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25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26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27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28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가 이 복음서를 기록할 당시, 초대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한 공동체로 섞여 들어가던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수천 년 쌓여 온 종교적 가치관과 문화적 세계관이 격렬하게 충돌했습니다. 아주 혼란스럽고 복잡한 시기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대립했습니다. 누가 참 신자이고 누가 가짜인가? 누가 알곡이고 누가 가라지인가? 이것을 놓고 매일같이 첨예하게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충돌의 뿌리에는 언제나 이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수도 없이 드리는 말씀입니다. 모든 충돌의 자리에는 어김없이 이 한마디가 들어앉아 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우리가 맞고, 너희들은 다 틀렸다. 너 때문에, 당신 때문에."
이것이 죄에 매여 있는 인간이 드러내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늘 "너 때문에", "당신 때문에", "너희 때문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에서 터져 나온, 죄의 가장 강력한 본질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찌하여 먹지 말라 한 그것을 따 먹었느냐?" 그때 이 인간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저 여자 때문입니다." 하와는 또 뭐라고 합니까? "저 뱀 때문입니다."
죄인의 특징은 명확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은 변호하고, 타인은 정죄합니다. 상대방을 고발합니다. 그런데 그 고발조차도 결국은 나 하나 지키겠다고 하는 짓입니다. 인간의 본성, 이 죄의 본성은 늘 나를 변호하기 위해 타인을 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 여자 때문에", "저 뱀 때문에"라는 말은 나를 변호하기 위해 상대를 찌르는 정죄의 칼날입니다.
죄의 속성은 참 묘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훌륭한 '변호사'가 되고, 타인에 대해서는 서슬 푸른 '검사'가 됩니다.

어느 집 남편이 퇴근하고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아 텔레비전을 봅니다. 싱크대를 보니 설거지거리가 수북하게 쌓여 있습니다. 아내가 한마디 건넵니다. "여보, 오늘 설거지 좀 해줄래요?"
그러자 남편은 듣자마자 자기 변호에 들어갑니다. "내가 오늘 회사에서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호입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 말을 받아칩니다. "나도 하루 종일 힘들었어요. 집안일 하고 애들 돌보느라 나도 힘들어 죽겠단 말이에요. 설거지 좀 해줘요."
남편이 다시 찌릅니다. "나는 돈 벌어오잖아! 내가 돈 벌어와서 우리 가족 먹여 살리는데!"
아내도 속이 상해 돌직구를 날립니다. "돈 벌어오면 다예요? 어째 남자가 돼서 한 번을 안 져줘?"
결국 스트레스를 주체하지 못한 남편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르며 문을 차고 나갑니다. "내가 이래서 이 집구석에 들어오기가 싫다니까!"
나가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아내가 소리칩니다. "들어오지 마! 누가 겁낼 줄 알아?"
여러분, 보십시오. "설거지 좀 해줄래요?"라는 이 짧은 한마디를 가지고, 지금 이 가정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쉼 없이 검사놀이, 변호사놀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 동안,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이 검사놀이, 변호사놀이 톡톡히 하고 오신 분들 꽤 계시지요?
인간이 그렇습니다. 자기의 죄와 허물에 대해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변호사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죄와 허물 앞에서는 예리한 검사가 되어 지적질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미안해, 내가 할게."
이 한마디면 그 가정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뀔 터인데, 우리는 이 한마디 배우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듭니까?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숨통을 막히게 하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우리에게 이 모습이 더 진하게 남아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죄는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을 문제로 만들어 버립니다.
문제가 일어나면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문제는 그대로 둔 채 "네가 문제야" 하면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세웁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늘 꾸물거리고 늦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 아내에게 남편이 말합니다. "시간 없어. 빨리 준비해."
