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5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6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7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8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9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가 멸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 한지라
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오늘 우리 시니어 찬양대가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바라보는데, 저 자리에 암 환자 성도님이 세 분이나 서 계셨습니다.
찬양을 마치고 한 장로님께서 이런 고백을 하셨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찬송을 부르며 과연 나는 이 가사대로 살고 있는가 스스로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극심한 통증과 쇠약해진 육신을 이끌고 굳이 저 자리에 서서 찬양을 드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정말로 그분들에게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몸이 성해서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도,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나오신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그 '가장 귀한 것'을 붙들었기에 가능한 일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다'고 온몸으로 고백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는 교회. 그런 복된 제단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공자는 사람이 깨닫는 방식을 두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배우면서 깨닫는 사람을 '학이지지(學而知之)'라 했고,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사람을 '곤이지지(困而知之)'라 했습니다. 한쪽은 귀로 배우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쪽은 온몸으로 때워가며 배우는 사람입니다. 같은 진리를 깨닫는데, 한 사람은 말씀을 듣고 알고 다른 사람은 피눈물을 겪고 압니다.
제가 보기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학이지지보다 곤이지지가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참 어리석습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보고 깨달으면 될 일 아닙니까? 꼭 고난과 시련이라는 혹독한 실습을 거쳐야만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말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귀에 똑똑히 들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자리에서는 돌이키지 않습니다. 꼭 인생의 거친 길을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배웁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기어이 인생의 쓴맛 다 보고, 눈물 한 바가지 다 쏟아내고 나서야 가슴을 칩니다. "용서하십시오." 주님의 이 말씀이 떨어질 때 그대로 순종하면 끝날 일입니다. 관계가 산산이 깨어지고, 내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물론 그때 가서라도 깨닫는 것, 귀합니다. 하나님은 상한 심령도 받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깨달음에 치른 대가가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여러분, 학이지지(學而知之)와 곤이지지(困而知之)를 합친 사자성어가 하나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그게 뭔가 하면 '불청어복(不聽魚腹)'이라 합니다. 아니 불(不), 들을 청(聽), 물고기 어(魚), 배 복(腹). 불청어복. 혹시 들어본 분 계십니까? 모르시겠지요? 금시초문입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이 '불청어복'이라는 말을 아는 사람은 온 세상에 딱 한 명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공자도 아니고, 바로 접니다. 제가 지난주에 만든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전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안 나옵니다. 지난주에 태어난 말입니다.
이 불청어복(不聽魚腹)을 우리말로 쉽게 풀면 딱 이 뜻입니다. "좋은 말 할 때 들어라." 물고기 뱃속 들어가서 생고생하지 말고, 제발 좋은 말 할 때 들으라는 뜻입니다.
요나서 1장과 2장을 관통하는 핵심이 바로 이 불청어복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뼈저리게 후회하지 말고, 좋은 말 할 때 들으라는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요나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요나에게는 귀로 배울 기회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았습니다. 귀를 막았습니다. 결국 깊은 바다 밑바닥, 칠흑 같은 물고기 뱃속까지 굴러떨어져서야 온몸으로 뼈아프게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말 할 때 들읍시다. 옆에 계신 성도님들을 향해 진심으로 권면합시다. "성도님, 우리 좋은 말 할 때 들읍시다."
하나님께서 좋은 말로 타이르실 때 배우면 수업료가 제일 쌉니다. 좋은 말 할 때 듣는 것, 이것이 인생의 비용을 가장 아끼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나처럼 좋게 말씀하실 때 듣지 않으면, 그 대가가 걷잡을 수 없이 비싸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바람을 동원하셔야 합니다. 풍랑을 일으키셔야 합니다. 지중해 바다를 통째로 뒤집어엎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거대한 물고기까지 특별 준비하셔야 합니다. 한번 계산해 보십시오. 말 한마디에 순종하면 끝날 일에 바람이 불려 오고, 성난 바다가 동원되고, 물고기까지 투입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비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거대한 자연을 움직이실 때, 그 청구서의 값을 도대체 누가 치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많은 것을 동원하기 시작하시면,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지불해야 할 청구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집니다.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듣는 것이 가장 지혜롭습니다.
어느 부부가 사소한 일로 다투었습니다. 주일 예배에 와서 설교자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마십시오." 그날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집에 돌아가서 부부 중 한 사람이 먼저 입을 열면 됩니다. "여보, 내가 미안해. 내 속이 좁았어." 이 한마디면 수업료가 가장 쌉니다.
자존심 딱 한 번만 내려놓으면 아무것도 아닐 이 가벼운 값을 치르지 않습니다. 그 말을 삼킨 채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흘러갑니다. 사소한 말다툼 하나가 마음에 깊은 옹이를 만들고, 상처가 곪아 터지기 시작합니다. 급기야 해묵은 과거의 상처까지 줄줄이 끌어올려 서로를 난도질합니다. 집안 공기가 얼어붙으니 자녀들이 살얼음판 걷듯 부모 눈치를 봅니다. 결국 부부가 손잡고 상담실을 전전하고,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데 수년의 세월을 허비합니다.
처음 부부싸움을 했을 때, "미안해, 내가 속이 좁았어, 다 내 탓이야"라는 이 한마디면 털어낼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온 가족이 인생의 가장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나서야 겨우 깨닫습니다. 그 사과의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어렵습니다. 자존심이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쥐꼬리만 한 자존심 지키자고 지불한 값이 얼마입니까? 피 같은 몇 년의 세월입니다. 아이들의 눈물과 불안이 얹혀진 값비싼 시간들입니다. 결국 배우기는 배웁니다. 다만 설교 한 번 듣고 순종하면 끝났을 것을, 수년의 인생을 바치고 나서야 겨우 배운 것뿐입니다.
병원에 갔을 때 의사가 말합니다. "술, 담배 끊으십시오. 짠 음식 피하시고, 매일 운동하십시오." 그 의사의 말을 그 자리에서 받으면 운동화 한 켤레 값만 듭니다. 의사가 겁주려고 그 말을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지금 들으면 그 운동화 한 켤레 값으로 인생을 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을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 살다가 몸이 무너지면 어떻게 됩니까? 돈은 돈대로 깨지고, 시간은 시간대로 날아갑니다. 인생의 황금기를 병마와 싸우는 데 다 탕진해야 합니다.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처음 말씀하셨을 때를 보십시오. "니느웨로 가라." 그 자리에서 "아멘" 하고 순종했다면, 니느웨로 가는 여비만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여 다시스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배 삯은 배 삯대로 날렸습니다. 선원들은 살기 위해 귀한 화물을 바다에 다 던져버려야 했습니다. 바다는 발칵 뒤집혔고, 급기야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까지 동원하셔야 했습니다. 니느웨로 곧장 가면 될 길을, 요나는 인생의 온갖 밑천을 다 털어 넣고서야 배웠습니다.
