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디모데전서 5:8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십시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을 향해 엄히 경고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부모에 대한 공경과 가족 사랑을 단호하게 강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이상한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가르침과 전혀 달라 보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상식을 통째로 뒤집어엎는 듯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를 모아 놓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가르치시던 일을 멈추시고, 무리를 향해 대뜸 이렇게 물으십니다.
마가복음 3:3333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여러분, 이 말씀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보기에 따라서는 너무나 차갑고 야속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마치 가족을 무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어머니도 모르고 형제도 모르는 사람처럼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안티 기독교인들은 이 구절을 들먹이며 비난합니다. 기독교는 부모 자식도 모르는 몰상식한 종교라고 손가락질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정말 성경이 가르치는 가족 사랑과 충돌하는 말씀이겠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이 본문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자, 말 그대로 갈릴리 땅이 한탕 뒤집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병든 자를 만지시면 병마가 떠나갔습니다. 귀신 들린 자를 안수하시면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이런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터져 나오니,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얼마나 무리가 몰려들었던지, 예수님과 제자들은 식사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이 이 일을 보고 주님을 칭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뒤에서 이렇게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 하는 짓 좀 보게. 저거 귀신 들린 게 틀림없어." "지금 제정신이 아니야. 싹 미쳤어."
예수님이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과 기적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향해 미쳤다고 했습니다. 귀신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저런 짓을 벌인다고 비방했습니다.
이 흉흉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사렛에 있던 가족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비상이 걸린 가족들은 긴급 회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예수가 지금 어디 있다더냐, 당장 가서 끌고 오자." 그렇게 친족들이 직접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성경은 가족들이 찾아온 이유를 이렇게 단호하게 기록합니다.
마가복음 3:2121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제지하러 온 것입니다.
여기서 "붙들러 나왔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주님의 사역을 말리고, 억지로라도 집으로 끌고 가기 위해 찾아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응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주님이 목숨 걸고 걸어가시는 그 구속의 길을 막아서고, 사역을 중단시키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신 이 선포는 바로 이 치열한 영적 대치 속에서 터져 나온 말씀입니다. 결코 홧김에 던진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가족들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들의 불신과 의도를 정확히 꿰뚫어 보시고 던지신 단호한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한창 긴급 수술을 진행 중인 외과 의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수술실 앞까지 찾아와 문을 쾅쾅 두드립니다. "지금 급하니까 잠깐 나와 봐. 할 말이 있어." 하지만 의사는 끝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안 나오겠습니까? 가족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지금 자기 손끝에 달린 환자의 생명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급박하기 때문입니다. 가족이 문을 두드리며 나오라고 소리쳐도 나갈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짊어진 사명이 그만큼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결코 가족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역시 육신의 가족을 부정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가족이라는 이름과 혈연의 명분을 쥐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막아서려는 그 불신과 방해를 거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고 계시는데, 어찌 혈연에 매여 그 발걸음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잠시 멀리하신 것이지, 가족 관계 자체를 부정하신 게 아닙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 하신 이 말씀은 육신의 부모 형제가 이제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믿었으니 혈육을 다 버려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주님은 지금 '육신의 가족'이라는 땅의 모형을 마중물로 삼아서,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족'이 무엇인지를 가리키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육신의 가족을 재료로 끌어올려서, 하늘의 영원한 가족을 눈앞에 똑똑히 보여 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렇고 당대 유대인들도 그렇고, 부모가 무엇인지 형제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가족이 가진 그 진한 핏줄의 신비와 밀착함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가족'이라는 언어를 빌려 오셨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낯선 하나님 나라의 가족, 영원한 하늘 가족의 비밀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 이 서슬 푸른 선포를 던지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마가복음 3:3434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주님 곁에 둘러앉은 무리를 향해 선포하십니다.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보라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저 사람들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감상하라는 말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내 형제, 내 어머니, 내 가족을 보라" 하신 것은 이런 뜻입니다. "이제부터 내가 하나님 나라의 진짜 가족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줄 테니 똑똑히 주목하라." 영원한 하늘 가족의 비밀을 향해 회중의 시선을 집약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진 35절, 오랫동안 수많은 오해와 논란을 낳았던 구절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하늘 가족의 자격을 이렇게 단호히 선포하십니다.
