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내 허무한 날을 사는 동안 내가 그 모든 일을 살펴 보았더니 자기의 의로움에도 불구하고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원래 제 계획은 전도서를 매주 한 장씩 강해해서 열두 주 만에 마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다루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전도서의 한 복판이 뻥 뚫려 큰 구멍이 날 것만 같았습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7장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깊이 붙들고자 합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다 보면 후렴구처럼 자꾸 마주치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가 해 아래서 본즉"이라는 구절입니다. 성경을 펴서 읽을 때마다 이 말이 참 자주 눈에 밟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전도자가 도대체 무엇을 전하고 싶어서 이 표현을 쓰고 있겠습니까? 전도자 코헬렛이 이 짧은 문장을 끈질기게 반복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책은 안락한 책상머리에 앉아 머리로 지어낸 사변적인 철학서가 아닙니다. 현학적인 이론서도 아닙니다. 내 두 눈으로 삶의 현장을 낱낱이 목격하고, 내 발로 딛고 서서 처절하게 확인한 진실을 쏟아내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서는 생생한 인생 관찰보고서입니다. 관념의 유희가 아닙니다. 내가 살아내며 직접 보고 겪은 인간의 실상을 가감 없이 선포하겠다는 외침, 바로 그 무게를 싣기 위해 전도자는 "내가 해 아래서 본즉"을 거듭해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서를 읽다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평생 정답이라고 굳게 믿어온 것들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안다고 자부했던 것들을 자꾸 뒤집어엎으며 "아니다"라고 정면으로 부딪쳐 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의롭게 살아도 폭삭 망하는 사람이 있고, 못된 짓만 골라 하며 살아도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장수하며 떵떵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속이 덜컥 불편해집니다. 저 역시 마음이 참 불편합니다. 우리는 왜 이런 불편한 현실 앞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것입니까?
전도서가 우리가 평생 붙들고 살던 공식들을 하나하나 박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쥐고 있는 그 익숙한 공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의롭게 살면 복을 받고, 악하게 살면 벼락을 맞는다. 바로 이것 아닙니까? 교회에서도 늘 그렇게 배워 왔습니다. 의롭게 살면 하나님이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시고, 악하게 살면 당장 하나님의 불벼락이 떨어진다. 이것이 우리가 신줏단지처럼 모셔온 공식입니다. 그런데 전도자 코헬렛이 이 확고한 공식 앞에 떡하니 버텨 서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과연 그럴까?" 이렇게 서늘한 질문을 툭 던지며 우리를 거세게 뒤흔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전도자가 인과응보의 원리 자체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원리가 틀렸다고 우기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매서운 딴지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으로 틀렸습니다"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쥐고 있는 그 공식,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습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의는 고귀하며 악은 마침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 무너집니다. 성경의 뼈대가 그렇게 증언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전도자가 집요하게 딴지를 거는 진짜 지점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 공식 자체를 하나님 믿듯이 숭배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내가 만든 공식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습니다. 우리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세상은 마땅히 이렇게 돌아가야 해. 그런데 왜 세상 꼬락서니가 이따위로 굴러가는 거야?" 이 탄식이 터져 나오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내 입맛에 맞는 세상의 공식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재단하고 있기 때문 아닙니까? "세상이 왜 이 모양이야" 하고 내뱉는 그 불평은, 세상이 내 공식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오만한 계산서를 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 자신에게 들이대면 더욱 노골적입니다. "내가 평생 어떻게 살았는데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겨?" 우리는 누구나 이 완고한 계산기를 두드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자기 확신이 굳어지면 무서운 영적 괴물이 튀어나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짠 공식의 틀 속에 하나님을 억지로 욱여넣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만큼 바쳤으니 하나님은 반드시 이렇게 갚아주셔야 하고, 우리가 이렇게 헌신했으니 세상은 마땅히 내 뜻대로 굴러가야 맞지 않습니까?"라며 하나님께 삿대질을 합니다. 내가 짠 각본에 창조주 하나님을 조연으로 부려먹으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서슬 퍼런 교만입니까?
그래서 코헬렛은 이 썩은 공식에 취해 있는 우리를 후려쳐 깨우는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당신 손바닥 안의 공식대로만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의롭게 몸부림쳐도 망하는 자가 있고, 악랄하게 살아도 떵떵거리며 장수하는 기막힌 현실이 버젓이 존재한다고 들이미는 것입니다.
의인이 망하고 악인이 번성한다는 이 처절한 외침은, 세상이 그저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무법지대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앞세운 너희의 확신이 완전히 틀려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직시하라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정확한 문장으로 못 박아 드립니다.
얼굴들을 보아하니, 아직도 무슨 말인지 얼떨떨한 표정들이십니다.
저는 전도서를 읽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심령에 던지시는 이 서늘한 음성을 마주합니다. "너는 지금 인생의 정답을 원하느냐, 아니면 나를 원하느냐?"
전도서의 장을 넘길 때마다 이 집요한 질문이 제 귓전을 때립니다. 너희는 그저 손에 쥘 정답을 원하느냐, 아니면 살아 있는 나를 갈망하느냐. 너희가 그 고단한 인생길을 걸어가며 진짜 찾아 헤매는 것이 너희 구미에 맞는 해답이냐, 아니면 창조주 하나님인 나 자신이냐. 정답에 목이 마른 것이냐, 나를 간절히 찾는 것이냐. 이제는 대답해 보아라. 전도서 전체가 우리 멱살을 쥐고 이렇게 다그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전도서에는 지혜라는 단어가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 요령이 생기고 남보다 해답을 많이 꿰차고 있는 것을 지혜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지혜의 종착점은 잡다한 지식이 아닙니다.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너는 나를 진짜 알고 있느냐? 네가 나를 똑바로 알고 있다면, 너는 이미 지혜를 얻었고 참된 해답을 손에 쥔 것이다." 성경의 선포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곧 길입니다.