여러분,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이것은 단지 사건이고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늦었으니 빨리 준비하라는 말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늦으면 빨리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현상을 말하는 것이기에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는 현상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반드시 사람을 향해 찌르고 들어갑니다. "당신은 도대체 시간 개념이 없어." 꼭 이렇게 사건을 넘어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향해 나아갑니다. 조금 빨리 서두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시간 개념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것이 부끄럽게도 저희 집에서 참 자주 펼쳐지는 풍경입니다.
이처럼 죄는 사건과 현장에서 멈추는 법이 결코 없습니다. 늘 사람을 향해 공격하는 쪽으로 뻗어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죄는 "지금 당신에게 무슨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고 묻지 않습니다. "당신은 도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 모양입니까?"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참 무섭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라고 사정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는 도대체 어떤 인간이냐?" 하고 죄는 늘 취조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따스하게 묻지 않고, "너라는 인간은 왜 그 모양이냐" 하며 정죄하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 바로 죄의 속성입니다.
죄는 늘 사람을 향합니다. 죄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을 심판하고 단죄합니다. 우리가 평생을 그렇게 살며 서로를 아프게 해왔습니다.
이것이 여러분, 죄가 가진 참으로 무서운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알곡과 가라지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니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2929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저와 여러분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온전하게 구별할 능력이 도무지 없다는 것입니다.
가라지 하나 뽑아내겠다고 덤비다가 소중한 알곡까지 다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라는 말씀입니다. "너희에게는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할 능력이 없다. 선과 악을,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가름할 실력이 없으니 제발 그 일에서 손을 떼라." 주님은 지금 우리에게 이 엄중한 사실을 선언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분명하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우리는 알곡과 가라지를 딱 알아볼 능력이 내게는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 눈에는 훤히 다 보일 것만 같습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하고 거듭 경고하셔도 속으로는 딴소리를 합니다. "주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는 딱 보면 압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딱 보면 저 사람은 알곡이고 저 사람은 가라지인 게 제 눈엔 다 보입니다." 이런 오만한 마음이 저와 여러분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가끔 성도님들 중에 이런 말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들 눈에는 안 보여도, 내 눈엔 다 보여요." 다들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당신은 속아도 나는 다 알아."
사실 이것은 제 인생의 18번 레퍼토리였습니다. 저 역시 이 교만한 말을 얼마나 입에 달고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가끔 이 고질병이 도져서,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밖으로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못 봐도 내 눈엔 다 보여." 우리가 다 이렇게 살아갑니다.
여러분, 남들에게는 전혀 안 보이는데 내 눈에만 자꾸 무언가가 보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남들에겐 안 보이는 게 내 눈에만 보이는 상태를 우리가 보통 뭐라고 부릅니까?
귀신 들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귀신 들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꾸 남들이 못 보는 것을 봤다고 우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하고 물으면, "아냐, 내 눈에는 똑똑히 보여." 하면서 계시라도 받은 양 행동합니다.
예전에 기도를 참 많이 하신다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입만 열면 자꾸 무언가를 보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이것도 봤습니다. 저것도 또 봤습니다." 이렇게 끝도 없이 자랑하시기에, 제가 작정하고 그분에게 단호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도님, 자꾸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은 신령한 게 아니라 귀신 들린 것입니다."
차마 뒷말까지 다 뱉지는 못했지만, 제 마음속 진짜 뜻은 이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자꾸 무언가를 봤다면서 자신이 남들보다 신령한 믿음을 가졌다고 착각하는데, 제 눈에는 그렇게 행동하는 당신의 모습이 귀신 들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나마 참고 참아서 아주 고상하게 돌려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단순히 그분이 남들이 보지 못하는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자꾸 무언가를 보았다고 외치면서, 자기는 남들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처럼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하나님이 마치 자기에게만 특별한 신통력을 주신 것처럼 늘 뻐기고 다녔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이라는 표현이 딱 두 군데 나옵니다.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묶어주신 이 하나 됨을 너희가 인위적으로 깨뜨리지 말고 끝까지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공동체를 상처 입히고 결합을 깨뜨리면서, 온갖 독한 말과 비수 같은 행동으로 교회를 손상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믿음이 아주 좋다고 착각합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면서 자기가 신령하다고 착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귀신 들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저와 여러분을 알곡으로 부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알곡이라는 소중한 존재로 불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알곡으로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그 일에 애쓰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늘 남의 가라지를 찾아내는 데만 온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저거 가라지야. 저 사람 틀림없이 가라지야."