마가복음 3:3535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자, 여러분.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심령에 은혜가 가득 차오릅니까, 아니면 가슴이 답답하고 턱 막혀 옵니까?
"나는 이 말씀이 참 은혜롭다"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옆에서 잘 돌봐 드려야 합니다.
이 말씀은 결코 단번에 "와, 은혜가 된다"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구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해야만 주님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고, 어머니가 된다는데, 이걸 듣고 평안하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이 말씀 앞에 서면 은혜는커녕, 가슴이 찢어지고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 답답합니까? 도대체 왜 가슴이 꽉 막힙니까?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100%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 그 거룩한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히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물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살아 간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커녕 내 뜻 하나도 제대로 못 다스리며 사는 비참한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는커녕, 당장 내 마음 하나 내 뜻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모습 아닙니까?
여러분, 주일에 와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찔려 회개가 터져 나옵니다. 그리고 속으로 단단히 다짐합니다.
"그래, 정말 말씀대로 살아야겠다. 오늘부터 당장 바꾸자. 이제부터는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겠다. 형제로 여기고, 용서하고, 아끼며 사랑하며 살리라."
주일 예배 자리에서 이런 다짐, 다들 참 많이 해 보지 않으셨습니까? 여기서 그런 결단 한번 안 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그 결심이 과연 얼마나 가던가요? 일주일은 고사하고, 이삼일은 유지됩니까?
이삼일이 웬 말입니까. 예배당 문을 나서서 주차장에 들어서는 순간, 그 단단했던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그게 바로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아멘" 하다가도, 집에 가서 배우자가 한마디만 거들면 그 "아멘"이 금세 "왜?" 하고 튀어나오지 않습니까? 아멘이 순식간에 노멘으로 바뀌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유에는 유통기한이라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결심에는 유통기한조차 없습니다. 찰나에 변해 버리는 우리 의지와 결단은 절대로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성도님 한 분이 간혹 예배가 끝난 뒤, 눈물을 흘리시며 제게 이렇게 고백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주일에 와서 말씀 들을 때는 정말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데, 삶으로 돌아가면 그게 안 되어서 너무나 괴롭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고개를 숙이신 채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그 성도님이 왜 그토록 괴로워하셨겠습니까?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성품이 온전하고 진실한 그분조차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다면, 과연 우리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겠습니까? 그분이 못 사셨다면, 도대체 이 중에 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자,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하신 이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우리 중에는 하나님 나라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뜻입니까?
여러분, 이 말씀은 결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실을 온전히 갖춰야 내 가족이 된다"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절대 그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조건이라면, 오늘 이 자리에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너희가 행실을 바르게 고쳐야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주겠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주님은 하나님의 진짜 가족이 어떤 존재인지를 우리 눈앞에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 조건을 갖춰야 가족이다"가 아니라, "진짜 하늘 가족은 바로 이런 삶의 열매를 맺는 법이다" 하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지금 가족이 되기 위한 자격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족이 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특징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 관점의 차이를 매우 깊이 있게 묵상하셔야 합니다.
사과나무는 사과 열매를 맺어야 비로소 사과나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래 사과나무이기 때문에 사과가 열리는 것입니다.
열매가 신분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그 나무의 숨길 수 없는 신분을 세상 앞에 증명할 뿐입니다.