요한복음 14:6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당신을 진정으로 알고 신뢰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주님을 수단으로 부려먹어서 내가 쥐고 싶은 답을 캐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허구한 날 하나님을 지렛대 삼아 내 인생의 정답만을 빼먹으려 듭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룩한 신앙이라 착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천박한 종교 놀음이라 부릅니다.
정답을 찾으면 눈앞의 문제는 풀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으면 내 존재 자체가 풀립니다.
우리가 번번이 이것을 놓쳐버립니다.
우리는 이 기막힌 세상살이의 답을 온전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눈앞의 정답 맞히기가 아닙니다. 얽히고설킨 내 인생의 매듭을 풀어내고 진짜 나를 되찾는 일입니다. 나를 찾고 내 삶의 매듭을 풀 유일한 길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뿐입니다. 나를 지으신 창조주 앞에 무릎 꿇을 때 비로소 내 삶의 진짜 정답이 열립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결론이 어디로 치닫습니까? 한결같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바로 이것입니다.
전도서는 세상에 답이 없다고 넋두리나 늘어놓는 허무맹랑한 비관론이 아닙니다. 인간의 얄팍한 정답으로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날것의 현실을 우리 눈앞에 정면으로 들이미는 책입니다. 그렇기에 전도서는 우리 영혼의 밑바닥을 뒤흔들 만큼 한없이 깊고 준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는 정답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나라를 위해 피 흘려 희생했으면 나라가 그를 끝까지 책임지고 잘되게 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면 나라가 철퇴를 내리고 그 후손들이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상식이고 우리가 가슴에 품고 사는 확고한 공식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피땀 흘린 독립군 후손들의 현실을 한번 똑똑히 보십시오.
지금 그 처지가 어떻습니까?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상당수가 조국 땅도 밟지 못한 채, 중국과 러시아 벌판을 떠돌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제대로 대접받으며 사는 독립군 후손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차가운 타향을 유랑하며 가난과 질병 속에 눈물짓고 있습니다. 반면에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파들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떵떵거리는 자들이 얼마나 수두룩합니까?
유관순 열사의 후손을 아십니까? 유관순 열사 집안의 기막힌 사연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보셨습니까?
열사는 꽃다운 열여덟 나이에 결혼도 하지 못하고, 대를 이을 자식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서대문형무소 차가운 바닥에서 참혹하게 찢겨 죽었습니다. 반면에 민족을 팔아넘긴 괴수 이완용의 후손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
태평양 건너 캐나다에서 어마어마한 부를 누리며 호의호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뻔뻔하게 조상의 땅을 돌려달라고 소송까지 걸어 수억의 돈을 챙겨 떠났습니다. 여전히 떵떵거리며 배 두드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으로 들어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벨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정하신 참된 의인이요, 하나님이 온전히 기뻐 받으시는 제사를 올려드린 거룩한 예배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예배의 결과로 아벨이 받아 든 결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로운 제사를 드렸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친형의 몽둥이에 맞아 처참하게 피를 토하고 죽임당했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4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하나님이 도장을 콱 찍어주신 의인이요 하나님을 감동시킨 참된 예배자가, 들판에서 형의 돌팔매에 맞아 차가운 시신으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목숨을 앗아간 살인자 가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멀쩡히 살아남아 세력을 불리고 거대한 성을 쌓았습니다. 그 자손들은 당대 최고의 거부가 되었고, 악기를 쥐고 쇠를 다루는 문명의 창시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남유다의 성군 히스기야는 어떻습니까? 역대 어느 왕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 온전히 매달렸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던 신실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뒤를 이어 왕좌에 앉은 아들 므낫세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잔혹하고 극악무도했던 악당 중의 악당, 패륜의 왕이 바로 그 아들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이런 피 맺힌 역사의 실상을 똑바로 대면할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우리가 발 디디고 서 있는 이 세상은 정의가 반드시 즉각적인 보상을 받는 곳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악한 자가 당장 불벼락을 맞아 무너지는 곳도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심은 대로 즉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공식이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린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허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세상, 부조리한 질서가 판을 치는 세상 한복판에 우리가 내던져져 있습니다.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계십니까?
이 뼈아픈 물음 앞에 전도자 코헬렛은 오늘 본문 16절에서 우리 폐부를 찌르는 충격적인 권면을 던집니다.
전도서 7:1616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성도 여러분, 이것이 도대체 무슨 해괴한 소리입니까?
얼핏 들으면 세상 처세술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너무 튀지 마라. 대충 세상 눈치 보며 적당히 살아라."
예전에 우리 부모님들이 늘 자식들에게 주입하던 훈계가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모난 돌이 정 맞으니 어디 가서 앞장서지 마라. 중간만 가라. 시류에 적당히 묻어가며 살아라."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처세술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니 성경마저 그런 얄팍한 타협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고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니, 하나님의 사람이 어찌 의와 지혜를 거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의 칼끝은 의인이나 지혜자라는 단어를 겨누고 있지 않습니다. 바로 '지나치게'라는 이 네 글자 단어에 서슬 퍼런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의인이 되지 말라는 경고가 아닙니다. 지혜를 버리라는 궤변도 아닙니다. '지나치게'라는 족쇄를 채워, 전도자는 우리의 곪아 터진 위선을 정면으로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그 '지나침'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도덕적인 열심이 특출나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나치다는 것은 자기 확신이 목구멍까지 꽉 차 있는 병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내 의로움에 내가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기준이 되고, 내가 저울추가 되어 버린 오만의 극치입니다. 내 잣대로 온 세상을 난도질하고, 내 깜냥으로 타인을 정죄하며, 내 중심으로 하나님의 일하심마저 이래라저래라 재단해 버리는 영적 교만입니다. 전도자는 바로 그 무서운 자기 우상화의 덫을 '지나치게'라는 서늘한 단어 속에 고스란히 담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지나치게'라는 단어의 옷을 걸치고 사는 자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 하나의 확신으로 꽉 차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옳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버젓이 이런 말을 입에 올립니다. "나는 다 보인다." 저는 솔직히 그런 소리를 들으면 등골이 오싹합니다. 남의 속이 훤히 보인다는 것은 영성이 깊은 것이 아닙니다. 정신과 병동에서나 쓰는 말입니다. 그것을 의학 용어로 환시라고 부릅니다. 헛것을 보는 병입니다. 그런데 자기 눈에는 다 보인다고 떠벌립니다.