가라지를 발견해 내고, 그 가라지를 손가락질하며 정죄하는 것을 무슨 거룩한 사명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신자들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참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똑같지 않습니까? 마음속에서 성질이 솟구쳐 오를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알곡이 되어야 하는데 왜 내 안에서 이런 가라지 같은 모습이 나오는가'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도리어 나를 화나게 만든 상대방의 가라지 같은 모습만 눈을 부릅뜨고 쳐다봅니다. "저 인간, 틀림없이 가라지야." 마치 눈에 불을 켠 가라지 사냥꾼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하루하루를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알곡됨을 귀하게 여기며 알곡으로 자라가기를 몸부림치는 사람보다, 남의 가라지 사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야말로 '가라지 찾기 전문가'들입니다.
이런 분들은 입만 열면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가짜야. 저 사람 진짜 믿음 없어.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해? 저거 다 위선이야. 아이고, 또 저러는 것 좀 봐. 정말 보기 싫어 죽겠어."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대상으로 그렇게 가라지 타령을 하며 손가락질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지금 제가 참으로 무서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섬기고 의지하고 믿는 신자가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턱 하니 앉아서 그 무서운 심판관 노릇을 일삼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이 바로 사탄이 하는 짓 아닙니까? 사탄이 정확히 그 짓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하나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 가려내겠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반역이며, 무서운 우상숭배입니다.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영역이니 너희는 제발 손을 떼라,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가라지 사냥꾼 노릇을 제발 좀 멈추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배운 사람들일수록 이 짓을 더 잘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사람일수록 남 정죄하는 일을 더 교묘하게 잘합니다. 정작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알곡으로 익어가는 데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면서, 늘 남의 가라지만 탓하며 자기 의를 드러내려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섭고 위험한 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하는 일은 오직 누구만 하실 수 있다고 말씀합니까? 주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가라지 감별사로 부르신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람을 감히 분별하고 "이 사람은 이렇다, 저 사람은 저렇다" 하고 단정할 수 있는 자격이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입니다.
사무엘상 16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6:7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다 잘 아시는 말씀 아닙니까?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전에 어떤 학교에서 있었던 실제 이야기 하나를 해드리겠습니다.
어떤 선생님이 지각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 한 명을 주시했습니다. '아, 저 녀석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 이번에 회초리를 단단히 들어야겠다.' 선생님은 그렇게 마음을 먹고 회초리로 아이의 종아리를 때렸습니다.
어쩌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같이 지각을 일삼으니, 그 아이 안에 불성실함이 뼛속까지 몸에 배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참된 교육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제대로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다 싶어 회초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아침, 선생님이 출근길에 운전하고 가다가 창밖으로 그 아이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병색이 깊은 아버지를 휠체어에 모시고 요양시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선생님은 그제야 깨달았던 것입니다. 아이는 본성이 게으르고 불성실해서 늦은 것이 아니라, 아픈 아버지를 홀로 돌보느라 매일 늦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도착한 선생님은 곧바로 그 학생의 생활기록부를 열어보았습니다. 가족란에는 단 두 사람만 적혀 있었습니다. 병든 아버지와 그 아이.
알고 보니 그 요양시설은 아침 정해진 시간에만 보호자 입실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아이는 학교에 늦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아버지를 수발할 사람이 세상에 그 아이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기록부를 확인한 바로 그날도 아이는 어김없이 지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교무실로 들어온 아이는 선생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바짓단을 올려 종아리를 걷었습니다.