이 차이가 가슴에 와닿으십니까? 열매가 신분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열매는 그 사람이 본래 어떤 신분인지를 투명하게 드러낼 따름입니다. 가지에 사과가 맺히는 것은 그 나무가 사과나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결과이지, 열매를 맺어야만 비로소 사과나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올해 사과가 열리지 않았어도, 그 나무의 본질은 변함없는 사과나무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100% 행해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이미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조금씩,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품이 삶 속에 삐져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노력과 자격으로 가족이 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태어나 보니 이미 가족이 되어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단비내리는교회 식구가 되기 위해 무슨 입학시험이라도 치르고 들어오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은혜로 만나 가족이 된 것 아닙니까? 가족이 되는데 무슨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 필요합니까? 그냥 생명으로 태어나면 무조건 가족입니다. 가족은 부모의 핏줄과 사랑이 만드는 것이지, 자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형제가 맞고 있을 때 몸을 던져 함께 싸워 주었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핏줄, 내 형제이기 때문에 발이 먼저 나가고 손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어머님이 아픈 자식을 곁에서 밤새워 간호했기 때문에 그제야 어머니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내 피를 나눈 자식이기에, 가슴이 아파 절로 밤이 새워지는 것입니다.
열매는 신분을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열매는 오직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지를 세상 앞에 선포할 뿐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가족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그 거룩한 신분이, 비로소 주님의 뜻대로 사는 행함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이미 그분의 영원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행함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조건도 아니고 자격도 아닙니다. 제가 볼 때 행함은 일종의 가족사진과 같습니다.
여러분, 가족사진을 왜 찍습니까? 가족이 되기 위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진을 같이 찍어야 비로소 가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족이기 때문에 함께 모여 사진을 찍는 것입니다.
사진이 가족이라는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진은 우리가 서로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세상 앞에 증명하여 보여 줄 뿐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성도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자꾸만 이렇게 곡해해서 읽습니다. "아,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완벽하게 행해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는구나."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오해입니다.
여러분, 진짜 가족이 누구입니까? 인생 살면서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가족입니까? 아닙니다. 가족은 넘어져도, 피투성이가 되어도 다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입니다. 돌아갈 품이 있는 사람이 진짜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 가족이 되기 위해 기어이 넘어 서야 할 높은 문턱이 아닙니다. 이미 은혜로 가족이 된 우리가 평생에 걸쳐 기쁨으로 배워 가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한번 자세히 보십시오. 마치 사진작가가 사람들을 쭉 둘러 세워 놓고 사진을 찍는 듯한 풍경입니다.
사진 찍을 때 보통 어떻게 합니까? "자, 다들 이쪽을 보세요." 하면서 구도를 잡습니다. "고개 약간만 돌리시고요. 중간에 계신 분, 약간 비스듬하니까 이쪽으로 조금만 움직이세요." 사진작가가 이렇게 자리를 정돈합니다. 그리고 자리가 딱 잡히면 뭐라고 합니까? "자, 웃으세요. 김치, 치즈, 아리아리." 그러면 다 함께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지 않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연출하시는 장면이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예수님이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 누구 행실이 좀 더 나은가 눈을 서슬 두슬 뜨고 살펴보시면서, "음, 너 합격, 너 불합격" 하면서 가족을 선발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은혜로 하나 된 가족의 모습을 회중 눈앞에 펼쳐 보여 주고 계신 것입니다. "바라라, 우리 하나님 나라의 가족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하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자매라" 하신 이 말씀은, 하늘 가족이 되기 위한 자격 조건을 제시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미 가족이 된 자들에게 나타나는 거룩한 단란함과 특징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제 확실히 이해가 되십니까? 이 말씀은 가족 자격시험 합격자 명단을 발표하는 서슬 푸른 판결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식구들을 한 프레임에 담아내시는 거룩한 '가족사진'을 찍고 계신 장면입니다.
"보라, 이들이 바로 내 가족이다."