그리고 결국 요나가 어디로 갑니까? 결국 니느웨로 갑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가라 하신 바로 그 자리로 돌아옵니다. 도착지는 처음과 똑같습니다. 요나가 제 고집 피워 얻어낸 이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손실만 있고, 낭비만 남았습니다.
순종하려 할 때, 처음에는 순종이 엄청난 손해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손해처럼 보여도 순종이 가장 값싼 길입니다. 불순종은 시작할 때 참 편하고 달콤해 보입니다. 그러나 훗날 하나님이 내미시는 청구서를 받아 들면, 불순종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값비싼 길입니다.
신약 성경을 보면 주님께서 수없이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515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귀로 배우지 않으면, 온몸으로 때우며 배운다." 귀가 있다면 지금 들으라는 것입니다. 들릴 때 엎드리라는 경고입니다. 말씀이 귀에 들려올 때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인생의 모진 풍파를 몸으로 겪어내며 배울 수밖에 없다는 하나님의 엄중한 경고입니다. 이것이 요나서 1장과 2장이 우리 영혼을 향해 던지는 가장 뼈아픈 교훈입니다.
요나서 1장과 2장을 거친 골목의 투박한 언어로 바꾸면 무슨 뜻이겠습니까? "좋은 말 할 때 들어라. 물고기 뱃속에 확 처넣기 전에." 표현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습니다. 말씀이 들려올 때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요나서 3장 1절과 2절 말씀을 보면, 요나서 1장 1절과 2절 말씀과 내용이 그대로 겹칩니다.
요나 1:1-21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 3:1-21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내용이 같습니다. 그런데 이 두 말씀 사이에는 판을 완전히 뒤흔드는 결정적인 차이 하나가 숨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 제목에 나와 있습니다. 바로 '두 번째'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요나서 3장에 등장하는 모든 단어 가운데 가장 무겁고 가장 두려운 단어입니다. 두 본문을 나란히 놓고 한 글자씩 짚어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같습니다. "일어나라", 같습니다.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라", 똑같습니다. 그런데 3장에는 1장에 없던 말이 하나 불쑥 들어와 박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다시피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첫 번째 부르심을 정면으로 걷어찼습니다. 도망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다시 얹으시며 의도적으로 한 단어를 박아 넣으십니다. "두 번째로." 성령께서 이 단어를 여기에 못 박아 두신 것입니다.
명령은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일어나라, 니느웨로 가라, 선포하라. 토씨 하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기준을 낮추지도 않으셨고, 조건을 깎아 주지도 않으셨습니다. 바뀐 것은 오직 요나 하나뿐입니다. 그사이 요나는 도망을 쳤고, 배를 탔고, 성난 바다에 던져졌고, 칠흑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온몸으로 뒹굴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만신창이가 된 요나 앞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놓였습니다. 다만 그 앞에 이 서늘한 한마디가 덧붙었을 뿐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 이 '두 번째 기회'라는 것은 결코 아무에게나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보십시오. 성령을 속인 대가로 두 번째 기회는커녕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에게도 두 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구약 성경의 웃사를 기억하십니까? 소가 뛰어 하나님의 궤가 흔들릴 때, 무심코 그 궤에 손을 대었다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웃사에게는 돌이킬 두 번째 기회가 없었습니다. 소돔에서 나오던 롯의 아내는 뒤를 한 번 돌아보았을 뿐입니다. 그 자리에서 소금 기둥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기회는 없었습니다.
보십시오. 웃사는 손 한 번 잘못 뻗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고개 한 번 돌렸습니다. 그것으로 인생이 끝났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만 하겠습니다." 그렇게 엎드릴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안일하게 '두 번째'가 당연히 찾아올 것이라 믿습니다. "이번에 안 되면 다음에 하지 뭐." "다음 주에 회개하지 뭐."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넘깁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는 수많은 인물들의 결말을 보십시오. 성경에는 그 '다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예 지워져 버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바로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두 번째 기회'일 수 있습니다. 오늘 강단에서 선포되는 이 말씀이, 무너진 여러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실 하나님의 마지막 손길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번째 기회를 통해, 그동안 옹졸하게 틀어쥐고 있던 미움을 꺾고 다시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동안 차일피일 미루어 두었던 불순종의 자리에서 일어나 마침내 엎드리라고 주시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심령 속에 스쳐 지나가는 그 이름이 누구입니까? 끝끝내 외면하고 미뤄 두었던 그 불순종의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오늘 이 예배의 자리는,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그 부르심을 다시 꺼내어 놓으라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의 자리입니다.
성경이 왜 '두 번째'라는 서늘한 단어를 본문에 쾅 박아 넣었겠습니까? 세 번째 기회는 그 누구에게도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의 세 번째는 영영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음을 경고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 요나의 머리 위에 '두 번째'라는 붉은 낙인을 찍어 기록해 두신 것입니다.
약 두 달 전쯤의 일입니다. 베트남에서 선교하시다가 여러 가지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귀국한 40대 선교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한국에 돌아왔지만 당장 먹고살 길이 막막해,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영업 전선에 뛰어들어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딸린 어린아이만 셋이었습니다. 복음 전하던 선교사가 처자식 밥은 먹여야 하니 낯선 영업판을 전전하는 그 모습을 보는데, 대화하는 내내 가슴이 미어지고 참 짠했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가장으로서 살려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헤어지면서 제가 그 선교사님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조만간 꼭 연락드릴 테니 밥 한 끼 같이 합시다. 내가 꼭 연락할게요." 그 선교사님이 제 손을 꼭 쥐며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 꼭 연락 주십시오." 그렇게 헤어졌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지난 두 달 동안 얼마나 바빴습니까?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습니다. 숨 가쁜 일과 중에 문득문득 그 선교사님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안 난다는 핑계로 전화를 내일로, 또 다음 주로 미루었습니다.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밥 한 끼 대접하겠다는 그 말은 제 진심이었습니다. 다만 바쁘다는 이유로 미루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영혼을 놓치고 사랑을 잃어버리는 방식이 대개 이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미루다가 놓치는 것입니다. 마음은 굴뚝같은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하나님의 타이밍을 다 날려버립니다.
이번 주에 요나서 설교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원고를 묵상하는데, '두 번째로'라는 이 단어가 제 심장을 쾅 하고 때렸습니다. 두 번째로. 두 번째로. 그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제 양심을 찔러댔습니다. 성령께서 제 마음에 강한 부담을 주셨습니다.
그 길로 설교 준비를 당장 멈추었습니다. 책상을 밀치고 휴대폰을 들어 그 선교사님 번호를 눌렀습니다. 신호가 가고 전화를 받자마자 제가 물었습니다. "선교사님, 많이 기다렸지요?"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참 먹먹했습니다. "네, 목사님. 사실 많이 기다렸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선교사님, 내가 이러저러한 일로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번 주에 선교사님 편한 시간에 무조건 나 한번 찾아오세요. 우리 얼굴 꼭 한번 봅시다."