그 순간, 선생님은 들고 있던 회초리를 오히려 그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바짓단을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얘야, 정말 미안하다. 이 선생님이 참으로 부끄러워 네 얼굴을 볼 수가 없구나. 내가 정말 잘못했다."
그제야 진실을 알게 된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선생님이 왜 이런 가슴 아픈 실수를 저질렀겠습니까? 왜 이런 실수를 했습니까? 선생님이 악하거나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이 선생님은 단지 아이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 뒤에 숨겨진 아이의 깊은 사정과 아픔은 전혀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 까맣게 모른 채, 겉모습만 보고 "저 녀석은 원래 저런 놈이다" 하고 단정해 버렸기에, 아픈 아이의 가슴에 더 큰 칼을 꽂는 실수를 자기도 모르게 범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다가 문득 옛날에 읽었던 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그 선생님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구나. 우리가 매일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늘 남의 겉모습과 말투와 행동만 보고 손가락질하는데,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드러난 표면만 보고 심판해 버리는데.'
우리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투나 행동 하나만 보고 "저 사람은 원래 저런 인간이 틀림없어" 하고 제 마음대로 규정해 버립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규정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곧바로 그 사람을 향한 규탄과 정죄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체로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하는 그 뒤에는 다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의 연약함과 고통, 그리고 눈물이 다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릅니다. 어떤 DNA를 가지고, 어떤 약함을 안고 살아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 사람의 단 한 부분만 보고 "난 다 알아"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마귀 짓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간단 말입니다. 그의 고통과 아픔, 그 눈물과 사정은 보지 못합니다. 그저 그가 했던 말과 태도, 그 눈빛만 봅니다. 그리고는 "저 인간은 원래 저런 인간이야." 이렇게 규정하고 규탄해 버립니다.
죄는 사정을 듣기 전에 판결합니다. 죄는 이유를 듣기 전에 정죄합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한 장면만 딱 보고 인생 전체를 판독해 버립니다. 다 아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그 한 사람의 태어남부터 죽음까지, 한평생 전체를 보시고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한순간을 가지고 한평생을 재단하지만, 하나님은 한평생을 통으로 보시며 기다리십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결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은 빨리 판단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머리가 잘 돌아가고, 뛰어난 직관력으로 척척 판단하는 것을 두고 믿음이 좋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빨리 판단하는 능력은 신앙의 결정체가 아닙니다. 진짜 신앙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오래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 사정까지 통찰하며 바라보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나 통하는 법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다릅니다. 겉모습으로 짐작하는 능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형편과 사정, 그 연약함을 바라보고 기다려 주며 품어 주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행동 뒤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더 자주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눈은 '명태 눈'입니다.
우리 눈은 명태 눈입니다. 제가 보니 "나는 잘 본다" 장담하는 사람일수록 명태 눈일 가능성이 큽니다. "저 사람보다는 내가 잘 보지." 이런 사람일수록 진짜 명태 눈이 맞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새로 오시는 분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예측을 하곤 합니다. '이분은 우리 교회에 정착할까, 다음 주에 안 나올까?' 만나 보면 '아, 이분은 틀림없이 다음 주에 안 나오겠구나' 싶고, 어떤 분은 '하나님이 보내 주신 일꾼이구나' 싶습니다. 본능적으로 예측이 되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으십니까?
문제는 이 예측이 맞은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기 계신 여러분을 보십시오. 전부 안 다닐 것 같던 분들만 앉아 계시지 않습니까? 참 신기합니다. '이분은 계속 있겠지' 했던 분은 이 자리에 거의 없습니다. 도리어 '한두 주 다니다 안 오겠구나' 했던 분들만 자리를 채우고 계십니다.