누가 내 어머니냐 묻는 세상의 시선 앞에, 주님 곁에 앉은 자들을 지목하시며 말씀하십니까? "보라, 이들이 내 가족이다. 영원한 하늘 가족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주님은 이렇게 육신의 가족이라는 모형을 통하여, 영적인 하늘 가족의 영광스러운 실체를 선명하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자, 여러분. 우리 가족들에 대하여 한번 깊이 생각해 봅시다.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마음이 착착 맞아떨어집니까? 아니면 살다 보니까 자꾸 뜻이 맞지 않아 충돌이 일어납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가족들과 살아 보니 어쩜 그리 마음이 찰떡궁합처럼 잘 맞고 기분 나쁜 일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까? 아니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자체가 치열한 충돌의 연속입니까? 1번입니까, 2번입니까?
여기서 1번이라고 답하시면, 제가 또 옆에서 잘 돌봐 드려야 합니다. 당연히 2번 아니겠습니까?
가족이란 원래 충돌을 밥 먹듯이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실제로 가만히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가족입니다. 남보다 가족이 가장 많이 부딪힙니다.
요즘 저와 제일 많이 부딪히는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누구일 것 같습니까? 내 곁에 있는 내 아내이겠습니까? 이 사람과는 한 40년을 함께 살다 보니, 이제 싸울 만큼 싸워서 별로 부딪힐 것도 없습니다.
제가 요즘 누구와 가장 심하게 충돌하는가 하면, 저 뒤에 있는 우리 손주 민하하고 제일 많이 부딪힙니다. 눈만 뜨면 충돌합니다.
음식을 먹는 문제부터, 삶을 대하는 태도, 말을 건네는 말투 하나까지, 모든 부분에서 그 아이는 지금도 저와 부딪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하가 저에게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할아버지 미안해, 할아버지 죄송해요" 바로 이 말입니다.
왜 이 아이는 입에 이 말을 달고 살겠습니까? 방금 또 부딪혔다는 뜻입니다. 제 뜻과 자기의 욕구가 방금 팍 하고 충돌했다는 증거입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가족은 도대체 언제부터 충돌하기 시작합니까? 핏덩이 갓난아기 때부터 충돌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자마자 부딪히기 시작합니다.
아기가 왜 목놓아 울어 젖히겠습니까? 자신의 원함과 부모의 원함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당장 따뜻한 젖을 먹고 싶은데 엄마는 설거지에 정신이 없습니다. 아기는 축축한 똥기저귀를 빨리 갈아 달라고 비명을 지르는데 아빠는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바람과 부모의 행동이 부딪히니까 서럽게 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나 충돌하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는 싸울 일도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법입니다.
엄마와 딸을 한번 보십시오. 여기도 모녀지간이 많이 와 계시는데, 진짜 치열하게 싸우지 않습니까? 엄마와 딸이 세상에서 제일 친할 것 같지요? 아닙니다. 가족 구성원들을 들여다보면 엄마와 딸처럼 많이 싸우는 사이가 없습니다. 별것도 아닌 작은 일 하나를 가지고 날마다 티격태격합니다.
예전에 어떤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루는 저를 찾아오셔서 한탄을 하십니다. 자기 딸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잘한다는 것입니다. 남들에게는 그렇게 싹싹하고 친절한데, 유독 자기한테만 그렇게 가시돋친 듯 못되게 군다는 것입니다.
밖에서는 둘도 없이 착한 딸인데, 집에서 자기한테만 그렇게 못되게 군다면서 답답한 심정으로 저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목사님, 도대체 그 아이는 이 에미한테 왜 그러는 것일까요?"
제가 뭐라고 대답해 드렸을 것 같습니까?
"에미니까요."
그랬습니다. 권사님, 그 아이가 왜 에미한테만 그렇게 함부로 굴겠습니까? "목사님, 이유가 뭡니까?" "에미니까 그럽니다."
에미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바깥에 나가서 남들한테 에미한테 하듯 굴면 당장 돌 맞습니다. 엄마니까, 받아줄 사람이 어머니밖에 없으니까 그럽니다. 온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밑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 엄마 앞밖에 없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 딸이 어머니한테 그렇게 막 대해도 괜찮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엄마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서글픈 현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엄마니까 부딪히고 떼를 쓰지, 어디 낯선 곳에 가서 그러겠습니까?