여러분, 제가 왜 설교 준비를 하다 말고 허겁지겁 그 선교사님에게 전화를 걸었겠습니까? 그분에게 밥 한 끼 대접하고, 그 상한 심령을 품어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영영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전화하지 않으면 또 잊어버립니다. 목회가 바쁘다는 핑계로 돌아서면 또 까먹습니다. 그러면 정말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절박했던 그 한 영혼을 환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단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누른 것입니다.
여러분, 외롭고 곤고한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섬길 수 있는 여유와 상황이 마치 내 손에 쥐어진 특권인 줄 압니다. "내가 시간 날 때 하면 되지. 내 형편 풀릴 때 도와주면 되지." 그렇게 착각합니다. 그러나 섬김의 기회는 날이면 날마다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곁에 붙여주신 그 사람을 돌볼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거룩한 부담을 주실 때, 첫 번째 부르심을 지나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마저 흘려보내면 다시는 붙잡을 수 없는 때가 옵니다. 섬김은 내 서랍 속에 넣어두고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도움이 절박한 그 사람이 내 눈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내 손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바로 그 타이밍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심령 또한 하나님 앞에서 순종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딱 맞아떨어지는 날은 인생에서 그리 자주 오지 않습니다.
저는 그 선교사님 가정을 환대할 수 있는 이 두 번째 기회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린 자녀가 셋이나 딸려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그 아이들에게 무엇을 쥐여줄 수 있을까 정성껏 준비하며 그분들을 기다렸습니다.
이번 주 수요일, 드디어 그 선교사님 부부가 찾아왔습니다. 마주 앉아 차근차근 살아온 궤적을 들어보니, 사모님께서 미국에서 신학도 공부하셨고 찬양 사역자로 귀하게 헌신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음악을 전공하고 지금도 광신대학교에서 지휘를 배우고 계실 만큼 은사가 탁월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귀국 후 부딪힌 척박한 현실과 생활고 때문에 지금은 그 모든 사역의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세 아이를 품에 안고 모진 비바람을 견뎌온 그 두 분 선교사님과 대화를 나누는데, 두 분이 참 많이도 우셨습니다. 제가 또 사람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려 울리는 은사가 있지 않습니까? 대화 내내 눈물을 쏟아내시던 사모님이 물기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본래 눈물이 참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목사님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마음 터놓고 말할 곳도 없었고, 기댈 곳도 없었습니다. 영적인 멘토 한 사람 없었는데, 오늘 목사님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가슴이 벅차고 기쁩니다." 그렇게 한참을 우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모님이 왜 그토록 눈물을 쏟아내셨겠습니까? 제가 대단한 신학적 설교를 늘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가슴속 응어리를 묵묵히 들어드렸을 뿐입니다. 그토록 말할 곳이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기댈 곳도, 붙들 멘토도 없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짓눌린 속마음 한 번 온전히 들어줄 사람 하나가 없어서, 그 긴 세월을 이 악물고 홀로 버텨오셨던 것입니다.
병원 근처 식당에서 함께 따뜻한 밥을 나누었습니다. "선교사님, 제가 오늘 오후 두 시에 환우분들과 드리는 수요 예배가 있습니다. 더 깊이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예배를 인도하러 들어가야 합니다." 제 말을 들은 사모님이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희는 참석하면 안 되는 예배입니까?" "병원에 입원한 환우분들을 위한 자리지만, 은혜를 사모하는 분이 오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함께 가십시다."
그 덕분에 예배 전 한 시간 동안 더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함께 들어가며 제가 사모님께 불쑥 제안을 하나 건넸습니다. "사모님, 오늘 저 병상에 계신 어르신들 앞에서 특송 한 곡 올려주시지요." 그 사모님이 강단 앞에 서서 찬양을 시작하기 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했습니다. "오늘 목사님을 통해 부어주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 회복과 감사를 이 찬송 한 곡에 전부 담아 주님께 올려드리겠습니다." 그렇게 심령을 다해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두 번째 기회로 주신 그 작은 음성에 순종하여 손을 내밀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하찮은 순종 하나를 들어 쓰셨습니다. 위로가 절박했던 두 영혼의 찢긴 가슴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들 앞에 가로놓여 있던 막막한 벽을 뚫고 나아갈 하늘의 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그 입술에 잃어버렸던 찬송과 감격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과 저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한 사랑의 끈으로 단단히 묶어주셨습니다. 이 만남이 앞으로 어디까지 이어질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한 뜻이 있어 엮어주셨습니다.
제가 한 일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전화 한 통 걸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설교 준비하다가 펜을 내려놓고 번호 누른 것, 그것 하나뿐입니다. 무엇이 이 놀라운 회복을 이루어 냈습니까? 순종입니다. "두 번째 기회는 놓치지 말라" 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엎드린, 그 작은 순종 하나가 이 거대한 회복의 문을 열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중국을 다녀오라는 마음을 제게 주셨을 때, 저는 솔직히 가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던 그 정도의 거부감까지는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가 이미 선교로 섬기고 있는 여덟 개 나라에 포함된 곳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낯가림이 얼마나 심합니까? 친밀함도 없는 낯선 사람들을 찾아가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몹시 불편했습니다. 중국을 다녀오라는 그 마음의 명령은 제게 참으로 버거운 짐이었습니다.
"아, 이걸 어떡하나." 고민 끝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제가 강단에서 처음 털어놓는 고백인데, 제가 무슨 기도를 드렸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채희호 집사님과 송은주 집사님도 따라붙으면 그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조건을 내걸며 얕은수를 썼습니다.
그리고 두 분에게 슬쩍 떠보듯 물었습니다. "이번에 중국 일정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분들이 제 속도 모르고, 눈치도 없이 덜컥 가겠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저는 송은주 집사님이 지금 '스토리잼잼' 사역의 여러 변화로 도저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여겼습니다. 채희호 집사님 역시 학교의 복잡한 일정 때문에 불가능할 것이라 계산했습니다. '두 사람이 못 간다고 하면, 하나님 앞에 핑곗거리 삼아 편안하게 주저앉아야지.' 이런 불순한 속셈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두 분 다 "네, 목사님. 가겠습니다" 하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꼼짝없이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 향하는 길에 채 집사님이 이런 말을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사실 이번 선교 일정과 학교의 중대한 일정이 딱 겹쳐 있었습니다. 도저히 갈 수 없는 형편이라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학교의 그 중요한 일정이 뒤로 쑥 밀려버렸습니다. 그 일정이 통째로 비워졌습니다. 그래서 올 수 있었습니다."
그 고백을 듣는 순간 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이번 중국 걸음 속에 무언가 단단히 준비해 두신 일이 있겠구나.'
중국 땅을 밟아보니 과연 그랬습니다. 귀하고 복된 만남들이 이미 하나님 손에 정교하게 예비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 만난 영혼들을 통해 행하실 일을 크게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당신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고자 하시는 뜨거운 열심과 계획이 그곳에 이미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중국 땅에 서서야 제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아, 하나님이 이래서 나를 억지로라도 이곳으로 밀어 넣으셨구나.'