우리 성도님 한 분이 처음 오셨을 때가 기억납니다. 머리에 이상한 두건 같은 걸 푹 눌러쓰고 오셨지 않습니까? 한눈에 봐도 독특한 차림의 성도님이 딱 앉아 계시는데, 제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한 줄 아십니까? '아이고, 저분은 절대 다음 주에 안 나온다.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렇게 혼자 지레짐작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물어보니, 그때 들었던 그 설교가 인생 설교였다고 합니다. 당시 요양병원 어르신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서 똥 냄새도 나고, 치매로 왔다 갔다 하는 분들 속에서 드린 예배였는데도, 거기서 초대교회를 느꼈다고 고백하더라고요.
여러분, 사람 눈은 진짜 명태 눈입니다. 저는 그분이 안 올 줄 알고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편하게 다니시다가 안 나오셔도 됩니다."
명태 눈이 맞지 않습니까?
저는 목회를 하면서 하나님께 이 고백을 참 많이 드렸습니다. "주님, 제 눈은 명태 눈이 맞습니다. 저는 보지 못하니, 보시는 주님이 저를 통해 보아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간단합니다. 가라지가 너무 소중해서 뽑지 말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눈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뽑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 눈이 정확하다면, 주님처럼 정밀하다면 뽑아도 됩니다. 그러나 우리 눈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뽑지 말라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 가라지를 함부로 뽑지 말라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알곡을 가라지 곁에서 키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라지 한가운데서 알곡을 키워 나가십니다. 심지어 우리 마음 안에도 가라지를 남겨 두셔서, 그 가라지를 통해 우리를 성숙시켜 가십니다. 가라지 밭 속에서 하나님은 알곡인 우리를 진짜 알곡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삼십 절을 보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3030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둘 다 함께 자라게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추수 때까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알곡들을 결코 온실 속에서 키우시는 법이 없습니다.
알곡은 가라지가 없는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와 치열하게 부딪히는 현실 속에서 자라며, 더욱더 알곡다워집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몇 달 전에 제 아들 내외가 찾아왔습니다.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우리 손주를 기독교 대안학교에 보내면 어떨까 고민하길래 물어왔습니다. 그때 제가 뭐라고 했겠습니까?
"아버지는 집 가까운 학교에 보내는 걸 추천한다." 그냥 그렇게 말했습니다. 간단하게요. "물론 결정은 너희가 하겠지만, 아버지는 집 가까운 학교 보내는 걸 추천한다."
여러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기독교 대안학교가 잘못되었다거나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기독교 대안학교도 분명히 그 나름의 역할이 있고,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확신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알곡들끼리 모여 있다고 더 알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지와 공존하는 거친 현실 속에서 알곡은 더욱더 단단해집니다. 주님이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교회의 빛이다, 소금이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알곡은 가라지 밭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라지 속에서, 가라지 옆에서 자라나야 진짜 알곡이기 때문입니다.
알곡은 온실 속 알곡끼리 모여서 자라지 않습니다. 가라지 속에서 자랍니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랑 친한 사람, 코드 딱 맞는 사람들만 모이면 삶의 깊이에 한계가 옵니다. 절대로 더 깊어지지 않습니다. 본능적으로는 나와 맞고 편한 사람하고만 함께 있고 싶어 합니다. 저도 똑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게 만난 관계 속에서는 결코 깊은 영성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나하고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을 주 안에서 만나고, 품고, 기도하고, 몸부림치는 그 현장에서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여러분, 솔직히 우리는 예수님과 코드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알곡이 알곡끼리만 만나서는 절대로 알곡답게 자라지 못합니다. 이 말은 결국 성장이란 반드시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가라지가 내 안에도 있고 밖에도 가득한데,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통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나 혼자 있어도 내 안의 가라지 때문에 고통스러운 법입니다. 하물며 온통 가라지 밭인 세상 속에서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에는 영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반드시 따라옵니다. 형통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막힘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기쁨의 찬송을 부르다가도,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서 애통의 탄식이 터져 나오는 날이 반드시 찾아오는 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삶에서 힘든 일을 만나셨습니까? 결코 여러분이 예수를 잘못 믿어서 힘든 일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잘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힘든 일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입니다. 누구나 아프고, 누구나 죽음을 마주하며, 누구나 가난해지고 결핍을 느낍니다. 누구나 힘든 일을 만납니다.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이 고생을 하는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이 길을 지나갑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찾아오는 고통을, 마치 물이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밀려올 때마다, 어디 이상한 데서 잘못 들어가지고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곤 합니다.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그럴까? 교회 봉사를 열심히 안 해서일까? 기도가 부족해서, 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벌을 내리시는 걸까?"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죄다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일을 만나고 고통을 겪는 것은 예수를 잘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살아보니 기도가 부족한 사람만 이런 일을 겪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기도가 과하다 싶을 만큼 뜨거운 사람들이 이런 시련을 더 깊게 만나기도 합니다. 누구나 만납니다. 전부 다 겪는 일입니다.