제가 볼 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면, 저 아득히 높고 높은 보좌 위에 계신 엄위하신 분으로만 모셔 놓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는 오직 거룩한 찬송만 올려 드려야 하는 줄로 착각하며, 그렇게 거리감을 둔 채 바라보고 살아갑니다.
내 아버지, 내가 어떤 모난 말을 해도 다 받아 주시는 내 아버지, 때로는 내가 못되게 굴어도 끝까지 안아 주시는 내 진짜 아빠, 아바 아버지. 이렇게 하나님을 실제적인 아버지로 인격적으로 만나는 성도들이 너무나 희귀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삶의 태도는 그저 "저 멀리서 찬양이나 받으실 분"으로 대합니다. 찬양을 드리지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마땅히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창조주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거룩한 찬양을 받으실 분이 바로 누구이십니까? 바로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나님을 참된 나의 아버지로 만나고 계십니까?
이렇게 선포하면 "아이구, 목사님, 그건 하나님 앞에 너무 심한 표현 아닙니까?" 하고 거부감을 느끼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진짜 견딜 수 없이 힘들 때, 온몸이 찢기듯 아플 때, 그분 앞에 찾아가 떼를 쓰고 못되게 굴어도 다 받아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못되게 굴어도 괜찮습니다. 일부러 불효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녀이기에 그분 앞에서는 내 모든 밑바닥을 드러내며 못되게 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 천지에 내 아픔을 털어놓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을 때, 답답한 심정을 토해 낼 길이 없을 때, 아무도 내 서러운 말을 들어 주지 않을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통곡하고 떼를 쓰며 내 속마음을 다 토해 놓을 수 있어야 진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십 년이 넘도록 매일 아침 시편을 묵상해 왔고, 지금도 변함없이 시편을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묵상하다가—지금이야 그 깊은 뜻을 다 이해하지만—예전에는 시편 기자들의 기도를 읽으며 깊은 충격과 혼란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을 가만히 읽어 보십시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그저 경건하고 거룩한 찬송만 올려 드리지 않습니다. 물론 감사와 찬양을 고백하는 시도 많지만, 정작 수많은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 앞에 핏대를 세우고 나와 통곡하며, 따지고, 거세게 항의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이 지경으로 버려두시나이까?"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을 쏟아내는 기도가 지천으로 깔려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 시편 안에는 내가 정말 미워하는 원수를 향해 뭐라고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저 인간, 당장 쫄딱 망하게 해 주십시오. 저자는 망해야 마땅합니다. 망할 줄 믿습니다." 이 정도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 인간 하나로 그치지 않고, 저 집안 자손대대로 싹 다 망하게 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저들의 모든 자식들까지 저주를 받게 하소서." 여러분, 어떻게 거룩한 성경 안에 이런 무시무시한 저주의 기도를 버젓이 기록해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깊은 혼란 속에 갇혀 있었는데, 하나님의 영이 저를 강권적으로 사로잡으시고 말씀의 눈을 열어 주시자, 어느 날 문득 이 시편의 진의가 가슴으로 깨달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시편은 우리가 따라 해야 할 기도의 얌전한 '모범 답안'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짜 아버지로 만난 하늘의 자녀들이, 그 아버지와 나눈 지극히 솔직한 '대화'를 기록한 책이라는 사실을 탁 깨닫게 된 것입니다.
기형적인 문장으로 기도를 가르치는 교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만난 성도들이 그분과 삶으로 나눈 날것 그대로의 대화였습니다.
여러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어린아이가 밖에서 억울하게 맞고 돌아와 울음을 터뜨립니다. 그리고는 아빠 손을 꽉 잡고 현장으로 끌고 가며 뭐라고 소리칩니까? "아빠, 저 아이 좀 봐. 저 애가 나 때렸어. 쟤 가서 혼내 줘. 코피 터뜨려 줘. 나한테 너무 못되게 굴었단 말이야."