도대체 그 눈에 무엇이 보인다는 말입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네가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나는 네 시커먼 속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 우리 속에 은근히 이런 교만이 도사리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옳다. 나는 다 보인다." 이 시퍼런 옷을 버젓이 차려입고 교회 마당을 밟는 자들이 참으로 수두룩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똑똑히 아셔야 합니다. 이 옷이야말로 저 지옥 바닥에서 가장 알아주는 특급 명품입니다.
"내가 맞아. 나는 다 보여. 나는 너를 훤히 알아.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래?" 이런 위선의 갑옷을 교회 안에서 매일같이 자랑스레 걸치고 활보합니다. 바로 이 옷이 사탄의 진열대에서 지금도 가장 불티나게 팔려 나가는 지옥의 최고급 명품 중의 명품입니다.
그리고 이 저주받은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막대한 비용 청구서가 날아옵니다. 도대체 어떤 비용을 치러야 할까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 내가 저 인간보다 훨씬 제대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입증해 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맞아. 내 말이 맞아. 내 생각이 무조건 옳아." 이 오만한 독선에 갇혀 사는 사람들의 내면에서는, 그 알량한 자존심을 유지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잔인한 계산기가 돌아갑니다. 그 증명의 대가를 치르려면 무엇이 보여야 합니까? 다른 사람의 허물과 부족함이 사시사철 눈에 밟혀야 합니다. 이웃의 결점과 어설픔이 쉬지 않고 들통나야만 합니다. 그러니 이 옷을 걸치고 있는 한, 내 두 눈은 온종일 타인의 흠집과 오점을 샅샅이 뒤지는 사냥개처럼 굴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자들은 남의 티끌 하나를 귀신같이 잡아내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이 사람들이 왜 그토록 남의 약점과 치부를 찾아내지 못해 안달이 난 것입니까? 그래야만 내가 저들보다 의롭다는 거짓된 위선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간계가 얼마나 징글징글하게 교묘합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날 대한민국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온 천지가 핏대를 세운 비난과 삿대질로 뒤덮여 있지 않습니까?
왜 온 나라가 서로를 헐뜯지 못해 이토록 아우성입니까? 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밟아 뭉개려는 자들이 온 사방에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반드시 상대방의 파렴치함과 잘못을 발가벗겨 제물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혹시 여러분 중에 가까운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들어 본 분이 계십니까?
"당신이랑 한 공간에 있으면 숨이 턱턱 막혀."
가슴이 서늘해지는 소리입니다. 여러분은 살면서 이런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없습니까?
특히 한이불 덮고 사는 부부 사이에 이런 탄식이 자주 터져 나옵니다. 지금 뜨끔해서 웃으시는 분들은 다 한 번씩 겪어 보셨다는 증거입니다. "당신하고 마주 앉아 있으면 가슴이 꽉 막히고 숨을 쉴 수가 없어." 제가 수많은 성도들을 상담하면서 가장 뼈아프게 들었던 하소연 중 하나가 바로 이 말입니다. 저 사람하고만 있으면 숨통이 끊어질 것 같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다들 가슴을 치며 고통을 털어놓습니다.
어디 부부 관계뿐이겠습니까? 직장 생활이나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유독 그 사람 곁에만 가도 불편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힙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었거나 은연중에 그런 숨 막히는 기운을 뿜어내고 있다면, 핑계를 대고 변명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 벌거벗고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십자가 복음의 옷인지, 아니면 시퍼렇게 날이 선 '자기 의'의 갑옷인지를 처절하게 뜯어보아야 합니다. 과연 내가 복음의 은혜로 지은 옷을 입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구원이 걸려 있는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피 묻은 은혜의 옷을 입고 있는지, 내 잘난 의로움으로 짠 쇠사슬 옷을 입고 있는지 확인하셔야 합니다.
구원이 걸려 있는 일입니다.
내가 예수를 삼십 년, 사십 년을 믿고 직분을 받았는데도 사람들이 내 앞에만 서면 여전히 숨이 턱 막힌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룩한 의의 옷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지어 입은 바리새인의 옷을 걸치고 있을 가능성이 태산처럼 높습니다. 하나님께서 입혀 주시는 은혜의 옷은 결코 남의 숨통을 조이지 않습니다. 막혔던 숨을 깊이 들이쉬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상대방의 목을 조르는 자가 아니라, 상대방의 영혼이 다시 숨을 쉴 수 있도록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사람을 질식시키는 신앙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숨통을 틔워 주는 신앙입니까?
