱 한 분 계신다고 소개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약과 구약이라는 두 가지 약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 거대한 정신병원에서 참된 의사 되신 예수께 치료받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내 안의 죄에 대해서는 현미경을 댄 듯 지독하리만치 민감해지는 동시에, 나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는 뼈저리게 통감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이걸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제게 아무도 모르는 비자금 봉투가 하나 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며 얻는 수입 말고, 외부에서 뜻밖에 들어오는 돈을 그 봉투에 따로 모아 둡니다. 오늘도 예배가 끝나고 아흔이 넘으신, 허리가 굽은 집사님이 나가시면서 목사님, 명절 용돈 하세요 하고 봉투를 하나 손에 쥐여 주셨습니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 가족이 감사하다며 놓고 가는 돈도 있고, 상담받으신 분이 건네는 봉투도 있고, 집회에 가서 받는 사례비도 다 그 봉투로 들어갑니다.
저는 그 봉투에 담긴 돈만큼은 개인적인 용도로 절대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을 만나면 흘려보내기도 하고, 성도님들에게 맛있는 밥을 사기도 하는 그런 용도로만 씁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12년이 넘은 제 차를 큰맘 먹고 광택을 내고 유리코팅을 맡겼습니다. 50만 원을 들였더니 정말 새 차처럼 번쩍거려서 기분이 참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이제 그 값을 치러야 하는데, 문득 그 비자금 봉투에서 돈을 꺼내 쓰고 싶은 마음이 고개를 든 것입니다. 결국 봉투를 열어 50만 원을 끄집어냈습니다.
근데 돈을 꺼내 든 순간, 제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손이 왜 이렇게 비루해 보일까요?
아, 이거 참 비루하다 싶어 다시 돈을 봉투에 집어넣었습니다. 하지만 넣고 나니 또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내가 누구랑 약속한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 정한 규칙인데, 이거 너무 율법적인 거 아니야? 내가 수고해서 번 돈을 내 차에 좀 쓰는 게 뭐가 문제야. 교회에서 사례비도 안 주는데 이 정도는 써도 되지. 그래서 다시 50만 원을 꺼냈습니다.
꺼내고 나니 또 가슴 한구석이 찌르르합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 돈을 써야 하나? 내가 참 구질구질하다. 그래서 다시 집어넣었습니다. 그렇게 혼자 방 안에서 50만 원을 넣었다 뺐다, 넣었다 뺐다를 반복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제 이 모습이 어떻게 보입니까? 우리 목사님도 별수 없구나 싶어 비루해 보입니까, 아니면 아, 목사님도 나하고 똑같네 싶어 위안이 되십니까? 저는 바로 이 갈등하는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진짜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아무리 경건한 표정으로 앉아 계셔도, 실상은 여러분이나 저나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여기가 정말 중요합니다. 돈을 넣었다 뺐다 하는 이 행동을 사람의 '경건'이라는 잣대로만 재면 그저 구질구질하고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은 결코 비루함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이 예민한 통증은 연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지금 치료받고 있다는,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약 제가 영적으로 죽어 있는 목사였다면, 50만 원을 망설임 없이 빼서 그냥 쓰고 말았을 것입니다. 내가 번 돈 내가 쓰는데 뭐가 문제야? 하며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겠지요.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건강한 상태가 아니라 마비된 상태입니다. 나의 못남과 한계, 그리고 아픔을 정직하게 느끼는 것, 그 통증이야말로 치료의 시작이고 회복의 신호입니다.
우리는 이 지구별이라는 거대한 정신병원, 그 안의 '시간'이라는 병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입니다.
우리는 언제 퇴원할까요? 우리가 눈을 감고 죽는 날, 바로 그날이 우리의 진짜 퇴원 날입니다.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는 이 완치되지 않은 정신질환적인 요소를 안고, 흔들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 성도들이 진리라고 굳게 믿는 거짓말이 하나 있습니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의심치 않고 붙들고 있는 거짓말,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하면 다 돼.
기도가 부족해서 그래.
결국 기도가 답이야.