마치 어린 자녀가 자기 힘으로 어쩌지 못해 아버지에게 달려와 자기 고통을 원색적으로 일러바치는 것처럼, 시편 기자들도 자기를 괴롭히고 짓밟는 자들을 향한 서러움과 분노를 아버지 하나님께 거침없이 일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저주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사이에만 가능한 가장 밀착된 기도였습니다.

저는 이 시편을 통하여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깊이 배웠습니다. 원래 제 기도 스타일도 직설적이고 날것 그대로인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깊이 묵상하면서, 제 기도는 하나님 앞에 훨씬 더 가식 없는 직설적인 기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숨길 것도, 말하지 못할 비밀도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저는 이 시편의 고백들을 통하여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도 하나님께 참 강하게 기도하고 날것 그대로 표현하는 사람입니다만, 예전에 저는 명함조차 못 내밀 기도를 한 분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 기도를 듣고 완전히 항복했습니다.
어떤 성도님인데, 남편이 하던 중소기업이 단번에 망해 버렸습니다. 한때는 유복하게 잘살았는데,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산동네 월셋방을 전전하며 자식들을 데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극심한 경제적 결핍 속에서 뼈를 깎는 고통을 통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짧고 굵게 이런 기도를 쏟아냈습니다.
"하나님,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저도 자주 들어 본 기도라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터져 나온 일갈이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도 돈 없이 한번 살아 보세요. 얼마나 힘든지. 당신도 돈 없이 한번 살아 보세요."
저는 그 기도를 전해 듣고 속으로 무릎을 쳤습니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진짜 기도다."
그리고 저는 이 기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참으로 어마어마한 기도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6·25 전쟁 때 피난을 내려와 남한에 정착하신 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전쟁 통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몸으로 온갖 험한 고생을 다 하셨습니다. 그 피눈물 나는 세월 속에서 다섯 자녀를 홀로 키워내셨는데, 다 번듯하게 대학까지 졸업시키고 훌륭한 인재들로 양육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식들을 다 키워 놓고도, 연세가 드셔서까지 매일 교회에 나와 기도하시고, 불쌍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일평생 날마다 힘쓰신 일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 믿어야 산다고 평생을 전도하며 사셨습니다. 교회에서는 다들 성자라 칭송했고, 자식들도 그 어머니를 뼈저리게 사랑하고 존경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어느 날 길에서 전도를 하시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권사님이 쓰러지시자 온 가족과 교회가 충격을 받고 날마다 눈물로 회복을 위해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평생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어머니를 가슴에 품고 있던 큰아들의 심정이 완전히 찢어졌습니다. 의식을 찾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며 고통스러워하던 아들은, 그날 밤 병원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소리쳐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정말 우리 어머니한테 이러시면 하나님 천벌 받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말입니다. "우리 어머니 이렇게 버려두시면 하나님 천벌 받으십니다." 그렇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어 보면 당장 천벌을 받아 마땅한 기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이 기도를 전해 듣는데 왜 이리 눈물이 쏟아졌을까요? 겉으로 보면 천벌 받을 소리 같은데, 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일평생 주를 위해 헌신한 어머니의 삶과, 그 어머니를 가슴에 안고 울부짖는 아들의 찢어진 마음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인지 몰라도, 얼마 후 그 어머니가 기적처럼 털고 일어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 그러나 여러분, 절대로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이런 거친 기도가 훌륭하다거나, 너도나도 이런 기도를 똑같이 따라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문장 그대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선포하고자 하는 핵심은 기도의 '테크닉'이나 '문장'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까?