저는 내 신앙의 알맹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가름하는 데 이보다 더 서슬 퍼런 잣대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대면할 때, 내 입술의 말을 들을 때, 나와 한 공간에 머물 때 영혼이 환기되고 숨이 쉬어집니까? 아니면 멀쩡하던 사람도 내 앞에서는 기가 꺾이고 속이 뒤틀려 돌아섭니까? 그것을 정직하게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붙들고 있는 신앙의 실체가 무엇인지 단번에 드러납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목사님을 만나고 나니 이제야 살 것 같고 숨이 쉬어집니다"라는 고백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들을 때 세상 그 어떤 칭찬보다 가슴이 벅찹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제가 과거에 사람 숨 막히게 만드는 일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국가대표급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 숨통을 어떻게 틀어쥐고 피를 말리는지, 솔직히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여기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주변 사람 숨 막히게 하는 걸 보면 제 눈에는 다 어설픈 하수로 보입니다. 저는 아주 고단수로 빈틈없이 사람 숨을 틀어막던 지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날 누군가가 저를 만나 "목사님 덕분에 숨이 쉬어집니다"라고 말해 줄 때, 저는 그제야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리며 확인하는 것입니다. '아, 내가 이제야 비로소 내 의를 벗어던지고, 주님께서 십자가 보혈로 지어 주신 흰 세마포 옷을 입고 살아가고 있구나.' 그 칭찬이 달콤해서가 아닙니다. 그 고백을 통해 내가 오늘 어떤 옷을 걸치고 있는지가 낱낱이 비춰 보이기 때문에, 그 은혜 앞에서 마음 깊이 안도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저번 주 예배를 마치고 자리에 남아 계신 분들과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나눔을 가졌습니다. 그때 참 기가 막히면서도 가슴을 치는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들었습니다. 어떤 크리스천 청년 하나가 평생 함께할 배우자를 찾고 있는데, 그 배우자 조건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신실하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이랍니다.
배우자 조건이 무엇이라고요? 신실하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
성도 여러분, 그 청년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말을 내뱉었겠습니까?
"나는 배우자를 찾는데, 신실하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원합니다." 이 뼈아픈 역설을 왜 입 밖에 냈겠습니까? 실없는 농담이었겠습니까? 말장난이나 하려고 던진 소리겠습니까?
그 청년이 가슴에 피멍이 들어 그런 말을 토해낸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온갖 거룩한 척, 종교적인 가면과 폼은 다 잡고 살아갑니다.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의로운 사람인 양 목에 힘을 줍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곁에 다가오는 사람마다 숨통을 틀어막고 피를 말립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채 사람 숨 막히게 하는 그 수많은 종교인들을 보면서, 속에서 아주 진절머리가 난 것입니다.
"나 이제 그 가식에 완전히 진절머리가 났습니다." 이 처절한 절규를 "신실하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찾는다"는 기막힌 말로 쏟아낸 것입니다.
한마디로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메마른 종교 놀음에 취해 있는 그 위선자들에게 넌더리가 났다는 고백입니다.
"신실하지만, 저는 신실하지 않은 사람을 찾습니다." 제 귀에는 그 청년의 이 탄식이 다른 어떤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처절한 부르짖음으로 들렸습니다. "나는 종교인 말고, 진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가짜 말고, 진짜 예수의 생명을 품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교회 문턱만 닳도록 열심히 드나드는 사람 말고, 입만 열면 성경 구절을 줄줄 읊으면서 정작 마주 앉으면 사람 숨통을 턱턱 조여오는 그런 괴물 말고, 그 사람 곁에만 가도 막혔던 숨이 터져 나오고 영혼이 살아나는 그런 참된 배우자를 만나고 싶다는 절규입니다. 저는 그 청년이 지금 우리 교회를 향해, 그리고 오늘 우리를 향해 그 뜨거운 외침을 던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진짜 신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입만 열면 신실함, 신실함을 입에 올리며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청산유수로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신실한 사람의 진짜 실체는 어떤 모습입니까?
성경이 선포하는 신실한 사람은 흠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완벽하게 보이려고 거룩한 척 연기하는 위선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실함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뼛속 깊이 사무친 자기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 알량한 한계를 똑똑히 아는 것입니다. 내 속의 지독한 못남과 살 떨리는 죄성을 매일 대면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내 눈이 얼마나 동태눈깔처럼 흐리멍덩하며, 내 깜냥이 얼마나 편협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뼈저리게 자각하는 것입니다. 내 딴에는 의롭게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지만, 그 의로움의 껍데기를 한 겹만 벗겨내도 시커먼 죄가 잔뜩 묻어 있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 처절한 실상을 알기에 그 눈가에는 늘 참회의 물기가 마를 날이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 늘 가슴을 치며 웁니다. 이웃을 마주할 때도 내 의를 앞세워 삿대질하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늘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미안해서 가슴을 쥐어짜며 울고, 과분한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눈물을 쏟아냅니다. 성도의 얼굴을 쳐다만 보아도 고마워서 눈물이 핑 돌고, 그 영혼을 바라만 보아도 내 부족함 때문에 미안해서 웁니다.
자기의 밑바닥 한계를 똑똑히 아는 사람, 저는 바로 이런 사람이야말로 성경이 보증하는 신실한 사람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확신합니다.
십자가 은혜의 깊이를 진짜 아는 사람입니다.
예배 때 은혜 찔끔 받고 설교 말씀 겨우 몇 마디 주워듣고는, 고작 오 분도 안 돼서 곧바로 세상 모든 사람을 재판하는 판사 자리로 기어올라가는 그런 메마른 종교인 말고 말입니다. 진짜 이 십자가 복음이 심령 골수 깊이 박혀 있어서, 그 복음의 숨결로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참된 예배자 말입니다. 나 자신을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내 곁의 지체를 복음의 심장으로 품어내며, 이 부조리한 세상을 복음의 은혜로 끌어안고 걸어가는 사람 말입니다. 그렇기에 그 두 눈에 늘 거룩한 눈물의 물기가 묻어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진짜 신실한 자요,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외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영적인 감각이 완전히 메말라 버린 자들은 걸핏하면 자기 의로움에 취합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에 꽁꽁 사로잡혀, 오늘 본문이 경고하는 그대로 스스로 패망의 낭떠러지를 향해 걸어 들어갑니다.