우리는 이 거짓말을 너무나 당연한 진리처럼 믿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기도가 무슨 만병통치약입니까? 다들 뜨겁게 기도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무수히 눈물 흘리며 몸부림치며 기도했지만, 정말 기도가 다 답이었습니까?
삶의 모든 문제를 오직 '기도' 하나로만 해결하려는 행태는 결코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이 수천 년간 뿌리박혀 있던 무속신앙과 뒤섞이면서 생긴 왜곡입니다. 복음이 샤머니즘과 짜깁기되어 정체불명의 종교가 탄생했는데, 불행히도 그 정체불명의 종교를 참된 기독교라 믿고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삶의 모든 굴곡을 기도로 해소하려는 태도는 우리 기독교 신앙이 앓고 있는 가장 큰 병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고치기가 참 어렵습니다. 겉보기에는 너무나 믿음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소 주관적인 고백일 수 있지만, 저는 목회 현장에서 뼈저리게 느낍니다. 기도, 기도 하며 매달리는 사람 치고 정말 믿음이 성숙한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기도, 기도 하는 사람 치고 인격과 성품이 훌륭한 사람은 더 못 보았습니다. 기도, 기도 부르짖는 사람 치고 내면이 정말 평안하고 행복한 사람은 더더욱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숙한 신앙은 기도로 내 삶의 모든 골칫거리를 단번에 해결해 버리는 신앙이 아닙니다.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인생의 모호함과 한계 안에서도, 이 모든 형편을 다 아시고 다 보시며 그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묵묵히 신뢰하는 것이 진짜 성숙한 신앙입니다. 그분을 도구 삼아 내 뜻대로 한계를 돌파하려는 태도는 샤머니즘일 뿐,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는 현실을 지워 내는 능력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게 하는 은혜입니다.
기도는 문제를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게 하는 힘입니다. 왜 문제가 문제로 보이지 않게 될까요?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가까워지면, 그분이 내 인생의 한계보다 훨씬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게 됩니다. 나를 가로막고 당장이라도 무너뜨릴 것 같던 철옹성 같은 문제가, 광대하신 하나님 품 안에서 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고 작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도 수많은 아픔과 고통을,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문제를 만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주하는 이런 한계는 결코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도 아니며, 불순종해서 생기는 일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뼈아픈 본질입니다.
아프고 병들었다가도 금세 좋아지고, 힘들다가도 웃고, 또 웃다가도 울며, 사랑하다가도 다투고, 선을 행하다가도 보기 좋게 넘어지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실상입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우리는 이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전도서 3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도서 3:1010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이 힘듦과 고통을 결국 누가 주셨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친히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애쓰게 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이 삶의 무게와 철저한 한계는, 기도가 모자라 찾아온 불행이 아니라 애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라고 이 지혜자는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따져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이런 고달픈 일을 주셨습니까? 그저 좋은 것만 주시면 될 텐데, 왜 굳이 노고와 애씀을 주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라는 종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영혼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르면 절대로 영원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변화산 위에서 베드로가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초막을 짓고 삽시다 했던 것처럼, 그저 살 만하면 우리는 주저앉아 그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암 투병 중인 한 성도님이 이런저런 고통스러운 증상들로 몹시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이런 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아이고 주님, 빨리 오십시오. 이제는 다 귀찮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한계를 처절하게 만날 때에야 비로소 영혼을 들여다봅니다. 내 삶이 아무 걱정 없이 살 만한 동안에는 결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 소망의 눈길을 돌리지 않습니다. 나는 영원에 도무지 눈길이 가지 않는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죄송하지만, 아직 살 만해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한계를 만날 때에야 비로소 그 창문의 손잡이를 붙잡습니다.
인생을 살며 겪는 그 모호함과 답답함, 그리고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은 하나님이 우리를 골탕 먹이고 괴롭히려고 주신 가시가 아닙니다.
우리 영혼이 마침내 이 땅의 안락함을 털어내고 오직 그 영원한 나라, 그분이 계신 존귀한 보좌만을 갈망하게 만들려는 하나님의 눈물겨운 장치이자, 하나님이 베푸신 지혜의 손길입니다.