시중에 떠돌아다니는 '기도 응답 받는 비법' 같은 책들, 오늘 집에 가셔서 싹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무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교인들 집에 가 보면 기도의 비결이니 공식이니 하는 책들이 수두룩하게 꽂혀 있는데, 다 집어치우십시오.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기도는 결코 비법이나 문장의 화려함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관계 앞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가, 바로 그 관계의 신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거래 대상이 아니라 진짜 아빠 아버지로 만나고 있느냐, 그것이 본질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본받으라고 외치는 것은 이분들이 뱉었던 자극적인 언어나 시편 기자의 원색적인 기도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짜 내 아버지로 만나고, 내 영원한 가족으로 만나서, 숨김없이 대화하며 살아가는 그 인격적인 관계를 본받으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오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자매요,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짓눌리는 부담감을 느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답답한 부담이 밀려옵니까?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성경은 무엇으로 풀어내야 합니까? 오직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는 성경으로 가늠해야 합니다. 성경을 무엇으로 해석한다고요? 오직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40절을 보면, '아버지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당신의 음성으로 직접 선포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6:4040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명확히 짚어 주시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아들을 보고, 그분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족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세상의 조건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믿어 영생을 누림으로 그분의 거룩한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구절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답을 주십니까? 바로 예수를 진실하게 믿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라 밝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도덕적 기준을 잔뜩 높여서 하나님 앞에 어떤 대단한 행위를 바쳐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신뢰하고 믿는 것, 그것이 가장 선명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삶입니다. 주님을 믿으며 그분 안에 거하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이 된 근거는 나의 보잘것없는 행함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 때문입니다. 복음의 능력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열매나 자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듭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가족사진'입니다. 복음은 세상에서 방황하던 우리를 모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만드신 구속의 사건이며, 주님의 교회는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가족사진입니다.
저는 마음이 가끔 울적해지면, 사무실 벽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함께 환하게 웃으며 찍었던 우리 교회 가족사진입니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마음속 깊은 곳에 답답함과 우울감이 밀려올 때, 저는 그 달력 사진 앞에 한참을 서 있곤 합니다. 사진 속 여러분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다들 무슨 좋은 일이 그리 많으신지, 너무나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그 웃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제 아들이 아주 어릴 때가 떠오르곤 합니다. 세상일이 잘 안 풀리고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잠들어 있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습니다.
내 뜻대로 일이 안 풀리고, 미래가 아득하고 답답할 때, 내가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였습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가만히 자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그 아이의 얼굴이 저에게 말해 주는 듯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왜 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만히 일러주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인 여러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도 똑같습니다. 내가 담임목사로서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이 하늘 가족들을 위해 내가 어떻게 목양해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제 마음을 짓누르던 답답함과 우울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단순한 종교 단체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가족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우리 교회에는 물론 없겠지만—누군가를 향해 이런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아이고, 저 사람 정말 보기 싫다. 보기만 해도 불편하다. 우리 교회에서 저 사람만 딱 없으면 정말 좋겠다. 저 사람 때문에 성전 문을 들어서기가 싫다." 살다 보면 이런 마음이 삐죽삐죽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짜 혈육과 살아가면서도 마음에 안 들고 속을 썩이는 식구가 있지 않습니까? 저 역시 제 친가족들로 인해 수십 년 동안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왔기에 그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가족이란 언제나 서로를 행복하게만 해 주고, 언제나 완벽하게 이해해 주는 관계가 아닙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깊은 상처를 주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가 바로 가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꼴 보기 싫다고 소리치고 마음에 안 든다고 외친다고 해서, 내 핏줄 내 형제가 남이 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꼴 보기 싫어도, 미워도 가족은 끝까지 가족입니다.
우리는 '단비내리는교회'라는 거룩한 공동체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 발걸음으로 찾아와 스스로 선택해서 가족이 된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를 내가 선택한 적도 없고, 곁에 있는 성도를 내 취향대로 고른 적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하늘의 가족으로 묶어 놓으셨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내 기준, 내 취향으로 성도를 판단하고 선을 그을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주님께서 친히 피로 맺어주신 영원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안에는 동일한 한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피가 흐르고 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여기 앉아 계신 여러분 모두가 저에게 똑같이 예뻐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제 마음이 더 많이 가는 성도가 있고, 때로는 마음에 안 차는 성도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감정이 어떠하든, 우리가 한 피를 나눈 가족이라는 영적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영원한 가족입니다.