여러분, 제가 지난주에도 광고시간에 전해드렸지만, 우리 교회 영상 조회수가 중국을 다녀온 뒤로 약 네 배나 폭발적으로 늘어난 사실을 아십니까? 갑자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는 중국에서 만났던 그 수많은 동역자들이 이 말씀의 복을 곳곳으로 퍼 나르고 있다는 확신이 듭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설교가 어디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설교입니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찾아 듣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 아닙니까? 가기 싫다고 꽁무니를 빼려던 그 억지 걸음에서 이 거대한 열매가 터져 나왔습니다. 제가 끝내 핑계 대고 가지 않았더라면, 이 영광스러운 일은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중국을 다녀온 뒤, 저는 '순종'이라는 단어 앞에 제 자신을 다시 깊이 세워보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제 순종이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 내놓을 만큼 대단한 순종이었습니까? 중국으로 가라는 마음을 주셨을 때 기쁨으로 "아멘" 하며 달려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기 싫어 버티는 마음을 억지로 질질 끌고 간 비겁한 발걸음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저는 제가 드렸던 그 초라한 순종 앞에 이런 부끄러운 이름을 붙였습니다. '저렴한 순종.' 하나님이 가라 명하셨기에 발을 떼기는 뗐으나, 그것은 지극히 헐값에 불과한 저렴한 순종이었습니다. 가기는 갔습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간 것도 아니요, 자원하는 심령으로 뛰쳐나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핑계와 조건까지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서야 마지못해 끌려간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놓고 자랑할 구석이라곤 단 한 톨도 없는, 지극히 부끄러운 순종이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모든 준비가 완벽히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마음도 온전해야 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비로소 그 일을 시작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거리낌 없는 깨끗한 양심, 불타는 뜨거운 믿음, 그리고 하나님이 명하실 때 기쁨으로 넘쳐나는 자원하는 마음. 적어도 이 정도는 갖추어져야 하나님께서 그 순종을 기쁘게 받으실 것이라 단정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하기 싫은 기색으로 억지로 발을 떼거나, 그저 '꾸역꾸역' 짐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면 옆에서 쉽게 충고합니다. "그렇게 억지로 할 바에는 차라리 하지 마세요." "그런 마음으로 섬겨봤자 하나님이 안 받으시니 그냥 내려놓으세요." 우리는 너무나 쉽게 이렇게 말해왔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역시 과거에 그렇게 말했던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억지 마음으로 하려면 차라리 순종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오늘 저는 여러분 앞에서 이 얄팍한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 부끄러운 마음으로라도 하십시오. 온몸이 뒤틀리고 하기 싫어도, 꾸역꾸역이라도 발을 떼십시오. 마음이 온전히 동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십시오. 손놓고 기다린다고 해서 거룩한 열정이 저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완벽하게 준비되는 그 완벽한 날을 기다리다가, 평생 단 한 번도 순종의 문턱을 넘어보지 못하고 인생을 끝내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면, 설령 내 본성은 죽기보다 싫더라도 돌아서야 합니다. 분명히 손해를 볼 것이 뻔하고 내 속이 몹시 불편하더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길이 분명하다면 그 거북함을 뚫고 엎드리십시오. 거기에 영적인 돌파가 있고, 믿음의 진짜 해답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불편하면 지레 포기해 버립니다. "이런 억지 마음으로 해봤자 무슨 은혜가 되겠어?" 그렇게 그럴싸한 영적인 핑계를 대며 주저앉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제 경험을 보십시오. 처음에는 마음이 전혀 없었어도, 발걸음을 먼저 떼어 순종의 자리에 들어가니 비로소 마음이 뒤따라왔습니다. 시작은 억지였습니다. 지극히 헐값에 불과한 저렴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끄러운 자리에 일단 서고 나니, 하나님께서 그 천박한 마음을 빚으셔서 가장 고귀하고 온전한 순종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영적인 순서는 우리가 계산하는 방식과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감정과 마음이 먼저 충만해져야 그다음에 순종의 행동이 나온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실제 영적인 세계에서는 순종의 결단이 먼저 터져 나가야, 비로소 그 뒤를 따라 차가웠던 마음이 데워지는 법입니다.
아예 그 저렴한 순종조차 시작하지 않으면, 메마른 마음이 뒤집힐 기회 자체가 영영 찾아오지 않습니다. 비록 헐값 같은 순종일지라도, 억지로 내 본능을 거스르며 꾸역꾸역 그 길을 걷다 보면, 그 고통스러운 순종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이 내 완악한 심령을 깨뜨리시고 진짜 온전한 순종으로 빚어 가십니다. 움직이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마음이 변화될 은혜의 자리 자체가 아예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기회 자체를 내 손으로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중국 걸음을 통해 제가 뼈저리게 통과한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 성도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양심을 치시며 무언가를 명하신다면, 억지로라도, 꾸역꾸역이라도 순종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십시오.

물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는 억지스러운 흉내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사랑에 감격하여 터져 나오는 자원하는 순종, 온전하고 흠 없는 기쁨의 순종을 바라십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을 깊이 읽다 보면 하나님 나라가 흠 없는 온전한 순종으로만 세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티 하나 없는 완벽한 순종만 받으신다면, 성경에 살아남을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한번 찾아보십시오.
베드로를 보십시오. 욥바의 무두장이 시몬의 집 옥상에서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보자기에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 잡아먹으라" 명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세 번이나 정색하며 거절했습니다. 그 고집을 부린 끝에야 억지로, 꾸역꾸역 고넬료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사사 입다는 어떠합니까? 자신의 출세욕과 인정 욕구, 그리고 가슴속 깊이 곪아 터진 사생아의 상처가 뒤엉킨 사람 아니었습니까? 야망과 원한이 뒤섞인 채 드린, 참으로 불안하고 불완전한 순종이었습니다.
모세는 또 어떻습니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이 애굽의 바로에게 가라 명하셨습니다. 그때 모세가 무릎 꿇고 아멘 했습니까?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약속하셨는데도 핑계를 댑니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합니다.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끝끝내 발을 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모세의 순종 역시 온갖 핑계로 얼룩진, 지극히 초라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의 그 흠 많고 저렴한 순종을 들어 쓰셔서, 제국 애굽을 흔드시고 이스라엘을 건져내셨습니다.
이 세 사람을 나란히 놓고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는 거절했습니다. 입다는 온갖 불순물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모세는 끝까지 핑계를 댔습니다. 우리 잣대로 재면 셋 다 자격 미달입니다. 강단에서 당장 잘려 나가야 마땅한 수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세 사람을 모조리 들어 쓰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동기가 100퍼센트 순수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내 심령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즉각 온전히 따라가지 못할 때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비록 덜컥거리며 내딛는 불완전한 한 걸음일지라도, 그 저렴한 순종을 하나님 손에 올려놓을 때, 하나님은 그 꺾인 발걸음을 들어 당신의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구레네 시몬을 한번 보십시오.