전도서 3:1111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저는 평생 채워지지 않는 이 갈증과 욕구를 붙들고 몸부림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모든 갈증으로부터 단번에 자유로워지는 신비한 경험했습니다. 바로 C.S. 루이스의 책을 읽다가 마주한 한 구절 덕분이었습니다. 제가 평소에도 자주 소개해 드리는 『순전한 기독교』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내 안에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있다면, 그것은 내가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이 글귀를 읽는 순간, 제 마음에 드리워져 있던 모든 어두운 그늘과 무거운 짐이 일순간에 씻겨 내려가는 듯한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내가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세상 사는 것이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이토록 불편하고 답답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내가 이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저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 맞게 지어진 존재여서 이 땅에서의 삶이 이토록 서툴고 불편했구나.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직하게 살아내려고 몸부림치는데도 이 세상 사는 것이 자꾸만 어색하고 불편하십니까?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이 약해서도 아니고,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애초에 '다른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오히려 감사하고 행복한 일입니다.
혹시 이 중에도 아, 나는 이 세상이 너무 편하고 좋습니다!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속히 회개하셔야 합니다. 만약 그런 분이 계신다면 제게 살짝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 영혼을 위해 정말 특별한 기도를 해 드리겠습니다.
주님, 저 성도님이 기도하는 것마다 하나도 응답되지 않게 하시고, 구하는 것마다 전부 반대로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저는 정말 기꺼이 그렇게 기도해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했든 실패했든, 많이 가졌든 못 가졌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이 본질적으로 불편해야 마땅합니다. 불편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정상인이 정신병원 안에서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며칠 전, 예배 사역자로 유명한 장종택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미국에 머물던 아내분이 잠깐 한국에 나왔다며, 그 부부와 스피커폰으로 30분쯤 이런저런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대화가 끝날 무렵, 장 목사님이 저에게 툭 던지듯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예수 안 믿고 어떻게 살까요? 주님 안 믿고 어떻게 살아갈까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그 말이 제 뇌리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말 안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이것은 단순한 신앙 고백이 아니라, 어쩌면 현실의 거친 파도를 버티고 버티다가 터져 나온 묵직한 한숨 같은 말이었습니다. 척박한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불안과 고단함,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사역의 자리, 아무리 몸부림쳐도 채워지지 않는 수많은 환경, 그리고 사명과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날마다 겪어내야 하는 소리 없는 고통들이 그 말속에 다 묻어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고백이 이렇게 들렸습니다.
목사님, 저는 정말 예수 없이는 단 하루도 못 살겠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여기는 제 나라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진짜 예수 없이 버텨낼 자신이 없습니다.
이 고백은 결코 신앙이 나약해서 내뱉은 말이 아닙니다.
이 거친 세상을 온몸으로 정직하게 살아본 사람, 삶의 한계와 실상을 충분히 마주해 본 사람의 입에서만 흘러나올 수 있는 진짜 고백입니다.
전도서는 우리를 그저 인생의 허무 속으로 몰고 가기만 하는 책이 아닙니다. 많은 이들이 전도서를 허무주의로 오해하는 이유는, 어차피 이 세상은 다 헛된 것이니 하늘만 바라보며 대충 살아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그 숱한 허무와 헛됨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 가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심 어린 고백 하나를 듣기 원하십니다.
전도서는 허무를 외치는 책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진짜 고백을 받아내시려고, 이 세상 속에서 수많은 허무와 결핍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의롭고 존귀한 존재인지를 깊이 깨닫게 하시려고 성경 곳곳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거듭 강조하시듯, 하나님은 이 세상의 뼈아픈 허무를 통해 우리가 저 영원한 나라만 갈망하게 하시려고 이 전도서를 우리 손에 쥐여주셨습니다.
세상을 살아갈수록, 날이 갈수록 이 고백이 우리의 실존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 저는 정말 주님 없이는 안 되겠습니다. 단 한 순간도요.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날마다 진심으로 터져 나오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