우리가 자주 부르는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대목이 있지 않습니까?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내 앞에 어려운 일 보네
— 찬송가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찬송입니다. 찬송가 가사조차도 그렇게 노래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 수준 낮은 인간의 이성으로 함부로 지레짐작하고 해석하려 들지 마십시오. 그저 겸손히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어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여러분, 제 지나온 삶을 돌아보아도 이런 시련과 고단함은 단 한 순간도 끊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서 이상한 신앙을 배워 와서, 어려운 일만 터졌다 하면 무조건 기도로 싹 뒤엎어 버리려고만 합니다. "기도하면 다 해결된다" 하면서 말입니다. 문제만 만나면 기도원으로 달려가 뒤엎으려 들고, 그러다 어쩌다 하나 해결되면 그걸 가지고 믿음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기도는 모든 문제와 모든 불편을 제거해 주는 주문이 아닙니다. 모든 고난을 한순간에 형통으로 바꾸는 기술도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 앞에 내 뜻을 온전히 굴복시키는 아름다운 항복입니다.
나를 굴복시키는 자리가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달라고 떼쓰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 고집을 하나님의 뜻 앞에 꺾고 항복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그 자리가 진짜 기도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자꾸 환경이 바뀌는 것만을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경을 그대로 두신 채, 그 환경을 견디고 마침내 이겨내는 우리 자신을 자꾸 바꾸어 가십니다.
환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환경을 바꿔 달라고 자꾸 부르짖지만, 하나님은 그 거친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진짜 알곡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해서 환경이 바뀌는 것도 기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환경은 그대로 있는데, 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내가 바뀌는 것을 두고, 오늘 본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아, 저 알곡이 익어가고 있구나"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알곡이 익어가는 증거입니다.
교회 봉사를 많이 한다고 익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는 보기만 해도 짜증 나던 사람이 이제는 짜증이 나지 않고, 전에는 꼴도 보기 싫던 사람이 불쌍하고 안쓰럽게 보이는 것, 이것이 익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알곡이 익어가는 풍경입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월 따라 그저 늙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 안에서 익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고난은 그대로인데 믿음은 오히려 깊어집니다. 아픔은 계속되는데 내 입술에서는 웬 감사가 그렇게 터져 나오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문제가 깊어질수록 나는 하나님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상처는 여전히 깊은데 그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눈물의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미운 사람은 여전히 미운 짓을 골라 하는데도,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 가엾고 안쓰럽게 보입니다. "주님, 저는 도저히 저 사람 품을 자신이 없습니다" 했는데, 나도 모르게 두 팔이 벌어져 그를 품어 안게 됩니다. 입만 열면 정죄하고 비판하던 이 입술이 축복의 입술로 바뀌고, 심판하던 매서운 눈이 긍휼의 눈으로 바뀝니다.