성경은 바로 그들을 가리켜 바리새인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괴물이 바리새인이 아닙니다. 바로 그 모습이 바리새인의 본체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생애 내내 가장 경멸하시고, 치를 떨며 싫어하셨고, 곁에 두기조차 꺼리셨던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그 바리새인들 아닙니까? 그런데 기막힌 사실은, 이 징글징글한 바리새인의 피가 저와 여러분의 혈관 속에 고스란히 흐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성경 속 바리새인을 들여다볼 때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너무 내 꼴 같아서 가슴이 턱턱 막혀 오는데, 여러분은 정녕 안녕하신지 묻고 싶습니다.
바리새인이라는 말이 그저 남을 헐뜯는 욕지거리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그 완고한 위선자의 얼굴에서 내 추악한 자화상이 겹쳐 보여 숨이 막혀 오십니까?
부인하지 마십시오. 바로 우리가 그 바리새인입니다.
내가 바로 그 끔찍한 바리새인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직시해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참된 경외의 자리로 기어 나갈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영적인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위험한 인간이 과연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장 위험한 사람은 어쩌다 실수로 길을 잘못 든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결코 틀릴 리가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내가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내 말이 무조건 맞다니까. 내가 다 알고 있다니까." 이런 사람은 정말 위험한 사람입니다. 영적 세계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C. S. 루이스가 참으로 뼈를 때리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설프게 사악한 자들은 자신이 그리 선한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쯤은 압니다. 그러나 진짜 악질, 뼛속까지 철저하게 악한 자는 사시사철 자기가 옳다는 확신에 파묻혀 산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 살고 있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진짜 악한 괴물은 언제나 자기 혼자만 옳다고 믿습니다. 루이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억장을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선언을 덧붙입니다.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는 냉정하고 독선적인 도덕가가 거리의 매춘부보다 지옥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성도 여러분, 이 서늘한 선언이 가슴을 후벼파야 비로소 진짜 그리스도인입니다.
제가 삼십 년 전, 『순전한 기독교』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새빨간 줄을 좍 그어 놓고는 책장을 넘기지 못한 채 굳어 버렸습니다. 한참 동안 그 활자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습니다.
예배당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차갑고 오만한 도덕주의자보다, 거리의 창기가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훨씬 더 가깝다.
저는 솔직히 덜컥 겁이 났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왜 그토록 무서웠겠습니까? 우리는 종교의 껍데기를 쓰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을수록 스스로 안전지대에 서 있다고 착각하는 지독한 도덕주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틀리지 않았고, 내가 반듯한 자리에 서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도 당당히 합격점을 받을 것이라는 그 무서운 착각 말입니다.
그러나 전도자 코헬렛은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 멱살을 잡고 흔듭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당신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자부하는 그 알량한 옳음, 그 썩어 빠진 자기 의와 반듯함이야말로 지옥 낭떠러지 바로 턱밑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금 못을 박아 드립니다. 하나님에게서 가장 아득하게 멀어져 있는 자들은 밖에서 온갖 몹쓸 짓을 저지르는 죄인들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문제없어. 나는 떳떳해."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그런 유행가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문제없어.' 저는 그 노래를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죄악투성이요, 문제투성이입니다." 십자가 앞에 엎드려 이렇게 피를 토하듯 고백하는 노래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짜 생명의 노래입니다.

제가 몇 달 전 청과물 시장에 사과를 사러 간 적이 있습니다.
가게에 들어서서 값을 물어보니, 사과 한 줄에 육칠만 원을 부르더군요.
십 킬로 한 상자도 아니고 고작 한 줄에 육칠만 원이라니, 솔직히 손이 쉽게 나가질 않았습니다. 값을 듣고 망설이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득 제 눈에 진열대 밑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커다란 박스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그 허름한 상자 안에 사과들이 아무렇게나 마구 뒤엉켜 담겨 있었습니다.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바닥에 놓인 저 사과는 얼마입니까?" 그랬더니 주인이 대뜸 이렇게 말합니다. "아, 저 사과는 원래 이만 원인데 만 칠천 원에 그냥 가져가세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진열대 위에 번듯하게 올라가 있는 사과보다 양도 곱절은 많은데, 왜 저 사과는 이렇게 값이 헐합니까?" 주인이 들려준 말을 가감 없이 그대로 옮겨 드립니다. "맛은 똑같은데, 흠집이 많고 검은 점이 박혀서 상품성이 떨어져요."
상품 가치가 떨어지니 손님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 있고 상처 난 놈들만 골라내어 진열대 밑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알맹이 맛은 똑같으니 떨이로 빨리 치워버리고 싶어서 저에게 그렇게 값을 깎아준 것입니다.
제가 그 사과를 사겠다고 나섰더니, 곁에 서 있던 제 아내가 썩 못마땅한 눈초리로 저를 쏘아보며 묻습니다. "정말 이걸 사려고요?"
성도 여러분, 제가 도대체 왜 그 볼품없는 사과를 샀겠습니까? 한번 맞춰 보십시오.
제가 왜 흠집투성이 사과를 만 칠천 원이나 주고 덥석 샀을 것 같습니까?
값이 싸서 샀겠습니까? 맞습니다. 솔직히 값이 싸서 산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제 아내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제가 굳이 그 흠집 난 사과 상자를 집어 든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차마 아내에게는 낯간지러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진열대 밑바닥에 처박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그 흠 많은 사과 꼴을 가만히 들여다보는데, 꼭 제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내 꼴 같았습니다.