마태복음 27:3232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시몬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겠다고 두 손 들고 자원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라는 젊은 사형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길을 오른다기에,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군중 틈바구니에 끼어 목을 빼고 구경하던 사람입니다. 구경꾼으로 서 있다가 덜컥 걸려들었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오르시던 예수님이 탈진하여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로마 군인들의 눈으로 보기에, 저러다가는 골고다 언덕에 닿기도 전에 길바닥에서 죽어 나갈 판입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군중 속을 훑어보며 대신 십자가를 짊어질 놈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시골 냄새 풀풀 풍기는 투박한 외지인 하나가 넋을 놓고 구경하다가 딱 걸린 것입니다.
로마 군인이 멱살을 잡듯 끌어내어 그 무거운 나무토막을 어깨에 강제로 얹었습니다.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만든 것입니다. 시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억울하고 황당했겠습니까?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가 억지로 짊어진 그 십자가가 인류 구속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을 이루어 냅니까? 예수님의 열두 제자조차 꿈도 꾸지 못했던 자리입니다. 호언장담하던 수제자 베드로도, 3년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도 죄다 도망쳤습니다.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던 영광의 자리를, 구경꾼으로 왔던 촌사람 하나가 차지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골고다로 향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핏자국 선명한 그 마지막 길을 단둘이 동행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시작은 억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발걸음은 구속사의 가장 거룩한 한 장면이 되었습니다.

그날 골고다 언덕에서 시몬에게 물었다면 무엇이라 답했겠습니까? "내가 지고 싶어서 진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끌려 나와 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억울해하며 털어놓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동기로만 따지면 그 순종에는 점수를 매길 수조차 없습니다. 빵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완전하고 억지스러운 어깨를 그대로 들어 쓰셨습니다.
마음은 전혀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깨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사명을 온몸으로 받쳐냈습니다. 성경의 그 어떤 위대한 사도도 해내지 못했던 거룩한 사역을 구레네 시몬이 완수했습니다.
억지로 끌려간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초라한 억지 순종 위에 상상할 수 없는 가문의 복을 쏟아부으셨습니다. 로마서 16장을 보십시오.
로마서 16:1313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를 향해 문안하면서 무엇이라 선포합니까?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다." 이 루포가 바로 십자가를 억지로 졌던 구레네 시몬의 아들입니다. 지방에서 올라와 재수 없게 걸려들었던 그 촌사람의 집안이 초대 교회의 기둥 같은 가문으로 우뚝 섰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아내를 영적인 어머니라 부르고, 그 아들을 형제라 부를 만큼 존귀한 명문 가문이 되었습니다. 온몸으로 버티며 억지로 걸었던 그 하찮은 순종 하나를 통해 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피 묻은 골고다 언덕길에서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로마 병사에게 재수 없게 끌려 나온 시골뜨기 구경꾼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집안의 결말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대 교회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는 축복의 가문이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은혜의 시작이 어디였습니까? 골고다 언덕에서 억지로 떼어놓았던 바로 그 첫 걸음이었습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나가 원수 니느웨를 사랑해서 갔습니까? 아닙니다. 그 악독한 인간들이 회개하고 구원받기를 바라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왜 갔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생고생을 다 겪었기 때문입니다. 칠흑 같은 바다 밑바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니, 하나님의 손아귀에서 더는 도망칠 길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발을 뗀 것입니다.
요나 3:3-43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4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니느웨는 구석구석 다 돌려면 사흘 길을 꼬박 걸어야 할 만큼 거대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면 기가 막힌 기록이 나옵니다. 요나가 그 넓은 성읍을 며칠 동안 다녔다고 합니까? 딱 하루 다녔습니다. 사흘 동안 피를 토하며 복음을 전해도 모자랄 판에, 고작 하루 대충 훑고 지나간 것입니다. 이 한 문장만 보아도 요나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얼마나 최소한으로 때우려 했는지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요나가 외친 메시지를 보십시오. 거기에 한 영혼이라도 살리겠다는 간절함이 묻어 있습니까? 눈물의 권면도 없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라는 친절한 설명도 없습니다. "비록 당신들의 죄악이 하늘에 닿았을지라도, 지금 엎드려 회개하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이런 소망의 메시지는 단 한 줄도 없습니다.
요나가 던진 말은 딱 한마디였습니다. "사십 일 지나면 니느웨 무너진다." 이게 끝입니다. "너희들 사십 일 뒤면 다 끝장난다." 영혼을 향한 애통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이,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저주의 말을 툭 던져버린 것입니다. 불친절의 극치 아닙니까?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온전한 전도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려고 외치는 복음에는 반드시 피 끓는 온도가 있는 법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입술에서 터져 나온 말에는 온도가 전혀 없습니다. 영하의 냉기만 돕니다. "하나님이 하라니까 내가 억지로 흉내만 낸다." 딱 그 수준입니다.
요나의 속내를 뒤집어보면 이런 뜻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가라 하셔서 내가 여기까지 오기는 왔다. 그러나 나는 너희 같은 인간들에게 이 귀한 은혜가 흘러가는 꼴을 죽기보다 보기 싫다." 그는 말씀을 전하면서도 속으로는 저들이 끝내 회개하지 않고 몽땅 벼락을 맞아 망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요나서 4장에 가면 저 악한 니느웨 백성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뒤집어지는 대부흥이 일어납니다. 온 성읍에 하나님의 구원이 임합니다. 그 광경을 목격했을 때 요나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감사 찬송을 올립니까? "하나님, 부족한 제 입술의 말을 들으시고 이 백성을 살려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엎드립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향해 핏대를 세우며 성질을 부립니다. 니느웨를 살려주었다고 화를 냅니다. "하나님, 내 이럴 줄 알았습니다. 내가 이 꼴 보기 싫어서 처음에 다시스로 도망치려 했던 것 아닙니까?" 다음 주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하나님 앞에 적반하장으로 대들며 제 고집을 꺾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저렴한 순종 아닙니까? 요나가 하나님 앞에 내놓은 순종은 그야말로 헐값에 불과한, 밑바닥 수준의 저렴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요나의 이 저렴한 순종까지 들어 쓰셨습니다. 요나서 4장 끝에 가 보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숫자는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다 뺀 숫자입니다. 실제로는 사오십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영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볼품없는 사람의 저렴한 순종 하나가 수십만 명의 목숨을 통째로 건져냈습니다.
요나의 순종은 한없이 저렴했습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순종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저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드린 계산서와 하나님이 내놓으신 결과의 값이 이렇게 맞지 않습니다. 인간이 드린 것은 고작 하루치 억지 발걸음인데, 하나님이 돌려주신 것은 거대한 도시 하나였습니다. 요나가 툭 던진 것은 성의 없는 한 문장이었는데, 주께서 건져 올리신 것은 수십만 명의 생명이었습니다.