이것이 바로 알곡이 익어가는 풍경입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서 이 알곡이 아름답게 익어가는 풍경을 바라볼 때마다 얼마나 감동을 받는지 모릅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의 장관을 보는 것보다 열 배는 더 감동스럽습니다. 여러분 삶 속에 펼쳐지는 그 영적인 풍경을 보는 것이 말입니다.
저는 세계 각국 어디를 여행하든 딱히 찾아가 보고 싶은 풍경이 없습니다. 교회에만 오면 여러분 안에서 이런 천국의 풍경을 보는데, 굳이 세상의 무엇을 보러 다니겠습니까?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풍경은 세상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서로 연결되고 결합되어서, 내 옆에 있는 지체들이 익어가는 그 풍경을 보며 가슴 깊이 감동하고 감격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상급입니다. 주 안에서 익어가는 사람이 누리는 영적인 상급입니다.
내가 익어갈수록 다른 사람의 익어감이 눈에 보입니다. 내가 익어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익어가는 풍경이 절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저 남의 허물이나 잡는 검사 놀이나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0절에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단으로 묶고, 곡식은 내 곳간에 거두어 두라고 하십니다.
추수 때 하신다고 합니다. 다 거두어서 곡식은 주님의 곳간으로 간다고 하십니다. 그럼 가라지는 어떻게 합니까? 불태운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지옥이냐 천국이냐, 이 말씀은 제가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 결론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진심으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알곡 같습니까, 가라지 같습니까? 어떠십니까? 나는 알곡 같습니까, 가라지 같습니까?
아마 이 질문을 받고 마음이 답답한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알곡 같기는 한데, 가만히 보면 가라지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보면 알곡 같은데, 또 다시 보면 가라지 같습니다. 알곡 되었다가 가라지 되었다가 다시 알곡이 됩니다. 그래서 "당신은 알곡 같습니까, 가라지 같습니까?" 하고 물을 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제가 볼 때 아주 건강한 신앙입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런 어려운 질문을 받을 때 말입니다. 제가 예전에도 한번 가르쳐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일 좋은 대답은 역질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하고 물어오면, 여러분은 이렇게 되물으셔야 합니다. "목사님은 알곡입니까, 가라지입니까?"
"목사님은 당신을 알곡이라 생각하십니까, 가라지라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신다면, 저는 뭐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저에게 "목사님, 알곡 같습니까, 가라지 같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칩시다. 저는 뭐라고 대답할까요?
저는 백 퍼센트 알곡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제 혈관에 흐르고 있는데 당연히 백 퍼센트 알곡입니다. 저는 백 퍼센트 알곡인데, 아직 좀 덜 익은 알곡입니다. 덜 자란 알곡입니다. 백 퍼센트 알곡인데, 가만히 보면 제 안에 가라지가 좀 섞여 있는 알곡 같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제가 저를 보는 그 모습으로 여러분을 바라봐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예전에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똥 냄새 나는 카레와 카레 냄새 나는 똥 중에 하나를 먹으라고 하면 어떤 것을 드시겠습니까? 기억나십니까?
당연히 똥 냄새 나는 카레를 먹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카레인데 말입니다. 카레 냄새 좀 난다고 똥을 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또 제 자신을 볼 때, 꼭 똥 냄새 나는 카레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습니다. 카레는 카레인데, 똥 냄새가 한 번씩 납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줄 알았더니 사도 바울도 그렇더라고요. 로마서 7장 24절을 보면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7:24-25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까지는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탄식하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뭐라고 선포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바로 이어서 나오는 고백입니다.
그의 보혈로, 그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랬다저랬다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똥 냄새가 좀 나기는 해도 분명히 카레라는 뜻입니다.
나는 냄새가 나고 실수하고 넘어져도 카레가 분명합니다. 가라지의 모습이 엿보여도, 예수 안에 있는 저는 알곡입니다. 이 복음이 나를 살린다고 믿고 그 복음을 붙잡는 사람들은 다 알곡입니다.