아무도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세상 기준으로는 상품 가치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그저 내버려진 채 바닥을 구르는 사과 말입니다.
그 사과 상자 앞에서 제 가슴 밑바닥에 이런 생각이 덜컥 올라왔습니다.
'아, 이런 나를 주님이 택하셨구나.'
이토록 흠집 많고, 검은 점투성이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쓸모없는 자. 세상 저울로는 값어치도 없고 성질머리마저 지독하게 못돼먹은 나를 우리 주님이 건져 올리셨구나.
주님이 그래서 나를 택하셨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될 만한 그럴듯한 조건을 갖추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상처와 허물이 너무 많아서, 내가 주를 위해 무슨 짓을 한다 한들 내 입으로 내 공로를 단 1퍼센트도 자랑할 수 없는 흠 많은 사과이기에 나를 지목해 부르신 것입니다. 진열대 위 육칠만 원짜리 사과는 오만 원에 사겠다고 깎으려 들면 자존심 상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밑바닥 만 칠천 원짜리 사과는 거저 주워가기만 해도 자존심 상할 것 없이 "네, 그저 감사합니다" 하며 엎드리는 사과 아닙니까? 바로 그 흠투성이 사과가 나였구나. 그 찌그러진 사과를 차에 실으며 제 영혼을 뼈아프게 마주했습니다.
값이 싸서 사기도 했지만, 너무나 내 모습 같아서 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흠 없는 최상품 사과가 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상품성 있는 인간이 되려고 기를 씁니다. 이 세상의 모든 교육과 경쟁이 가르치는 바가 딱 그것 아닙니까? 조금이라도 더 그럴듯한 상품성을 갖추어 보이려고 밤낮으로 피를 말립니다. 슬픈 사실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라는 점입니다. 여러분과 한솥밥을 먹으며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내 믿음이 얼마나 상품 가치가 높은지 그럴듯하게 포장해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들을 숱하게 봅니다. 반듯하게 살려는 노력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존재의 밑바닥 본질을 똑바로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더 나은 사람, 남보다 더 의로운 사람, 빈틈없는 완벽한 존재가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음성은 늘 정반대입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네게 흠이 없어서가 아니다. 흠집투성이요, 상처투성이이기 때문에 너를 불렀다." 성경은 이것을 못 박아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26-29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 만한 능력이 있고 남들보다 쓸 만해서 부름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혜의 손을 내밀어 건져 주지 않으시면, 세상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도무지 팔려 나갈 가망조차 없는 밑바닥 인생이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 앞에 자존심이 상하십니까?
이 부끄러운 진실 앞에서 뼛속 깊이 몸서리치며 감사의 눈물이 터져 나와야, 비로소 십자가 복음을 진짜 만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원래 그렇게 대단하고 완벽한 존재가 못 됩니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하신 오늘 본문의 칼끝이 바로 이 지점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라는 그 지나침의 교만이 결국 너를 영원한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준엄한 경고입니다.
내 자신이 흠투성이 사과라는 이 처절한 실상을 온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결코 우리 삶의 숨결이 될 수 없습니다.
예전에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던 한 여성 환자가 다른 환자와 격렬하게 다툰 뒤, 씩씩거리며 간호사실로 뛰어 들어와 이렇게 하소연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나는 조금 미쳤는데, 저 인간은 완전히 미쳤어요."
몸집이 꽤나 푸근하게 살이 찐 분이었는데, 억울하다는 듯이 간호사들에게 그 말을 쏟아내더군요. "선생님, 나는 조금 미쳤거든요? 그런데 저거는 진짜 완전히 미쳤어요, 저거."
저도 곁에서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그 우스갯소리 같은 한마디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뇌리에서 도무지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벌써 이십 년도 더 훌쩍 지난 옛날이야기인데 말입니다.
왜 그 짧은 한마디가 제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줄 아십니까?
제가 험한 세상을 부대끼며 살아보니, 그 환자는 적어도 자기가 조금 미쳤다는 사실만큼은 정직하게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 조금 미쳤어요." 자기의 병든 실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인간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지극히 정상이라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우겨댑니다.
그 병원의 환자는 "나 조금 미쳤거든요"라며 자기 한계를 실토했는데, 정작 교회 안팎에서 제가 만난 멀쩡한 사람들은 죄다 자기는 흠 없는 정상이라고 우깁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이렇게 큰소리치는 인간도 숱하게 널려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만 정상이야. 가만히 뜯어보니까 너희들이 다 돌아버린 거야."
제가 성도들을 마주 앉혀 놓고 상담을 할 때마다 듣는 하소연이 한결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 남편이 완전히 돌았습니다, 내 아내가 제정신이 아니고 미쳤습니다, 나는 아무 흠 없이 멀쩡한데 저 미친 인간하고 수십 년을 살다 보니 내 뼈마디가 쑤시고 골병이 들었습니다. 온통 남 탓하는 이 뻔뻔한 레퍼토리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악질적인 인간이 과연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이런 존재들입니다. "나는 아무 문제없는데, 저 인간이 미친 거야." 이것이야말로 영적 정신병동에서 가장 고치기 힘든 불치의 암덩어리입니다. 내가 조금 정신이 나가 있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의학적으로 영적인 자각과 통찰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의 손길 아래서 고침을 받고 살아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털끝만큼도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언제나 저 인간이 문제야"라고 삿대질하는 자는 영혼의 회복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오만한 확신 자체가, 영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미쳐버린 밑바닥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지혜는 내가 제법 쓸 만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 알량한 자부심에 있지 않습니다. 앞으로 내가 노력해서 반드시 괜찮은 인간이 되고 말겠다는 그럴듯한 다짐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 앞에서 내가 도대체 어떤 꼬락서니의 존재인지를 뼈아프게 직시하는 것, 바로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짜 지혜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흠집투성이에, 걸핏하면 한계에 부딪히고, 거룩한 척 의를 행하는 그 껍데기 속마저 시커먼 죄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존재. 바로 그런 추악한 나를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저 시장 바닥에 팽개쳐진 흠 많은 사과 같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손수 집어 들어 택해 주셨습니다. 나 같은 자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가슴 밑바닥 깊이 새기고,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십자가 은혜를 되새기며 그 사랑 안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것, 성경은 바로 이것을 복음이 말하는 참된 지혜라고 선포합니다.