요나는 대충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충 역사하지 않으셨습니다. 요나는 사흘 길 중에 겨우 하루 길을 걸으며 건성으로 외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메마른 작은 소리 하나를 붙드셔서, 니느웨 온 성읍의 심장을 뒤흔드는 거대한 뇌성으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요나는 영혼 없는 설교를 무미건조하게 내뱉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불친절한 설교 한 자락을 가지고도 흉악한 앗수르 왕의 보좌를 흔드셨고, 잿더미에 뒹구는 온 백성의 심령을 통회 자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요나 3:1010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것이 바로 '순종의 신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순종을 손에 쥐시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게는 별생각 없이 억지로 내딛는 초라한 한 걸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건져 올리는 구원의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 양심을 치셔서 마지못해 내뱉은 그 투박한 한마디가, 절망의 벼랑 끝에 선 영혼에게는 인생의 방향을 틀어쥐는 하나님의 천둥 같은 음성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전한 십자가 복음 한마디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주님이 주신 마음에 밀려 어색하게 건넨 그 작은 복음 하나에, 지옥으로 향하던 한 영혼이 살아 숨 쉬기 시작합니다.
정말 가기 싫어 발을 빼려 하다가도, 주님이 자꾸만 마음을 쑤셔대시니 억지로 찾아간 그 작은 심방 하나가 죽어가던 성도를 일으켜 세웁니다. "왜 나만 맨날 져줘야 해? 왜 나만 참아야 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지만, 억지로 먼저 내민 그 못난 화해의 손길 하나가 산산조각 나던 가정을 기적처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내가 억지로 내민 그 작은 온기 하나가 얼음장 같던 상대방의 굳은 심령을 녹여내고, 그 메마른 인생의 혹한기에 찬란한 봄을 불러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내가 속이 뒤집어지면서도 꾹 삼켜낸 그 작은 인내 하나가 깨어질 뻔한 관계를 건져냅니다. "내가 미안합니다. 내가 참 속이 좁았습니다." 자존심 다 구겨가며 먼저 던졌던 이 못난 사과 한마디가, 그동안 쇠창살처럼 닫혀 있던 내 심령의 천국 문을 활짝 열어젖히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여기에 대단한 결단이나 거창한 종교적 업적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없습니다. 말 한마디 건네는 것입니다. 손길 한번 내미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심방 걸음 한번 떼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 한번 꾹 참고 사과하는 것입니다. 전부 오늘 이 자리에서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극히 작은 일들뿐입니다.
여러분, 왜 예수 믿으면서도 내 마음에 천국 문이 꽁꽁 닫혀 있는지 아십니까? 열쇠를 쥐고도 문을 따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 문은 오직 순종이라는 열쇠를 돌려야만 열리는데, 손에 쥐고 멍하니 서 있기만 합니다. 열쇠가 없어서 지옥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열쇠는 이미 여러분 손안에 쥐어져 있습니다. 그저 그 열쇠를 순종의 문고리에 넣고 돌리지 않을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심령 속이 매일 지옥처럼 들끓고 원망과 분노가 가시지 않는다면,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세미한 음성과 정반대 길로 달음박질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나님이 귀에 대고 똑똑히 말씀하시는데도, 귀를 막고 귀 없는 자처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작은 배려와 따뜻한 손길 하나가 사람을 살려내는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배려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품이 고결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내가 말씀에 꺾여 순종할 때, 그 초라한 친절이라는 옷을 입고 예수님이 그 영혼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보고 무너져 내린 것은 내 인격이 아닙니다. 내 부끄러운 순종의 옷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이 걸치신 낡은 겉옷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내가 내딛는 이 작은 순종 하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려내는지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묵묵히 쏟아부은 그 작은 헌신들, 형편에 쫓기면서도 뚝 떼어 드린 그 헌금들, 가슴을 쥐어뜯으며 참아낸 그 수많은 인내의 시간들이 그저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 육신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내가 한 일이 헛수고 같다고 느낍니다. 당장 눈앞에 열매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 손에 당장 결산서가 쥐어지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의 영원한 장부에는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 역시 자신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살려냈는지 천국 문을 열고 들어가서야 비로소 알았을 것입니다. 자기도 턱 빠지게 놀랐을 것입니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내가 그 사흘 길 중에 고작 하루 대충 훑고 지나간 그 일 때문에 이 수십만 명이 살아났단 말인가?" 아마 하나님 보좌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작은 순종일 뿐입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부여잡을 생명줄입니다. 나에게는 지나가는 길에 보탠 지극히 작은 수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절망에 빠진 상대방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됩니다. 나에게는 무심코 건넨 짧은 한마디에 불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던 영혼에게는 다시 일어서야 할 평생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며칠 전 밤에 기도하다가, 지난번 설교 때도 한번 나누었던 중국에서 만난 사업하는 형제 하나가 자꾸만 마음에 밟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위챗' 같은 기계 조작을 도무지 잘 못합니다. 아들에게 앱을 깔아달라고 부탁까지 해놓았는데도, 막상 혼자 다루려니 어떻게 써야 하는지 까막눈입니다. 화면을 들여다보며 이것저것 더듬거리다가, 그 사업하는 형제의 이름 석 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아, 이건가 보다.' 무작정 손가락으로 꾹 눌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친구 초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초대를 덜컥 보내놓고도 정작 문자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그저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녁, 그 형제에게서 장문의 답장이 날아왔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 방금 바이어 접대를 마치고 이제야 겨우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 이름과 말씀만 보아도 목이 메고, 꽉 막혔던 숨통이 확 트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로서 참으로 가슴 벅찬 고백을 덧붙였습니다. "목사님, 오늘 바이어와 큰 계약을 체결한 것보다, 목사님이 보내주신 이 문자 한 통이 백배는 더 기쁩니다."
여러분, 사업하는 사람에게 이 세상 최고의 기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도 한때 사업판에서 굴러보아 그 생리를 너무나 잘 압니다. 바이어를 만나 밀고 당기다 마침내 도장을 찍고 수주를 따내는 것, 사업하는 사람에게는 그것보다 짜릿하고 기쁜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피 튀기는 사업 전선에 선 그 사람이 고백하기를, 제가 보낸 문자 하나가 그 거대한 계약 성사보다 백배는 더 기쁘다고 말합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잘했습니까? 위챗 쓸 줄도 몰라 쩔쩔매다가, 화면 이것저것 잘못 눌러서 우연히 얻어걸린 것 아닙니까? 지극히 미숙하고 헐값에 불과한, 딱 그 정도의 저렴한 순종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어설픈 문자 한 통을 붙드시니, 그 사람에게는 수억 원짜리 계약서보다 더 거대한 하나님의 위로로 꽂혀 들어갔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일어납니까? 내가 내딛는 지극히 작은 순종 하나를 하나님이 손에 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가슴에 굳게 닫혔던 하늘 문이 활짝 열려버렸습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영혼의 억눌린 심령을 춤추게 만드는 일, 이것을 사람이 제 재주로 어찌 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부끄러운 순종의 발걸음을 뗄 때, 비로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사람의 마음을 뜯어고칩니까? 그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털끝 하나 손댈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빠지고 자라나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피투성이가 된 상한 심령을 우리가 도대체 무슨 힘으로 살려내겠습니까? 오직 우리가 엎드려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연약한 질그릇을 도구로 사용하셔야만 비로소 가능한 기적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자꾸 거창한 일만 벌여야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고약한 버릇이 있습니다. 수만 명이 운집한 대형 집회 강단에서 설교해야 대단한 사역이고, 개척교회나 시골교회 성도 대여섯 명 앉혀놓고 전하는 말씀은 시시한 일로 치부합니다. 수많은 군중 앞에서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야 큰 종인 줄 압니다. 수억 원, 수십억 원의 헌금을 턱턱 내놓아야 주님의 일을 크게 하는 것 같고, 비행기 타고 머나먼 오지로 날아가 뼈를 묻는 선교를 떠나야만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보십시오. 요나가 억지로 내뱉은 차갑고 메마른 한마디를 들어 쓰셔서 수십만 명의 영혼을 건져내시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보낸 짧은 문자 한 통, 성령의 부담에 꺾여 마지못해 누른 전화 한 통이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습니다.