예수 안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피가 여러분의 혈관 속에 흘러 다니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신분적으로 이미 다 알곡입니다.
다만 수준에서 조금 가라지 같은 모습들이 나타날 뿐입니다. 신분은 알곡인데, 수준은 아직도 똥오줌 가끔 못 가리고 실수하는 그런 알곡들입니다. 우리는 온전히 다 익은 완제품이 아니라, 한창 익어가는 중인 공사 중인 알곡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 여러분, 이것이 결론입니다.
우리는 완성된 알곡이 아닙니다. 완성된 알곡으로 우리 스스로를 재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완성된 알곡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추수 날까지 계속 익어가는 알곡들입니다. 구십 살이 되어도 우리는 더 익어갑니다.
내가 알곡인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온전하고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곡이라 인정해 주시고, 그분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알곡은 자신의 의로 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알곡은 자신의 선함을 믿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알곡은 자기의 '어떠함'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어떠함에 기대어서, 그분의 어떠함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알곡입니다.
그러니 너무 완벽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것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함과 온전함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약함을 발견하고, 그 약함이라는 거름을 맞으면서 익어갑니다. 못남 속에서 익어가고, 실수 속에서 익어가고, 잘못 속에서 익어가고, 눈물 속에서 익어가는 존재들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가라지 속에서도 익어갑니다. 우리 알곡들은 그렇습니다. 가라지들은 가라지들끼리 있으면 더 악해지고 더 단단해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라지 속에 있으면 마구 찔려서 피를 흘립니다. "아이고 주님, 못 살겠습니다." 하면서 그렇게 알곡이 됩니다. 익어갑니다.
못된 사람을 만났습니까? 여러분 안에 아직 탱탱해서 깨어지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여러분을 찌르고 있는 것이니,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알곡이 익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찔리고 피투성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에 늘 찔려야 합니다. 말씀이 그저 은혜가 되고 감동만 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받을 때마다 찔려서 피가 터져야 합니다.
가시밭의 백합화입니다. 가시나무 가운데서 아름다운 백합화가 핍니다. 알곡은 그렇게 자랍니다.
우리 신앙은 죽는 날까지 어떤 화려한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앞에 "내가 하나님을 위해 이만큼 살다 왔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어떤 환경과 처지에 놓이든지, 그 삶의 자리에서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온전히 숙성되어 가는 여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대단한 행적을 남겼는가로 우리를 평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이 마지막 날 보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얼마나 다듬어지고,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익어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앙은 무언가를 이루어 내는 성과가 아니라, 주님을 닮아 깊이 익어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은 완벽하고 온전한 사람을 추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고 하나님의 어떠함에 기대어서, 그 하나님의 그늘 안에서 익어간 사람, 그런 사람을 추수하십니다. "아,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 앞에 추수될 거야."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한 모든 선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은혜 가운데서 나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알곡입니다.
저는 요즘 여러분을 쳐다보면, 교회에 와서 여러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합니다. 힘들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힘든데도 여러분을 바라보면 참 행복합니다.
왜 여러분을 바라보면 제가 행복하겠습니까? 말씀 안에서 익어가는 분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그렇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익어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행복해서 그렇습니다. 그 익어가는 사람 곁에 가면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진짜 알곡들은 자신의 가라지 같은 모습에 아파하고 탄식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들은 자신이 가라지인지 고민조차 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너는 완전한 알곡이니?" 하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물으십니다.
"넌 누구의 은혜로 살아가니?"

우리는 완성된 알곡이 아니라 은혜 아래서 추수할 때까지 익어가는 알곡이라는 사실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알곡은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이 붙드시고,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알곡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과 허락하신 환경, 그리고 보내 주신 그 사람들 속에서 지지고 볶고 하면서도 잘 익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냄새가 되고, 그분의 향기가 되고, 그분의 백합화가 되는 아름다운 알곡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귀하신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