이 거룩한 지혜를 품고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을 가리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삶이요 정직한 자의 걸음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자리에서 가슴을 치며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내 밑바닥 한계를 똑바로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삶입니다. 내 영혼 속에는 곪아 터진 영적 정신병이 가득 차 있는데, 겉으로는 나 혼자만 결백하고 의롭게 산다고 우겨대는 꼴, 그것이야말로 영적 세계에서 가장 썩어 문드러진 최악의 중환자 모습입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 지식을 많이 긁어모으고 머리를 굴리는 것을 지혜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못 박아 선언하는 지혜의 본질은 전혀 다릅니다.
잠언 9:1010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지혜는 잡다한 지식을 많이 꿰차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감히 누구의 서슬 퍼런 존전 앞에 서 있는가를 똑똑히 자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제 앞에서는 서로 낯붉히며 멱살 잡고 안 싸우지 않습니까? 안방에서는 죽일 듯이 으르렁거리며 싸우는 부부도, 목사 앞에서는 점잖은 척 거룩한 표정을 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족한 목사 하나가 내 눈앞에 버티고 서 있다는 사실만 의식해도 사람이 함부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하물며 살아 계신 불꽃같은 눈동자의 하나님이 내 면전에 계시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의식하며 산다면, 내가 그분 앞에서 얼마나 부끄러운 죄인인가를 뼈저리게 인식하고 살아간다면, 우리네 삶의 걸음걸이가 어찌 송두리째 뒤집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 누구 앞에 서 있는지를 낱낱이 자각하고, 이 기막힌 인생길에서 내가 붙잡을 분은 오직 그분 한 분뿐이구나, 내 썩은 동아줄을 내려놓고 진짜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의지할 데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 바로 그 절박한 심령으로 주님 발치를 붙드는 태도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부릅니다.
우리는 경외라고 하면 교회에서 몸 부서져라 봉사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부리는 것으로 치부합니다. 그러나 내가 서 있는 자리를 알고, 그분 앞에 납작 엎드려 살아가는 그 영적 태도 자체가 진짜 경외입니다. 십자가 복음에서 터져 나오는 이 지혜를 쥐고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는 것만이, 우리 영혼 뼛속 깊이 악질처럼 박혀 있는 저주받은 '의인 증후군'의 족쇄를 끊어내는 유일한 탈출구입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 외에는 다른 길이 전혀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심령 속에는 저마다 겉모양과 증세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내가 옳다고 버티는 그 지독한 의인 증후군이 목구멍까지 꽉 차 있습니다.
이 징글징글한 위선의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 참된 해방을 누리는 유일한 비결은, 날마다 이 피 묻은 십자가 복음을 내 자신을 향해 피를 토하듯 설교하는 길뿐입니다. 아침마다 복음의 눈으로 내 처지를 바라보고, 하루의 모든 순간을 복음의 은혜로 해석해 내는 거룩한 습관이 영혼에 배어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오늘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또다시 썩어 빠진 바리새인의 자리로 도로 굴러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지혜자들에게는 반드시 겉으로 드러나는 뚜렷한 열매 하나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사람인지, 아니면 그저 입술로만 주여 주여 부르며 경외함 없이 살아가는 가짜인지 단번에 판가름할 수 있는 서슬 퍼런 시금석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그 비밀을 오늘 속 시원히 까발려 드릴까요? 여러분이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고 있는지 그 적나라한 실상을 마주할 용기가 있으십니까?
솔직히 별로 알고 싶지 않으실 겁니다. 내 밑천이 다 탄로 날 것 같고, 찔려서 가슴이 쑤시고 아플 것 같으니 외면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며 십자가 앞에 엎드려 사는 사람에게는 예외 없이 이 열매가 맺힙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눈물겹도록 귀하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심장이 어디를 향해 뛰고 있는지를 비로소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온 마음이 도대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눈동자는 언제나 사람에게 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깊이 알아갈수록 잡다한 성경 지식이나 종교적 이론이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짜 인격적으로 대면할수록, 내 곁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눈빛이 송두리째 달라집니다.
내 영성이 깊어진 것 같고 신앙의 지혜가 풍성해졌다고 큰소리치면서도, 곁에 있는 사람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냉랭하고 거칠다면 그 꼬락서니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여전히 내 기분과 내 자존심이 기준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하찮게 짓밟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혜로운 신앙인이 아닙니다. 단언컨대 백 퍼센트 썩어 빠진 '자기 의'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능한 명의는 환자의 비위를 맞추지 않고 메스를 들어 정확한 진단을 내립니다. 속이 쓰리고 뼈아프더라도 오늘은 이 진단을 피하지 말고 세게 들으십시오.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백 퍼센트 자기 의입니다. 지독한 자기 확신과 교만의 덩어리일 뿐입니다.