크기를 재는 자의 눈금이 우리와 하나님은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사람의 숫자로 잽니다. "몇 명 앞에서 목청을 돋우었는가?" "통장에 찍힌 헌금 액수가 얼마인가?" "얼마나 먼 나라까지 날아갔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규모와 물량으로 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직 하나의 잣대로만 재십니다. "순종했는가, 순종하지 않았는가." 이것 하나만 보십니다.
내 눈에는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작은 순종이라도,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는 순간 죽어가는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터져 나옵니다.
그러니 제발 하나님께서 마음에 거룩한 감동을 찌르실 때, 세미한 생각을 불어넣으실 때 제때 알아차리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 줄 알아채고 즉각 엎드리는 순종의 습관이 몸에 배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는 영적 분별력이 열립니다. 자꾸 거절하고 핑계를 대면 성령의 불길이 꺼지고, 주님의 음성은 귓가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립니다.
강단에 와서 "목사님, 저는 도무지 하나님의 음성을 못 알아듣겠습니다" 하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음성을 분별하는 영적인 귀는 책상머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의 발을 뗄 때 비로소 귀가 뚫립니다. 그 음성을 한 번 따라가 보면, 다음번에 그분의 음성이 더 또렷하게 귓전에 울립니다. 반대로 한 번 거절하고 등을 돌리면, 다음번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하게 흐려져 버립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말씀하실 때마다 엎드려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순종하는 사람만이 성령의 음성에 끊임없이 예민해지는 법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선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갈라디아서 6:9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경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드릴 수 있는 가장 귀하고 복된 열매가 선이라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고의 선은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인간이 이 땅에서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선은 단 하나, 생명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건져낸 생명을 살맛 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숨통만 겨우 붙여놓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살려내고, 그 인생이 살맛 나도록 품어주는 것입니다. 겨우 목숨만 부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금 살아갈 소망을 품고 살고 싶어지도록 만들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최고의 선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뒤집어 보십시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흉측한 악은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영혼의 생명을 옭아매고, 나라는 존재 때문에 곁에 있는 사람의 삶을 살맛 나지 않게 짓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가증한 악입니다.
우리는 참 부끄럽게도, 내 아내와 내 남편을 가장 가깝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맛 안 나게 만드는 데 특화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조금 편하고 친하다 싶으면 얼마나 무례하게 굴고 거칠게 함부로 대합니까? 밖에 나가서는 그렇게 고상하고 점잖을 수가 없습니다. 남들에게는 깍듯하게 조심합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가장 잔인하게 상처를 쏟아붓습니다. 가까우니까 내 맘대로 해도 괜찮을 것이라 착각합니다. 이 사람은 결코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그 못된 안도감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한 영혼을 살려내고 그의 인생을 살아 숨 쉬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앞의 가장 거룩한 선입니다. 반대로 영혼을 옭아매고, 나를 마주치는 사람마다 살맛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짓은 하나님 보실 때 가장 흉악한 악질 중의 악질입니다. 그것이 영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악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살맛 나게 하는 거룩한 역사는 어디서부터 출발합니까? 오직 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순종의 결단이 아니고서는 죽어가는 생명을 건져낼 수도 없고, 사람을 살맛 나게 만들어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사랑해야지." 마음속으로 결심만 백날 해보아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결심이 몸뚱이를 움직이는 순종으로 번역되어 터져 나와야 비로소 사람이 살아납니다. 무거운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걸어야 합니다. 불편한 발걸음을 떼어 그 사람을 직접 찾아가야 합니다. 자존심을 다 구겨서라도 "내가 미안합니다" 하고 입을 열어야 합니다.
반대로 생명을 옭아매고 다른 사람의 살맛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리는 저주는 어디서 출발합니까? 불순종에서 시작됩니다. 지극히 명확합니다.
요나서 1장을 똑똑히 보십시오. 요나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낯을 피해 불순종의 길로 치달았을 때 어떤 참사가 벌어졌습니까? 요나 한 사람 때문에 그 배에 타고 있던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하기 일보 직전까지 내몰렸습니다. 그 배에 탔던 선원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선원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어디로 도망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손님 한 사람 배에 태웠을 뿐인데, 평생 모은 귀한 화물들을 바다에 다 집어던지고 애꿎은 목숨까지 바다 밑바닥에 내놓게 생겼습니다. 내 고집스러운 불순종은 결코 나 혼자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자신을 넘어 주변 사람들의 생명과 평온한 삶 전체를 발칵 뒤집어 흔들어 놓았습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입체적인 시청각 교재처럼 서늘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 3장에 들어서면 판이 완전히 뒤집히는 정반대의 역사가 터져 나옵니다. 요나가 비록 억지스럽고 투박할망정 발을 떼어 순종하자, 하나님의 진노로 사십 일 뒤 멸망이 예약되어 있던 수십만 명의 백성이 일제히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성경이 이 생명의 역사를 우리 눈앞에 똑똑히 보여주지 않습니까?
요나서 1장의 요나와 3장의 요나는 완전히 똑같은 사람입니다. 인격이 하룻밤 사이에 고결해진 것도 아닙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뿐이었습니다. 명령하신 그 자리에 발을 딛고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 오직 이 순종의 한 걸음 차이였습니다. 그 지극히 작은 순종 하나에 바다 위의 거대한 배 한 척이 뒤집히기도 하고, 사십만이 사는 거대한 대도시 하나가 통째로 살아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단 한 줄로 요약하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내 중심적인 시선을 걷어내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똑바로 바라보면, 성경 66권은 결국 순종과 불순종의 거대한 역사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창세기를 보십시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의 멍에를 멨습니다. 수많은 영혼들이 참된 생명의 살맛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으로 넘어오면 정반대의 역사가 펼쳐집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죄인들이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 의롭게 된 자들이 비로소 인생의 진짜 살맛을 되찾았습니다.