여러분, 집에 걸린 가족사진을 유심히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가족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들 표정도, 사는 모습도 제각각입니다. 환하게 웃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짝 얼굴을 찌푸린 사람도 있습니다. 잘나가는 식구가 있는가 하면 마음의 상처를 안고 힘겹게 살아가는 식구도 있습니다. 온 집안의 귀염둥이인 철없는 아이도 있고, 사진작가가 셔터를 누르는데 딴 데를 두리번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각양각색으로 다 다른 사람들에게 단 하나, 절대로 변하지 않는 동일한 진실이 있습니다. 무엇이 똑같겠습니까? 못나든 잘나든, 모두가 한 아버지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훗날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천국에 들어가는 바로 그날, 주님이 우리를 처음 맞아주시는 곳은 차가운 법정이 아닙니다. 바로 영원한 '가족사진' 앞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 도성에 들어서면 주님께서는 "다 이쪽으로 모여라" 하시며, 우리를 한자리에 품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나의 영원한 신부다. 어서 이 양들이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로 나와서 다 함께 가족사진을 찍자."
이 땅에서 혼인 잔치가 끝나면 온 집안 식구가 모여 사진을 찍듯이,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혼인 잔치가 끝나는 그날, 주님은 우리 모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모이라고 명령하실 것입니다. 왜 부르시겠습니까? 영원한 가족사진을 찍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그분의 피 맺힌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이 가족사진 안으로 들어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예식이 끝나고 일가친척이 다 함께 모여 가족사진을 찍는데, 한 친척 친구가 저 멀리 뒤편에서 쭈뼛쭈뼛하며 서성이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카메라 프레임이 잡히자 슬그머니 빠져나가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그 친구를 불렀습니다.
"이리 와, 같이 사진 찍어."
그 친구가 왜 사진 찍는 자리를 피하려고 했겠습니까? 사업에 실패해 실업자가 되고, 이혼의 아픔까지 겪다 보니 자기 모습에 너무나 자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번듯한 친척들 사이에 서서 가족사진을 찍는 자기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가가 다시 불렀습니다.
"빨리 와. 내 옆에 서. 같이 사진 찍자."
못나고 초라해도 가족은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훗날 천국에 들어섰을 때, 이 땅에서 주를 위해 멋지게 살아온 사람도 있겠지만, 연약하고 엎어져서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성도도 틀림없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이 "어서 와서 나와 함께 가족사진 찍자" 하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저는 자격이 없어서 아닌 것 같습니다" 하고 뒤로 물러서며 피할 때에도, 주님은 "아니다, 어서 오라" 하시며 기어이 그 영광스러운 가족사진 한가운데 우리를 앉히실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하십니까?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의 스펙을 따지고, 여러분의 이름을 이 땅의 기록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사진 안에 또렷이 담긴 여러분의 모습은 세상 그 무엇도 절대로 지울 수 없습니다. 세상은 내 이름을 마음대로 짓밟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이라는 그 거룩한 프레임 안에 찍힌 나를 결코 지워낼 수 없습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내가 하나님의 가족사진 안에 또렷이 촬영되어 있다는 그 영적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팍팍한 세상을 넉넉히 이겨내는 단비와 같은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이 영광스러운 사진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저는 교회의 달력을 볼 때마다 늘 가슴으로 확인합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믿음이 당차고 좋은 사람도 있고 때로는 낙심하여 떨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주님의 눈으로 보면 다 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달 달력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훗날 천국에서 영원한 가족사진을 찍을 때, 이 사진 속에 찍힌 우리 성도들 중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족의 품을 떠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내가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사진 안에 당당하게 그 얼굴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주치는 곤핍과 궁핍과 고난과 시련, 그 수많은 절망의 벽 앞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가족이다"라는 이 위대한 신분 하나로 다 이겨내어 승리하고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거룩하고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