내가 오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그 태도야말로, 지금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비춰 주는 가장 정직한 거울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며 그분과의 관계가 십자가 안에서 바르게 정돈된 사람은, 사람을 바라보는 두 눈에 온기가 돌고 영혼이 너그러워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면 할수록 그 심령은 자꾸만 부드럽고 온유해집니다. 비로소 품어집니다. 저 인간이 왜 저토록 모질게 말하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지, 그 곤고한 영혼의 사정이 비로소 가슴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8절을 보면 전도자 코헬렛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전도서 7:1818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난다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이 모든 일'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물론 이 짧은 구절 안에는 인생의 수많은 모순과 헛된 굴레들이 죄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전도서의 말씀을 묵상하며 읽어 내려오다가, 너무나 선명하고 뚜렷한 한 가지 사실을 보았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진짜 두려워하며 경외하는 자는 어디서 건짐을 받습니까? "나는 언제나 옳다. 나는 절대 틀리지 않았다"라며 목에 핏대를 세우던 그 지독한 의인 증후군에서 반드시 해방됩니다.
벗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 속에 여전히 이 완고한 병이 시퍼렇게 도사리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자는 "내가 맞아. 내 판단은 틀릴 리가 없어. 나는 너희 속을 다 꿰뚫어 보고 있고,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어"라며 으스대던 이 징글징글한 영적 문둥병에서 비로소 깨끗이 벗어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깊이 존경하는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우리는 너무 영적이어서 인간이 되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유진 피터슨
말씀 앞에 가슴을 좀 열어젖히십시오. 저는 이 문장을 읽다가 발걸음이 뚝 멈춰 서서 가슴을 치며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도대체 어디서 파견 나온 안기부 요원들도 아니고, 왜 그렇게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굳어 계십니까?
영적이어야 한다, 영적이어야 한다 입버릇처럼 부르짖다가, 정작 마땅히 품어야 할 인간다운 온기마저 잃어버렸다는 이 탄식 앞에 저는 뼛속 깊이 공감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제 눈에는 마치 살벌한 전쟁터처럼 보입니다. 저마다 남들보다 더 옳아 보이려고 기를 씁니다. 남들보다 더 의롭고, 더 흠 없는 사람인 척 포장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훨씬 정의롭고, 내가 저 인간보다 훨씬 더 신령한 신앙인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피비린내 나는 아귀다툼의 장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짜 믿음 따위에는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 판단이 맞았다는 것, 내 고집이 옳았다는 알량한 사실 하나 증명해 보이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썩어 빠진 종교 냄새만 펄펄 풍기는 위선자들이 오늘날 교회 마당에 아주 우글우글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정작 흘러넘쳐야 할 사람 냄새가 싹 메말라 버렸습니다. 연약한 죄인들이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따뜻하고 너그럽게 품어주며 한 몸으로 연결되고 결합될 때 터져 나오는 그 거룩한 생명의 향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저마다의 거룩함을 뽐내는 조잡한 종교 박람회장으로 전락해 버린 꼴 아닙니까? 사람들이 마치 상품처럼 진열대 위에 올라앉아 있는 거대한 종교 전시장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역겨운 위선의 껍데기를 향해 서슬 퍼런 일갈을 날리셨습니다. "이 회칠한 무덤들아."
마태복음 23:2727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메마른 종교인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참된 인간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두 눈에 참회의 눈물이 마르지 않고, 내 밑바닥 연약함을 뼈아프게 알기에 곁에 있는 지체를 품어낼 줄 아는 사람, 바로 그 따뜻하고 넉넉한 참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기독교는 껍데기만 번지르르한 종교인을 양산하는 곳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가장 사람다운 인간으로 회복되어 가는 생명의 길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녔으면서도 끝내 참된 인간이 되지 못한 채 독선적인 종교 괴물로 늙어간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진짜 절망 아닙니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심장을 품고 더 너그럽고 더 따뜻한 진짜 인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수록 남의 속이 훤히 꿰뚫어 보이고 신비한 환상이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진짜 두려워할수록 그 사람은 자꾸만 겸손해지고, 그 삶에서 구수한 사람 냄새가 진동합니다. 예전에는 곁에 가기만 해도 가시가 돋쳐 숨이 막히던 사람이었는데, 은혜를 받더니 자꾸만 다가가 기대고 싶은 사람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내 잘난 의로움 때문에 상처 주고 매정하게 돌아섰던 그 사람, 등 뒤에 두고 온 그 영혼이 자꾸만 눈에 밟혀 가슴을 치며 그리워집니다.
바로 그 사람이 진짜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성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을 들여다보십시오. 오만한 종교성으로 머리끝까지 꽉 찬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가 무조건 옳으니 교회가 세상을 향해 삿대질하며 훈계해야 한다고 목에 핏대를 세웁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 핏대를 세우며 외치더군요. "세상이 저렇게 썩어 문드러졌는데 교회가 입 닥치고 가만히 있으란 말입니까?" 그러면서 붉은 띠를 두르고 푯말을 치켜든 채 세상과 멱살잡이를 벌입니다.
저는 자기 의와 살벌한 의분으로 가득 차서 남을 정죄하는 이런 종교인들과 천국에 함께 갇혀 사느니, 차라리 흠 많은 죄인들과 어깨를 부대끼며 살겠습니다. 만약 천국이 온통 그런 차갑고 숨 막히는 종교 냄새로 찌들어 있는 곳이라면, 솔직히 저는 그런 가짜 천국에는 발도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메마른 종교 규칙을 숭배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참된 진리를 따르는 예배자들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진리는 우리 삶 속에서 반드시 따뜻한 인간다움의 열매로 증명됩니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 말라" 하신 전도자의 준엄한 경고는 바로 이 뜻입니다. 바리새인의 옷을 찢어버리고, 사람 냄새 훈훈하게 풍기는 참사람으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호소입니다.
오늘 선포된 이 전도서의 말씀이 여러분 영혼 속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던 그 몹쓸 '의인 증후군'을 완전히 불태워 사르기를, 거룩하고 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