로마서 5:19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말씀 그대로입니다. 한 사람이 말씀을 듣지 않아 모두가 죄인이 되었고, 한 분이 아버지의 뜻을 들으셔서 모두가 의인이 되었습니다. 성경 전체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첫 사람의 불순종은 우리를 칠흑 같은 사망에 결박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풀어내셨습니다. 죄악은 우리에게서 인생의 참된 살맛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 영혼에 다시 살아갈 영원한 이유를 심어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가 도대체 어떤 자리입니까? 십자가란, 예수님의 처절한 순종이 나의 영원한 생명이 된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강단 앞에서 눈물로 찬양한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바치신 피 묻은 순종이 내 값없는 생명으로 뒤바뀐 거룩한 교환의 현장입니다. 이 십자가의 신비를 성도들에게 알리고 선포하기 위해 제가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순종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멈춰 섰더라면, 우리에게 돌아올 구원은 단 한 자락도 없었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 끝까지, 숨이 멎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가셨기에, 그분의 거룩한 순종이 고스란히 저와 여러분의 몫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내 힘으로 구원을 쟁취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천국 가기 위한 자격을 따내려고 아등바등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이루신 완전한 순종으로 우리가 값없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 순종해 드려야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고, 억지로 복종해야 복을 떨어뜨려 주시기에 계산기 두드리며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너무나 벅차고 감격스러워서, 그 사랑 앞에 내 영혼이 어쩔 줄 몰라 나도 모르게 무릎 꿇어지는 것. 이것이 성경과 기독교가 증언하는 진짜 순종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사랑을 구걸하고 받아내기 위해 억지로 순종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골고다에서 이미 쏟아부어 주신 사랑이 너무나 거대하여, 도무지 순종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나 혼자 생명을 챙겨 먹으려는 이기적인 순종이 아닙니다. 이미 거저 받은 하늘의 생명을, 내 곁에 죽어가는 이웃과 가족에게 흘려보내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순종의 발을 내딛습니다.
저는 로마서와 야고보서가 결코 다른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말과 순종으로 산다는 말은 완전히 같은 말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이 영혼 깊숙이 들어와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히면, 우리는 순종하지 않을 길이 없습니다. 도리어 순종하지 못하는 내 모습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가 싫어서 몸부림치는 괴로움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고 싶은데, 그 거룩한 부르심을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는 내 연약한 육신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고통입니다. 순종하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간절하기에 겪는 거룩한 진통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심령의 갈등을 통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 괴로움을 분별하십시오. 하나는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씀이 귀찮고 싫어서 내 고집대로 버티다 겪는 영적 체증입니다. 다른 하나는 말씀대로 살고 싶은 간절함은 굴뚝같은데, 내 연약함이 따라주지 않아 주님 앞에 엎드려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심령이 뒤엣것 때문에 아파하고 계신다면, 여러분 안에는 이미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 육신의 눈에 보입니까? 믿음은 눈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발걸음, 그 사람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온 세상 앞에 그 실체를 드러냅니다. 내 안에 진짜 살아있는 믿음이 숨 쉬고 있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삶의 자리에서 꺾이고 엎드려지는 순종의 열매로 증명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보십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주어졌다고 선포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두 번째 기회가 언제나 당연히 보장되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이 흘려보내야 할 사랑을 다음 기회에 전할 수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늘 입을 틀어막고 삼켜버린 용서와 베풂을 내일 행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마십시오. 요나에게 두 번째 기회가 임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가 예약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두 번째 기회가 그만큼 두렵고 희귀하며 값비싼 은혜였다는 뜻입니다.
오늘 차일피일 미룬 전화 한 통, 망설이다 삼켜버린 문자 한 통, 어쩌면 여러분 인생에서 영원히 다시 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상대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여러분이 먼저 주님 앞에 서든 말입니다. '오늘'이라는 이 단어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순종을 미룰 때마다 입에 달고 사는 핑계는 언제나 똑같습니다. "나중에 하겠습니다." "다음에 여유 생기면 하겠습니다." "상황이 좀 정리되면 그때 움직이겠습니다." 그러나 그 '나중'이라는 시간이 여러분의 인생에 반드시 찾아온다고 그 누가 보증해 주었습니까?
주께서 용서하라 하시면 오늘 엎드리십시오. 복음을 전하라 하시면 오늘 당장 입술을 떼십시오. "다 준비되면 하겠습니다"라는 비겁한 변명을 거두십시오. 오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찔림을 주셨다면 오늘 입을 열어 외치시고,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얼굴이 심령에 스쳐 지나간다면 오늘 당장 그 영혼의 안부를 물으십시오. 오늘 "사랑합니다" 하고 말해 주십시오. 오늘 "내가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십시오. 내가 속이 좁았다고, 다 내 탓이라고 먼저 입을 여십시오.
내 형편과 마음이 완벽해질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마십시오. "내 마음이 완전히 동하면 그때 하겠습니다" 하며 내일로 떠넘기지 마십시오. 비록 헐값에 불과한 저렴한 순종일지라도,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의 양심을 치실 때 바로 오늘 움직이십시오. 그 부끄러운 순종의 첫 발걸음을 하나님의 거룩한 손에 그대로 올려 드리십시오. 비록 억지로 내민 초라한 손길일지라도 주님의 손에 들려지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작은 순종을 통해 벼랑 끝에 선 영혼을 살려내십니다. 나라는 존재를 통해 누군가의 메마른 인생을 살맛 나게 만드시는 기적의 역사가 바로 그 떨리는 순종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대단하게 잘 드릴 필요 없습니다. 거창하고 거대하게 꾸며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내 손에 쥐어진 작은 것을 드리기만 하십시오. 그것을 들어 쓰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묵묵히 엎드릴 때,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땅에서 가장 고귀하고 선한 일을 감당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훗날 하나님 보좌 앞에 서는 날, 주님께서 우리를 품에 안으시며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그날 행한 그 작은 순종 때문에 한 영혼이 살아났단다." 그때 우리는 어리둥절하여 되물을지 모릅니다. "주님, 제가 언제 그런 대단한 일을 했습니까? 제 기억에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부족한 몸으로 말씀에 순종해보려 바둥거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 작고 부끄러운 순종을 통해 수많은 영혼들이 살아났고, 잿더미 같던 인생들이 살맛을 되찾았다고 칭찬하시며, 썩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 머리에 씌워 주실 것입니다.
골고다의 구레네 시몬이 놀라고 요나가 천국에서 턱 빠지게 놀랐듯이, 그날 우리 역시 하나님의 결산서 앞에서 깜짝 놀랄 것입니다. 내가 행한 것이라고는 펜을 내려놓고 건 전화 한 통, 자존심 꺾고 보낸 문자 한 통, "내가 미안합니다" 하고 먼저 쥐어짠 한마디뿐이었는데,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들어 영혼을 살리는 생명줄로 쓰셨다니 말입니다.
그러니 온전치 못하다고 주저앉지 마십시오. 비록 부족하고 저렴할지라도, 오늘 내게 주신 그 작은 순종을 주님께 올려드리는 우리 단비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